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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회 책 읽는 사람들 독서모임
1. 일시 :20240716 18:30-20:45
2. 장소: 편한 도서관-성원아파트 3동 508호
3. 참석자: 정경일, 한종성, 이선희, 김우곤, 김은정 5명
4. 발표-김은정 님- 팀 켈러, 『일과 영성』
책을 정리한 글과 yes 24에서 우수 review로 선정된 글을 읽고, 책을 읽은 소감들과 일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이선희 님이 준비해 온 쑥떡과 수박을 먹으며 대화.
5. 2024년 8월 발표: 8월 20일(화). 한종성, 릭 워렌 『 목적이 이끄는 삶 』
* 발표자의 글
팀 켈러의 『일과 영성』
2024. 7. 16. 김은정
책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rpkNQqY0wuE
영성책방의 동영상 정리-두 번으로 나누어 해 주는데 아주 좋네요.
1. https://www.youtube.com/watch?v=gLMo2EKZMOI
2. https://youtu.be/aRAY6V7UIhw?si=gnVNtf2F4PbiCVqx
왜 일해야 하는가?
어째서 이토록 우리네 삶이 고달픈가?
무슨 뾰족한 수는 없는가?
이런 질문에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답을 주는 이 책을 잡으라!
〈뉴욕타임스〉가 꼽은 베스트셀러 작가 티머시 켈러는 어떻게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일과 직장생활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드러내게 하시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날이 경쟁이 치열해지고 불안정해가는 직업세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어째서 이토록 고달픈가? 무슨 뾰족한 수가 없겠는가?”
뉴욕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 담임목사이자 〈뉴욕타임즈〉가 꼽은 베스트셀러 「The Reason for God」의 저자인 티머시 켈러는 20년 넘게 학생들과 직장인, 임원급 리더들에게 일과 소명에 관한 문제들을 가르치고 상담해왔다. 그리고 이제 그간의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전 세계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 무얼 위해 일하는가, 피 튀기는 경쟁과 실적 지상주의가 판치는 일터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고 고객들을 섬길 것인가, 직업 세계에서 저마다 가진 재주를 활용해서 뜻을 지키고 보람을 얻을 방법은 없는가, 일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살릴 뿐만 아니라 더 키워나갈 수는 없을까, 직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까 따위의 심각한 주제들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심도 있는 인사이트와 불쑥불쑥 던지는 소스라치리만치 놀라운 조언들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지혜야말로 일터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엄청난 실마리가 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한다”는 크리스천의 노동관은 진취적인 직장생활과 균형 잡힌 개인생활의 토대가 된다. 켈러는 직장에서 드러내는 뛰어난 능력과 성실성, 절제된 태도와 창의성, 그리고 열정이 제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을 넘어 다른 이들을 돕는 길이자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는지 소상하게 설명한다.
저자 : 팀 켈러 (티머시 켈러) (Timothy J. Keller,팀 켈러)
맨해튼을 비롯해 미국 뉴욕 세 군데 지역에서 약 6천 명의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리디머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설립 목사. 팀 켈러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 복음 중심이며,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지성으로 이 시대를 통찰력 있게 읽어 준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팀 켈러는 한 시대의 문화와 사상이 만들어지고 집약되는 ‘도시 지역’ 선교에 헌신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전 세계 100개 이상 도시에 430개 교회의 개척을 도왔다. 2017년부터는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세계 각국 교회 지도자들의 도시 전도와 사역을 돕는 단체인 CTC(City to City)에서 섬겼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버크넬대학교(Bucknell University), 고든콘웰신학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했다. 1984년부터는 5년간 모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강단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췌장암 투병 끝에 2023년 5월 19일 타계했다.
프롤로그
<일의 본질에 대한 재설정>
- 본질 : 자기완성의 도구, 자아실현의 수단 -> 개인적인 이해를 초월하여 어떤 존재를 섬기는 사명
- 목적 : 하나님을 높이고 인류를 번성케 하는 문화 창출
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라 창조주가 그리신 밑그림이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일하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큰 기쁨을 누리셨다(창 1:31, 2:1).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늘 일하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과 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도록 설계된 터라 일거리를 잃으면 적잖이 불안해진다. 이런 자각은 ‘생존하기 위해’ 일한다는 통념에 더 깊고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 발견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갈 때, 깨달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일하신 뒤에 쉬셨다. 그 뜻은 오직 노동만이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며 쉼은 필요악으로 여기는 반대쪽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설령 교회 사역일지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하며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신학적인 기초를 견고하게 하여야 한다.
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 플라톤은 이 세상에서 영적인 통찰과 정결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무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몸을 가장 적게 움직이고 정신을 최대한 왕성하게 움직이는 부류를 가장 고상한 일로 쳤다. 하지만 성경은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고귀하다.
필립 젠센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자나 왕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정의롭고 고상한 정치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목수로 오셨다.”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3)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다
일은 창의성, 특히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라고 명령하신다. 수를 늘이라고 명령하시는데 단순히 ‘출산’이 아니라 ‘문명’을 뜻한다. 인류에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세워가는 걸로 일을 삼게 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며’ 더 나아가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하라는 의미이다.
일은 세상의 기본 구조를 더 발전시키거나 유지하거나 고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의 노동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된다.
4)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하나님이 크리스천들을 준비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는 것처럼 거룩한 백성들 모두에게 갖가지 달란트와 은사를 주셔서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목표를 이루게 하셨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크리스천이라면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 라는 일에 대한 소명이 필요하다. 루터는 “비록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라고 말하였다.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다. 크리스천은 굳이 직접 목회를 하거나 비영리 자선단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하는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
1)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하나님은 일을 축복하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은사와 자원이 온전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쓰이도록 하셨지만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저주가 임했다. 이 죄는 인간의 삶 전체에 배어들어 있다. 죄에 오염된 노동은 ‘고통스러운 수고’(창 3:17)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소망과 깊은 위안을 찾고, 온몸을 던져 일해야 한다. 일을 하며 열매를 바라지만 이 땅의 현실에서는 가시덤불이 자랄 것이다. 하지만 지치지 않을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아울러 이생에서 하는 일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노동의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또한 온전할 수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2)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인간이 노동에서 실감하는 소외감은 크다.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한계가 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2-23).
성경은 직업 선택과 관련하여 말한다.
첫째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둘째로 노동의 주목적이 세상을 섬기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일을 하라.
셋째로 활동하고 있는 분야의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단순히 일하는 차원을 넘어 피조 세계를 보살피는 인류의 능력을 확대해 가는 데 노동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3)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인간의 마음에는 일과 거기에 따르는 이익들을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세우는 바탕으로 삼으려는 강력한 성향이 있다. 그러면 이웃과 자신을 구별해서 온 땅에 부각시키고 스스로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방편이 될 따름이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노동의 동기는 권력과 영예가 되었다. 여기서 우월의식,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가 생겨났다.
4)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루터는 피조물 가운데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역사적으로 서방세계를 지배했던 세 가지 문화(전통, 현대, 포스트모던) 또한 우상에 해당된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과학적 증거’가 우상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세상을 모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가 결합된 도덕적 표준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며,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여긴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현대사회(일과 직업이라는 영역)에서도 복음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복음은 일과 관련해서 맥락이 전혀 다른 대안을 내놓는다.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지 세계관을 제공한다.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셋째로 복음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한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윤리기준을 선사한다. 넷째로 복음은 일을 하는 동기를 바꿔 놓을 뿐 아니라 신선하고 강인한 힘으로 심령을 가득 채워 준다.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
1)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든 인류는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독교 세계관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
복음에서는 온 세상이 선하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온 세상은 죄에 빠졌다. 하나님의 예수님은 영혼과 육신, 이성과 감정, 인간과 자연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모두 구속하신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구원받고 회복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내러티브와 기독교 세계관이 복음과 비즈니스, 복음과 저널리즘, 복음과 고등교육. 복음과 예술, 복음과 의료, 세상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된다. 세계관은 모든 일의 틀을 잡는 토대가 된다.
2)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일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이다. 이것이 성경의 노동관이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가르쳐 솜씨 좋은 농부가 되거나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게 하신다고 말한다(사 28:24-29).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이라고 부른다.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모차르트는 예수를 믿었든 아니든 선물임에 틀림없다. 대중문화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일반적은 반응은 ‘외면’과 ‘이탈’이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들에 불복종하는 일련의 행위를 죄라고 생각하는 율법적인 시각 탓이다. 문화 전반에서 뒷걸음질 치는 바람에, 도덕적인 순결, 재정적인 안정, 순수한 교리라는 우상을 만들어냈다(바리새인 같은).
이원론의 대척점에는 반드시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3)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첫째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아 가야 한다.
둘째로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실체와 능력을 파악하여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경험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직원들은 어떻게 일해야 할까?
첫째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께 하듯 일해야 한다.
둘째로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셋째로 기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고용인들은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첫째로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상대가 인격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모욕하거나 오만해서는 안 된다.
4)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 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새로운 능력과 열정은 구원의 확신에서 시작된다. 또한 일과 쉼의 균형이 좋아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믿음의 행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복음은 일을 향한 더 큰 열정과 더 깊은 안식으로 이끄는 새로운 힘을 줄 것이다.
예스24에서 우수작으로 선정한 리뷰 2014-01-04
원문주소 : https://sarak.yes24.com/review/7539695
언젠가 이런 꿈을 꾼 적 있다. 하나님 앞에 들려 올라갔던 것.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주님 앞에 호출되어 섰다. 어리둥절하고 덜덜 떨리는 내게 흰옷을 입은 예수께서 물으셨다. “어떻게 살다 왔는지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해 보아라.”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예 저는 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공부도 곧잘 했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셋 낳았고...”
어쩌고저쩌고 떠벌리는 사이 나는 갑자기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다시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며 다시 불러 달라고 하자 나는 도로 주님 앞에 서게 되었다.
인자하게 웃으시며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래 그거 말고 이제는 내가 네게 준 달란트를 가지고 이웃과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사용하며 살다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아라.” 그리고는 잠에서 깨었다.
나는 내가 잘나 학교 다니고 아이 낳고 돈 벌며 산다고 무의식중에라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다 왔느냐는 질문에 고작 내가 했던 대답이 그거였으니 ... 나는 최소한 그게 살면서 제일 내세울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그 꿈을 꾼 후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게 다 주님 주신 은혜와 달란트로 인해 내가 누린 것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이웃과 나누고 사랑하는 데에 쓰는 게 하나님 뜻하시는 삶인 모양이구나... 깨달음은 얻었으나 살면서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집안일을 하고, 그러느라 어떤 날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하며 살아가는데 그게 이웃과 공존하며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죄다 나 자신을 위한 일들이었지 과연 그것이 이웃과 나누는 삶이며 내 달란트를 바르게 쓰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일이 그러므로 즐겁지 않았고, 즐거웠다고 해도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모두가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며 그 가운데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능력도 안되고 게다가 누군가를 만난들 소금과 빛으로의 삶은 뭐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아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내가 그토록 원치 않는 선데이 크리스천일 뿐인가? 예배드리러 가는 그 날만 회개하고 은혜받고 도로 삶의 자리에 돌아와서는 다시 그냥 나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일 뿐이란 말인가?
내가 하는 일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어려워도 할 수 있지만,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이며, 주님의 제자 된 삶이며, 이렇게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애 키우며 어느 세월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한단 말인가?
팀 켈러 목사님의 <일과 영성>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상당한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우리의 일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난 인간들이 그와 동시에 받게 된 형벌이 아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역사 안에 포함된 것이며 하나님도 일하셨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다. 또한 굳이 인간이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쉬 낟알과 과일을 주실 수 있지만 그러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p.86) 부모도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고 더 잘 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그 일을 성숙하게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돕는 쪽을 택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어 일을 맡기신 것도, 우리의 죄로 인해 그 벌로 일하게 된 것도 아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노동에 대해 그 중요성이나 신성함을 간과하는 것은 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일의 중요성, 일의 본질, 크리스천이 일에 관해 바르게 정립할 만한 설명들이 나오면서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p.83)
목회자이자 작가인 필립 젠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자 - 왕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정의롭고 고상한 정치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목수로 오셨다." (p.61)
이렇게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 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p.83)
다시 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고 깨달았으면서도 명확히 일이라는 것의 본질이나 범주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대목이 있었고 (일은 어떤 일도 하찮거나 특별하지 않다고 말로만 했을 뿐 내가 하는 일을 귀하다고도 여기지 못했고 그 일을 통해 또한 섬길 수 있는 일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일마다 나도 모르게 어떤 구별을 하고 있었던 듯) 따라서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은 일도 아닌 듯 여기며 죄책감만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팀 켈러 목사님은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고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으로 그 일을 탁월하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잘 해 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며 목회자나 성직자들의 일만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님에 대해 말해준다. 직장에서 일하며 또 따로 전도 활동을 하거나 따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그 일을 탁월하게 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는 삶이 귀하다고 말한다. 일에 대해 이원론을 갖는 것을 배격하며.
그러나 어렵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알고 그렇게 순종하여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해 내더라도 열매가 없고 일이 힘들고 그 가운데 어떤 경우엔 일 자체에 빠져 어떤 다른 우상숭배가 되는 때도 생기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의미없이 성공의 쳇바퀴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덧붙이고 있다.
<일과 영성>은 part 3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일이란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임을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두 번째 장에서는 그러나 그 일이 아무리 해도 열매가 없고 또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세 번째 장을 통해 일과 영성, 복음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여 이야기해 준다. 이건 세상일이고 저건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는 이야기를 통해 내가 오해했던 것들을 깨달았다. 결국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고 권고해 주는데 크리스천으로서 읽고 나면 뭔가 해결되고 살아가며 일하는 데에 있어 더 큰 기쁨과 하나님의 뜻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은혜가 된다.
하지만 늘 이런 깨달음과 은혜도 잊지 않고 내 삶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알긴 알았으되 늘 그렇게 열정을 품고 일하는 것이 수월하고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과 삶이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대한 소명임을 깨닫고 일하는 동안 어떻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 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