광주의 강 목사님과 약속한 날이 왔다. 아내와 함께 광주의 목사님 댁에 들르니 10시 반. 도중에 농산물시장에서 참외 한 상자를 샀지. 목사님께서 강진의 마량에 가서 회를 먹고 고금도를 들러 오고 싶은가, 아니면 영광 백수 해안도로를 달리고 거기에서 식사를 하기를 원하는가를 물으셨을 때 나는 주저없이 강진 마량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곳은 목사님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훨씬 잘 아시고 깊이 있게 안내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와 아내가 회를 좋아하는데 지난 번에 거기에 갔을 때는 둘러만 보고 온 것이 미안하였기에 이번에 잘 대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량이라는 포구가 매력이 있었던 것 또한 거기를 선택한 이유였다.
내 차는 목사님이 사시는 아파트 주차장에 두고 목사님의 차를 타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앞에 타시고 운전을 해 가시는데 내가 알던 도로가 아니라 지름길만 찾아서 가시면서 갖가지 설명을 곁들여 주셨다. 오랜 가뭄 후에 비가 온 뒤라서 푸른 산과 들이 너무나 좋아 보였다. 조수석의 사모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엿과 떡과 자두, 물, 나중에는 귀한 망고까지 계속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셨다. 여행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가면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교회 이야기도 했지만 농사 짓는 이야기와 유럽 여행, 특히 이스라엘과 터키 여행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즐거운 에피소드를 챙겨주시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피곤한 줄 몰랐다. 예루살렘에 관한 이야기와 이스탄불과 터키족에 관한 이야기, 동방교회의 세 교부에 관한 이야기 등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평소에 조용하신 사모님께서 계속하여 우리를 즐겁게 하셨으니 '인삼은 몇 년만에 캐는가'라고 물으시니 '6년'이라는 대답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다음에는 '산삼은 몇 년만에 캐느냐'고 목사님께 개인적으로 물으셨다. '3년'이라고 답하자 웃으시면서 산삼은 '보자마자' 캐는 것이란다. 모두 동감을 하면서 맘껏 웃었다. 조금 더 갔을 때에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들은 분명히 한국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단다. 그 이유인즉 한국 사람이었다면 뱀을 잡아먹어버렸지, 선악과를 따 먹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다시 한번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이 터졌다. 목사님께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술값을 내기 싫어서 추는 춤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나와 아내는 잠간 생각하다가 거의 동시에 '주춤'이라고 정답을 맞췄다. 거의 동심의 세계 아니면 대학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을 느꼈다. 얼마 후 나주 가까이 갔을 때는 보신탕 벨트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강진에 가까이 가면서는 월출산의 아름다움을 여기저기에서 보도록 안내해 주셨다. 이전에 강진과 월출산에 가던 길이 아닌 전혀 새로운 곳으로 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강진에서도 마량을 향하는 길은 바다를 끼고 도는 해안도로를 택하였다. 그 길의 맛은 참 별미였다. 마침 물이 많이 들어오는데 목사님 말씀이 '6물'이란다. 그리고 이 정도로 밀물이 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란다. 마량이 가까울수록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중학생 시절부터 부모님을 떠나서 유학(?) 생활을 하였는데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60리 길을 밤에 찾아간 이야기도 하시고, 밤마다 울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앞과 옆에 동네가 보이니 아직도 살고 계시는 친척분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지나치는 집들을 가리키기도 하셨다.
마량항. 후박나무로 덮여있는 까막도를 바라보면서 고금도를 연결한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내와 함께 바다에 있는 배들의 모습을 좋아하여 그림을 그리고자 사진 촬영을 하러 왔던 지난 겨울을 떠올렸다. 아내는 오늘도 배들을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싱싱한 자연산 우럭과 광어와 소라-여기는 자연산이 아니면 매매가 불가능하단다-를 사 가지고 식당으로 갔다. 너무나 싱싱한 고기로 회를 준비하고 소라는 살짝 익혀 내놓았는데 그 맛과 푸짐함이란...... 목사님께서 친구인 나를 위로하여 대접한다고 이렇게 많이 준비하신 것이다. 정말 맛있게 먹고 매운탕으로 마지막 마무리를 하였다. 물론 막걸리를 한 컵씩 마시는 즐거움도 나누었고. 마량의 의미가 임금님의 말을 키우는 곳이란 뜻이라고 설명해 주셔서 처음으로 마량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두 마을에서도 마량 사람들은 상놈으로 취급당하고 건너마을 사람들은 양반으로 군림하여 서로 혼인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을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 주시니 오늘 강진 마량의 여행길은 참으로 깊이가 있고, 알찬 여행길이 되었다.
식사후에 선착장을 따라 걸으니 낚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숭어를 비롯하여 10여 마리를 잡은 모습. 그리고 선착장에 토요무대도 만들어서 주말에 공연할 수 있게 한것을 보니 이제는 마량이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어두었다.
다시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돈 후에 다리를 타고 고금도로 들어갔다. 대학 시절에 나와 같이 공부했던 사모님의 남동생이 그 섬에 근무중이란다. 나는 대학 졸업후에 첫 발령을 받은 장소가 고금도의 금일 중학교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남다른 의미를 느끼면서 섬을 둘러보았다. 상당히 큰 섬이요, 논밭이 많아서 사람들의 생활도 넉넉해 보였다. 거기에는 사적 114호인 이순신 장군의 충무사가 있었다. 이곳은 충무공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란다. 충무사를 둘러보며 효천고 엄주일 선생님의 조일전쟁에 관한 책을 읽고 율촌에 있는 충무사를 찾았던 기억이 나고, 나라를 지킨 고마운 분들을 다시 생각하는 귀중한 역사체험의 시간이 되었다.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완도의 약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다리로 연결을 한 후에 도로를 4차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제 남해안의 여러 섬들은 더 이상 섬이 아니요, 가장 붐비는 육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려청자도요지에 들러서 그릇을 사려고 하는 사모님은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내가 보신탕을 좋아한다고 해서 봉황 보양탕집에 들러서 전골을 시켰는데 그 특별한 맛이란...... 아내도 깜짝 놀랐다. 배불리 많이 먹고 광주로 돌아오면서 아마 10여년만에 이런 사적인 만남을 가진 것 같은데 너무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감사하기만 하였다. 사실 과거에도 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온 내가 아닌가. 친구라고 하시지만 연세도 몇 살이나 더 많은데 늘 가까이해 주시고 챙겨주시니 너무 감사하다.
계룡에 무사히 와서 생각하니 오늘 여행은 정말 황홀(?)했다. 이것은 외국 여행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 여행이나 먹는 것은 맘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즐겁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오늘 여행이 참 즐거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더욱 그러했다. 목사님은 세 딸을 다 출가시키고 이제는 이전의 어려운 시간을 많이 벗어나셨지만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도 새로운 문제들은 계속 있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심지어 외국에까지 가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과,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돌보는, 그러면서도 겸손하기 그지없는 목사님과 그 많은 어려움들을 오직 하나님게 기도하시면서 이겨내고 조용히 내조하시는 사모님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고 배운 하루였다. 새로운 도전과 자극도 주고 위로도 준 하루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먹구름들을 모두 바람에 날려보내고 환한 햇볕을 즐기며 감사를 드린 하루였다. 이 모두가 선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이다. 하나님을 믿는 동일한 신앙이 있기에 일어난 일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목사님과 사모님을 모실 수 있기를 바란다.
2012. 7.9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