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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속함(速含)ㆍ함성(含城)ㆍ천령(天嶺)ㆍ허주(許州)ㆍ함양(含陽)
【성씨】 본군 여(呂)ㆍ오ㆍ박ㆍ서ㆍ조(曺), 이 속성(續姓)이다.마천(馬淺) 조(조(曺)).
【풍속】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灆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㵢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灆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 뇌계(㵢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 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성곽】 읍성 고을 관아가 옛날에는 군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홍무 경신년에 청사(廳舍)가 왜구에게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백 35척이고 나각(羅閣)이 2백 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 사근산성(沙斤山城) 군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 북쪽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7백 96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이 셋이다. 경신년에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성을 지키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 당한 뒤에 폐해 버리고, 수리하지 않았다가, 성종조에 다시 수축하였다.
【누정】 학사루(學士樓)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으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게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제운루(齊雲樓)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천순(天順) 신사년 4월에, 임금께서 신의 선대가 일찍이 관작을 추증 받았으나, 여러 해를 변방에 있었으므로, 아직 선영에 배례도 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휴가를 내리고, 호남 선영에 분황(焚黃)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에 도착하니, 함양 원으로 있는 종형 자교(子橋) 혜옹(惠翁)도 와서, 수일 동안 환담하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함양성에 문이 있고 문에는 누가 있는데, 무너진 지 여러 해여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 고을을 맡아서 한 해를 넘기고 나니 정사가 간단해서 여가가 많다. 고을에 대사(臺榭)와 누관이 없어 왕인(王人 사신 따위)을 위로하고 답답함을 풀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고, 이에 민중과 의논하여 문루(門樓)를 온통 새롭게 하였는데, 처마와 칸살을 넓직하게, 대마루와 서까래를 가지런하게, 단청을 빛나게 한 다음에 그만 두었다. 공사를 마치자, 상국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공(黃公 황수신)이 마침 와서 감사 성안(成安) 김공(金公)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이 두 분이 첫째로 시 두 편을 지었고, 여러 따르던 자들도 모두 화답하여 현판하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고을이 두류산 기슭에 있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과 천 리에 구름과 안개의 변화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누에 오르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올라서 그 시설한 것과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분의 작품을 보고 대강이나마 안 다음이라야 기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수일 후에 형님이 또 편지를 보내, 남원공 이하 여러분의 시 수십 편을 보게 하고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방금 여행하느라 피로했고, 또 더위에 병든 중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 여러분의 시를 한바탕 읽고 읊조리는 동안에, 오랜 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상쾌하여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감탄하기를, ‘형님과는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함께 글을 읽었고, 일찍이 그 옛 사람을 경모하는 진실함을 보았을 뿐,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고을 원이 되어, 정사하는 데에 어짊과 용서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너그러움과 위엄을 함께 이루게 하였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남들이 옛날 정사와 같음이 있다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진정과 순박한 것으로 된 것이다. 또 능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재간이 있는 자도 능히 하지 못한 것을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할 만하다. 누를 읊조린 시만으로도 남의 병을 천리 밖에서 능히 낫게 하였는데, 하물며 몸소 그 누에 올라서 관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만약 형님을 따라 한 번 누에 오르게 된다면, 마땅히 형님을 위해 극히 넓힐 것이요, 우선은 이것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빗발은 점점 걷히는 듯 하건만, 은은한 우레 소리는 아직도 누를 울린다. 구름이 골에 돌아드니 발이 어둡고, 바람이 못 위에 살랑거리니 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골개골, 황새 그림자 속에 벼가 윤기나네.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바라보니, 천길 봉우리는 용이 솟았는 듯하여라.” 하였다.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구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 망악루(望岳樓) 성 남쪽 문루이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 김종직의 시에, “작년에 내 발자취 저 멧부리를 더럽혀,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이 또 다시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하였다.
청향당(淸香堂)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학교】 향교 군 북쪽에 있으며 소소당(昭昭堂)이 있다.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瀶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 승(丞)이 1명이다.
○ 신우(辛禑) 6년에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3도를 침략하였다. 상주(尙州) 부고(府庫)를 불태우고,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쯤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가 죽고, 군사도 5백 명이나 죽어서 냇물이 다 붉었다. 그리하여 지금 혈계(血溪)라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의 군세는 더욱 성하여, 군 성을 무찌르고 남원을 향해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 이첨의 시에,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 하였다. ○ 역 남쪽에 제법 넓게 트인 정자가 있다. 이숙번(李淑蕃)의 시에, “객의 귀 밑에 눈서리 더하여도, 흐르는 세월은 조금도 멈추지 않네. 윤음(綸音)이 금궐(金闕)에서 내려오니, 옛 벗들 우정(郵亭)에서 전송한다. 시내와 산은 집을 둘러 훌륭하고, 소나무는 구름을 스칠 듯 푸르도다. 임금의 은혜를 갚기는 어려우니, 어찌 반드시 궁궐에 가야 하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가는 길 우리 고향과 가까워, 더욱 기쁘다. 말 머리가 내일에는 산음을 지나리. 사람들은 왕인(王人)이라 보지만, 재간 없는 취한 한림인 줄 어찌 알리오.”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丞)은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
광혜원(廣惠院) 성 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다락집이 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 이항무(李恒茂)의 시에, “총총히 겨를 없어 누에 못 오르다가, 이날에야 올라보니 눈이 잠깐 트인다.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구름이 아득하고, 남으로 지리산 쳐다 보니 눈만 높이 쌓였네. 2년 동안 녹 먹으며 무슨 일 했나. 천리 밖 고을을 맡았으나 재주 없는 것 부끄러워라. 어찌하면 호탕하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송백(松栢)이나 잘 가꾸워 볼까.”하였다. 사근원(沙斤院) 사근역 동쪽에 있다. 도현원(桃峴院) 도현(桃峴) 밑에 있다. 덕신원(德信院)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사근교(沙斤橋) 사근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군 남쪽 엄천리에 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성모는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한다.” 하였다. 성왕사 군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冢)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인물】 고려 박충좌(朴忠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본조 박자안(朴子安)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여칭(呂稱) 벼슬이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자안의 아들이다. 태조조에 자안이 경상ㆍ전라도 도안무사가 되어서 항복한 왜인을 응접하다가, 군사 기밀을 잘못 누설하여 죄가 참형에 해당하였다. 조정에서 베어 죽이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저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비밀에 붙이고 선포하지 않았다. 박실이 듣고 곧 태종의 사저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아비 목숨을 살려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께서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서, 곧 자안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계청하였다. 태조께서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얼마 뒤에 중추원 녹사 심귀수(沈龜壽)에게 힘껏 빨리 달려가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귀수가 반 넘어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명령서를 대신 보냈다. 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감형관은 이미 자안의 낯을 칠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도 갖추고 있었다. 역리는 멀리 들판에서 갓을 휘둘렀다. 감형관이 바라보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자안은 죽지 않게 되었다. 박실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비 구한 것을 어질게 여겨서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다. 직위가 총제에 이르렀다. 오응(吳凝)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증』 여자신(呂自新) 무과에 올랐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소탈하며 곧았다. 여운철(呂允哲) 자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청렴 결백한 것이 그 아비와 같았다.
【우거】 본조 유호인 과거에 올랐고 시를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효자】 본조 박안행(朴安行) 효행이 있어서 정려되었다. 박유효(朴由孝) 아버지의 무덤에 시묘하는 때를 당하여, 어미 병이 위독하였다. 변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에 합장하고 6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열녀】 고려 송씨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에게 잡혔다. 왜적이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본조 김씨 이양(李陽)의 아내이다. 양이 자식도 없이 죽으니, 사직 여자근(呂自勤)이 장가들고자 하였다. 김씨는 지아비의 무덤에 달려가서 사흘 밤을 풀 속에서 잤다. 그 뒤에 박용덕(朴龍德)이란 자가 또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씨는 응하지 아니하고 목매어 죽었다. 성종 3년에 고을 원을 시켜 그 무덤에 제사하고 정문하였다.
【제영】 함양소현난산심(咸陽小縣亂山深) 이색(李穡)의 시에, “함양 작은 현은 많은 산이 깊고,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네.” 하였다. 함양구물단청산(咸陽舊物但靑山)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함양 옛 물건은 청산뿐이니, 몇 차례 흥망 겪으며 한 고을에 딸렸던가.” 하였다. 천극두류기반공(天極頭流倚半空)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하늘 끝 두류산은 반공에 기댔고, 호남을 한 번 채운(彩雲) 속에 바라보네. 시험삼아 누 위에서 난간에 기대보니, 천고에 푸른 얼굴 두루두루 같아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안의(安義)에 예속시켰다가 이어 나누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정조 12년에 군으로 강등시켰다.
【정지】 읍성 영조 5년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5척이며 동ㆍ서ㆍ남 3문이 있다. 천왕봉고성(天王峯古城)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하며, 의탄(義呑)의 소재지에서 5ㆍ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고, 안에는 창고 터가 있다. 안치고성(鞍峙古城) 석축의 터가 있다.
【교량】 사근교(沙斤橋) 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남쪽으로 5리이다.
【창고】 읍창ㆍ북창(北倉) 북쪽으로 30리이다. 사창(仕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역창(驛倉) 사근에 있다.
【사원】 남계서원(濫溪書院) 명종 임자년에 세우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문묘 편에 보라. 정온(鄭薀) 광주(廣州) 편에 보라. 강익(姜翼) 자는 중보(仲甫), 호는 개암(介庵),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 당주서원(溏洲書院) 선조 신사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노진(盧禛)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이며, 풍천(豐川)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방면】 읍내 끝이 5리이며, 일명 원수면(元水面)이라고도 한다. 관변(官邊)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지내(池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근(沙斤)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열음계(列音界)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휴지(休知)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엄천(嚴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천(馬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백 리이다. 죽곡(竹谷)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광복(廣福)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전(柏田)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병곡(甁谷)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유등포(柳等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도북(道北)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북천(北川)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덕곡(上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하덕곡(下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백토(柏吐)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모수(毛首)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현내(縣內)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상동(西上洞) 처음이 5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서하동(西下洞)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 공안(功安) 부곡은 동남쪽으로 15리, 마천소(馬川所)는 지금 면이 되었으며, 의탄소(義呑所)는 남쪽으로 30리이다.
[주-D001] 분황(焚黃) :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그 관직이 상당히 높아지면, 그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의 3대에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추증할 때에 관직을 기재한 사령장은 누런 종이에 쓴다. 그 종이를 분묘 앞에서 불사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분황(焚黃)이라 한다.[주-D002] 인천(人天) : 사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치와 천리(天理)에 관한 것을 합하여서 인천(人天)이라 한 것이다.[주-D003] 아간(牙簡)과 경고(瓊膏) : 아간(牙簡)은 관청 문서라는 말이요, 경고(瓊膏)는 고량진미(膏梁珍味)라는 말이다.[주-D004] 한습(寒拾) : 당(唐) 나라 중엽 시대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ㆍ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이다. 그들은 기행(奇行)으로 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주-D005] 금당(金堂)과 옥실(玉室) : 여기에 금당 옥실이라 함은 부처 있는 곳을 미화시켜서 한 말이다.[주-D006] 난파(鑾坡) : 난파는 한림학사가 공무 보는 곳을 말함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있는 곳을 난파라고 하였다.[주-D007] 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가 각각 나서 가지만이 서로 얽힌 것을 연리지라 한다. 옛날 전국 시대 송 나라 강왕(康王)이 한빙(韓凭)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도 자살하였으므로 어느 산기슭에 묻었더니, 두 무덤에서 각기 나무 하나씩이 나서 가지가 서로 얽히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사목(相思木)이라 하여 이들의 사랑을 가련하게 여겼다.[주-D008] 화산기(華山畿)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에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상여가, 그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때에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관을 열어 주오.” 하였더니, 관이 열리므로 그 여자가 그 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가 놀래어 아무리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였다. 그것을 노래한 곡조가 화산기(華山畿)이다.
咸陽郡
東至安陰縣界三十七里,南至山陰縣界二十六里,西至全羅道雲峯縣界二十七里,北至安陰縣界三十七里。距京都六百五十九里。
建置沿革
本新羅速含郡。一云含城。景德王改天嶺郡。高麗成宗陞爲許州都團練使。顯宗降爲含陽郡,屬陜州,後含改爲咸。明宗降爲縣,置監務。本朝太祖四年陞爲郡。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速含,含城,天嶺,許州,含陽。
姓氏
本郡 呂,吳,朴,徐,曺。李。續。
馬淺 曺。
風俗
俗尙謹愿。觀風案。
形勝
奇峯絶壑。申叔舟《齊雲樓記》。
山川
白巖山。在郡北五里。鎭山。
文筆峯。在郡北一里。
智異山。在郡南四十里。山之北面,郡專據焉,天王峯與晉州分界。山中有古城,一稱楸城,一稱朴回城,去義呑所五六里,牛馬所不能到,倉庫遺基宛然猶在。世傳新羅防百濟之地。
天王岾。在郡北二十里。安陰縣界。
白雲山。在郡西四十里。安陰縣界。
花長山。在郡南十五里。山中多蘭
蕙。
鷲巖山。在郡北二十里。
霜山。在郡西二十里。群巖競秀,狀若劍鋩。山下有一洞府,洪武庚申征倭時藏兵之所。
桃峴。在郡東三十里。
八良峴。在郡西三十里。全羅道雲峯縣界,要害處也。峴上有新羅時古壘。
愁智峯。在郡東十里。
鞍岾山。在郡北三十里。山上有古石城。
蛇巖山。在郡東二十里。
悟道峯。在郡南二十里。
大孤臺。在灆溪中。
小孤臺。在㵢溪中。
大館林。在㵢溪東岸。
蘫溪。在郡東十五里。安陰縣東川之下流。至山陰縣界,與瀶川合流。
㵢溪。在郡西一里。源出白雲山,東流至沙斤驛邊,入灆溪。
瀶川。在馬淺所。智異山北面澗谷之水合爲瀶川。
龍游潭。在郡南四十里。瀶川之下流。潭之兩傍有巖石,平鋪累積,皆若磨礱然。橫張側展,或類大
甕,其深無底,或類霔樽,千奇萬怪有似神變。其水中有魚,背有紋若袈裟,故名袈裟魚。土人云:“智異山西北有達空寺,其傍有猪淵。魚産于此,每秋順流下遊至龍游潭,每春還達空池,故自嚴川以下無之。捕者伺其時,設網巖瀑間,魚騰躍而上,輒落網中。” 達空乃雲峯縣地也。
嚴川。在郡南二十五里。卽龍游潭下流。
西谿。在郡西八里。其源出八良峴,至蹄閑驛下五里許,兩峽間亘石爲底,滑如磨礱,飛流濺沫,奔瀉彎碕,鏘然若佩環聲。
土産
竹,蜂蜜,石蕈,柹,銀口魚,石榴,海松子。〔新增〕 五味子。
城郭
邑城。古邑在郡東二里。洪武庚申,廨舍爲倭寇所焚,遂移治于文筆峯下。築土爲城。周七
百三十五尺,羅閣二百四十三間。門有三:東曰齊雲,南曰望嶽,西曰淸商。
沙斤山城。在郡東十七里沙斤驛北。石築。周二千七百九十六尺,高九尺。內有三池。庚申歲,監務張羣哲失其城守,爲倭賊所屠,廢而不修。成宗朝修築。
樓亭
學士樓。在客館西偏。崔致遠爲太守時所登賞,故名。後爲倭兵所焚,移邑治時,樓亦移構而仍名焉。
齊雲樓。申叔舟記:“天順辛巳孟夏,上以臣叔舟先代曾受封贈,而連年在塞下,尙不得拜先塋,特賜暇焚黃于湖南。至南原,則從兄咸陽守子橋惠翁亦來。與懽數日,謂叔舟曰:‘咸陽城有門,門有樓,頹圮有年,人不敢登,而莫爲之修。予受任踰年,政簡多暇,念邑無臺觀,無以慰悅王人,導滯宣鬱。乃與衆謀之,擧而新之,簷楹豁然,甍桷整然,丹雘奐然,如是而止。功訖,相國南原府院君
黃公適至,與監司成安金公設宴以落之。首題詩兩篇,群從皆和之,懸之于板,亦一奇也。邑在頭流山之麓,奇峯絶壑磅礴千里,蒸雲起霧變態不常,晨夕異觀。登是樓,則一擧目而盡,爾爲我記之。’ 叔舟曰:‘旣不能一往登臨以觀其施設、景致,則當觀諸公之作以得梗槪,然後記可得也。’ 還京數日,兄又馳書,示南原公以下詩數十篇求記。叔舟方困於行路,又病於暑,得書一讀諸公詩,風詠之間,不覺沈痾去體,令人爽然而起。嘆曰;‘與兄結髮讀書,嘗見其景慕古人之眞淳,不以作爲幹局介意。今爲郡,能政先仁恕,修整紀綱,宽猛相濟,吏畏民懷,人稱有古遺政,是固眞淳之所爲也。而又能不煩民,爲此幹局者之所不能爲,亦可怪也已!樓之詩足以已人之病於千里之外,況身登騁眺焉?叔舟雖老,儻得從兄一登,當爲兄極其鋪張。姑書是爲記。’” 〔新增〕 金宗直詩:“雨脚看看取次收,輕雷猶自殷高樓。雲歸洞穴簾旌暮,風颭池塘枕簟秋。
菡萏香中蛙閣閣,鷺鷥影裏稻油油。憑欄更向頭流望,千仞峯巒聳玉虯。”
白沙亭。在郡西一里。○趙承肅詩:“尋春載酒過孤村,布穀聲中晝掩門。雨後殘花浮水出,人間無處不桃源。”
〔新增〕 望嶽樓。城南門樓。望見智異山,故名。○金宗直詩:“去年塵迹汚巖巒,望嶽樓中更靦顔。却恐英靈恥重滓,洞門牢與白雲關。”
淸香堂。在客館西。下有蓮塘。郡守曺偉構。
學校
鄕校。在郡北。有昭昭堂。
驛院
蹄閑驛。在郡西十五里。○李詹詩:“雲峯坂道竝溪傍,穩跨征驢一嘯長。無賴西山高萬丈,客來投館未斜陽。”
沙斤驛。在郡東十六里。丞。本道屬驛十四:有麟,安澗,臨水,蹄閑,正谷,新安,新興,正守,橫浦,馬田,栗元,碧溪,小南,平沙。○丞一人。○辛禑六年,倭船五百艘泊鎭浦,寇三道,燒
尙州府庫,經京山,駐沙斤驛。三道元帥裵克廉等九將與戰于驛東三里許,敗績,朴修敬、裵彦二元帥死之,士卒死者五百餘人,川水皆赤,至今號血溪。由是賊勢益熾,遂屠郡城,向南原,駐引月驛,爲我太祖所殲。○李詹詩:“雲峯山下秋風早,日淡天寒木葉槁。是時島夷敗我軍,血濺咸陽原上草。兩府元帥陣前亡,士卒微軀難自保。悲笳數聲丈夫淚,誓雪國恥及未老。征南諸將誰無軍?旌旗緩緩回征道。” ○驛之南,有亭頗閑敞。李淑蕃詩:“客鬢添霜雪,流年不小停。綸音降金闕,故友餞郵亭。繞屋溪山勝,拂雲松柏靑。君恩難可報,何必到天庭?” ○鄭以吾詩:“路近吾鄕喜更深,馬頭明日過山陰。路人都作王人看,豈識非才醉翰林?” 〔新增〕 今上五年,革丞置察訪。
廣惠院。在城南二里。有樓,迎候使臣之地。○李恒茂詩:“悤悤未暇上樓臺,此日登臨眼暫開。北望漢城雲縹緲,南瞻智異雪崔嵬。二年食粟成何事?千里分符愧
不才。安得浩然投紱去,故園松柏好栽培?”
沙斤院。在沙斤驛東。
桃峴院。在桃峴下。
德信院。在郡西二十里。
〔新增〕 橋梁
沙斤橋。在沙斤驛南。
大橋。在郡南五里。
佛宇
見佛寺。在智異山。○趙承肅詩:“寺在名山裏,開從大古前。禪床閑日月,講席列人天。聽爾無生理,嗟予不學仙!談餘還有味,滿目好風煙。”
君子寺。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新增〕 兪好仁詩:“十年萍梗我何堪?收迹雲山一夢酣。落日閃霞橫鷲岾,長風驅雨過龍潭。白雲、靑鶴空迷遠,牙簡、瓊膏奈飽參?今夜拂窓松桂冷,臥看明月印輕嵐。”
昇安寺。在蛇巖山。
先涅菴,古涅菴,新涅菴。俱在
智異山。
花長寺。在花長山。
嚴川寺。在嚴川北岸。
馬迹寺。在智異山。以高僧馬迹所居爲名。前有瑜珈臺,下有水潛灘,灘上卽龍遊潭。
金臺菴,寶月菴,安國寺。俱在智異山。本朝僧行乎所建。
無住菴。在智異山。○《補閑集》云:“僧無己自號大昏子。隱於此山,一衲三十年。每冬夏不出,卷肚皮束于帶索。春秋鼓肚遊山,日食三四斗。一坐必浹旬,起行則朗吟作偈。山中七十餘菴,每食一菴,輒留一偈。無住菴偈云:‘此境本無住,何人起此堂?唯餘無己者,去住本無妨。’ 語若疎易,而寄意高深,殆寒、拾之流歟?”
德峯寺。在天王岾下。
登龜寺。在悟道峯。〔新增〕 兪好仁詩:“好在頭流萬疊山,暫偸休暇此登攀。金堂、玉室尋前約,碧嶺、丹崖摠舊顔。歲律蒼茫鴻北去,黃花搖落客南還。鑾坡遠與雲林隔,兩
地歸來鬢已斑。”
彌陀寺。在沙斤城山。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聖母祠。祠宇二:一在智異山天王峯上,一在郡南嚴川里。高麗李承休《帝王韻記》云:“太祖之母威肅王后。”
城隍祠。在郡東三里。
厲壇。在郡北。
古跡
古邑城。在官邊里。距今治四里。
功安部曲。在郡東南十五里。
馬川所。川,古作“淺”。在郡南三十里。〔新增〕 金宗直詩:“鳴騶入馬川,賓從亦翛然。陰壑凍將合,陽崖楓尙鮮。雪藏神母廟,雷吼蟄龍淵。曲岸遺柴槮,叢祠罥紙錢。斲材溪有柹,燒炭谷生煙。傖父刈蕎麥,小姑收木綿。荏苒瓜期近,玆遊應眷憐!”
義呑所。在郡南三十里。所之吏,今移居郡西熊谷里。
月明塚。在愁智峯上。諺傳昔有東京商人悅沙斤驛女月明,留數日而去。月明思念不置,得疾死瘞于此。後商人來,哭其墓亦死。遂同穴焉。〔新增〕 金宗直詩:“塚上靑靑連理枝,行人爲唱華山畿。如今月黑狐貍嘯,應是春魂化蝶飛。”
名宦
新羅 令忠。憲德王十四年,熊川都督憲昌反脅武珍、完山等州爲己屬。完山長史崔雄與令忠遁走,至京告之。王卽拜令忠速含郡太守,位級飡。
崔致遠。致遠寄海印僧希朗詩下,題防虜太監、天嶺郡太守、遏粲崔致遠。
本朝 宋希璟。
李次若。崇仁之子。
蔡倫,崔德之,曺尙治,鄭從韶。俱知郡。
〔新增〕 金宗直。邑人追慕,爲立生祠。
曺偉。
人物
高麗 朴忠佐。登第,官至判三司事,封咸陽府院君。性溫厚儉約,雖爲卿相,居室、衣服,如布衣時。好讀《易》,老不輟。
本朝 朴子安。官至都摠制。有將才。
呂稱。官至知議政府事。
朴實。子安之子。太祖朝,子安爲慶尙、全羅道都安撫使,應接降倭,失誤軍機,罪當斬。已移書誅之,以事干彼人,秘而不宣。實聞之,卽詣太宗邸,投地痛哭,請活父命。太宗心傷之,卽啓請減子安死。太祖初怒之,俄命中樞院錄事沈龜壽盡力疾馳,及救子安之死。龜壽行已過半而墜馬,令驛吏代送其書。書未到,官已漆子安面,褫其衣,刀刃已具。吏於曠野揮之以笠,官望見,停刑以待,子安得不死。實本無學術、武藝,而太宗賢其救父,使掌禁旅。位至摠制。
吳凝。丁丑科狀元。官至全羅道觀察使。
〔新增〕 呂自新。登武科,官至判書。諡貞莊。性淸白簡
直。
呂允哲。自新之子。登武科,官至節度使。淸白如其父。
寓居
本朝 兪好仁。登第。有詩名,成宗常令繕寫所著以進。
孝子
本朝 朴安行。有孝行,旌閭。
朴由孝。方廬父墳,而母疾篤,嘗其糞味甘,憂懼。及歿合窆,居廬凡六年。
烈女
高麗 宋氏。驛丞鄭寅妻也。洪武中,有倭寇,宋被掠。賊欲汚之,誓死不從,遂見害。事聞旌閭。
本朝 金氏。李陽妻也。陽無子早死,司直呂自勤欲娶之,金走至夫墳,披草宿三夜。後有朴德龍者亦求爲妻,金不應,自經而死。成宗三年,令守令祭其墓,旌其門。
題詠
咸陽小縣亂山深。李穡詩:“云云,海遠懸崖更萬尋。”
咸陽舊物但靑山。趙承肅詩:“云云,幾閱興亡屬一官?”
天極頭流
倚半空。申叔舟詩:“云云,湖南一望彩雲中。試登樓上憑軒看,千古蒼顔面面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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