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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학당.자미강의.20210715
67. 松都三絶 黃眞伊
柳夢寅(1559~1623)
嘉靖初에 松京에 有名唱眞伊者한대 女中之倜儻任俠人이라 聞花潭徐敬德이 高蹈不仕하고 學問精粹하고 欲試之하여 束縚(絛)帶挾大學하고 往拜曰
가정 초에 개성에 명창 眞伊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자 중의 뛰어나고 호협한 사람이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고상한 행실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정수를 이루었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하고자 하여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을 옆에 끼고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 가정(嘉靖): 明나라 世宗의 年號. 1522~1566년.
妾聞禮記에 男盤革女盤絲라 妾亦志學하여 帶絲而來라하니 先生ㅣ 笑而誨之라 眞伊ㅣ 秉夜相眤하여 如魔登之祔摩阿難者累하되 而花潭은 終不少撓라
“첩이 듣기로는 예기에 ‘남자는 가죽띠를 띠고 여자는 실띠를 띤다.’고 했습니다. 첩 또한 학문에 뜻을 두고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라 하니 선생이 웃으며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틈타 친근하게 굴며 마등이 아난을 어루만진 것처럼 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되, 화담은 끝까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魔登: 摩登伽女로 佛이 存世時에 그 딸 鉢吉帝를 위하여 幻術로써 阿難을 미혹하게 하여 淫樂케 하려 하였음.
* 阿難: 싼스끄리뜨 아난다(Ānanda)의 음역으로 부처님의 십대제자인 ‘아난다’를 이르는 말. 아난타(阿難陀)ㆍ아란존자라고도 함. 석가모니불의 사촌 동생이며, 십대제자 중 다문(多聞) 제일이다. 8세에 출가하여 수행하는 데 미남인 탓으로 여자들의 유혹이 많았으나 지조가 견고하여 끝까지 수행을 완수했다.
眞伊는 聞金剛爲天下名山하고 欲一辦淸遊나 無可與偕라 時有李生員者한대 宰相子也라 爲人跌宕淸疎하여 可共方外之遊라
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맑은 흥취의 놀이를 하고자 하였는데,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李生員이 있었는데, 재상의 아들이었다. 사람됨이 호탕하고 소탈해서 명승지 유람을 함께 할 만하였다.
從容謂李生曰 吾聞컨대 中國人도 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한대 况我國人은 生長本國하여 去仙山咫尺한대 而不見眞面目이 可乎아 今吾偶奉仙郞하니 正好共做仙遊라 山衣野服으로 恣討勝賞而還不亦樂乎아
진이가 조용히 이생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중국인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은 본국에서 생장하여 仙山의 거리가 가까운데, 그 眞面目을 보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제가 선랑을 받들게 되었으니, 바로 仙遊를 함께 하기에 좋습니다. 山衣 野服으로 빼어난 경치를 마음대로 찾아보고 돌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於是에 使李生으로 止僮僕勿隨하고 布衣草笠으로 親荷糧이라 眞伊는 自戴松蘿圓頂하고 穿葛衫 帶布裙 曳芒鞋 杖竹枝而隨라
이에 이생으로하여금 하인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베옷에 삿갓을 쓰고 친히 양식을 짊어지게 하였다. 진이는 스스로 송라원정을 머리에 쓰고 갈포 저고리와 베 치마을 입고, 짚신을 끌고 대나무 가지를 짚고 따랐다.
* 松蘿圓頂: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여승이 쓰는 모자. 松蘿笠.
入金剛하여 無深不到라 乞食諸刹하고 或自賣其身하여 取粮於僧이나 而李生은 不之尤라 兩人遠涉山林하여 飢渴困悴하여 非復舊時容顔이라
금강산에 들어가서 깊숙한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러 절에서 걸식하며 혹 스스로 자신의 몸을 팔아 승려에게 양식을 얻기도 하였으나 이생은 탓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멀리 산림을 지나쳐서 기갈이 들고 곤핍하고 초췌해져서 다시는 지난날의 모습과 얼굴이 아니었다.
行到一處한대 有村儒十餘人이 會宴于溪上松林이라 眞伊過拜焉하니 儒曰 汝舍長도 亦解飮乎아 勸之酒不辭하고 遂執酌而歌에 歌聲淸越하여 響震林壑하니 諸儒深異之하여 餉以酒肴라
가다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시골 유생 10여 인이 시냇가 소나무 숲에 모여 잔치를 하고 있었다. 진이가 들러서 절을 하니 유생이 말하기를 “너의 사장도 술 마시는 것을 이해하느냐?”라고 하며 술을 권하니, 진이는 사양하지 않았고, 드디어 술잔을 잡고 노래를 함에 그 노랫소리가 맑아서 음향이 수풀과 골짜기를 울려 퍼지니, 여러 유생들이 심히 기이하게 여겨서 술과 안주를 먹였다.
* 舍長: 50호를 단위로 한 민가조직의 우두머리.
* 淸越: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음.
眞伊曰 妾有一僕ㅣ 飢甚한데 請饋餘瀝乎아하고 與之李生以酒肴라 時兩家各失所往하여 不知影響者가 殆半歲餘한대 一夕에 鶉衣黎面而返하니 隣里見之大驚이라
진이가 말하기를 “저에게 한 명의 종이 매우 굶주렸는데, 청컨대 남은 술을 먹여도 되겠습니까?”하고 이생에게 술과 안주를 주었다. 당시에 양쪽 집에서는 각각 두 사람이 간 곳을 몰라서 소식을 알지 못한지가 거의 반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해진 옷을 입고 시커먼 얼굴로 돌아오니, 이웃에서 보고 크게 놀랐다.
* 순의(鶉衣): ①메추라기의 모양(模樣) 같은 남루(襤褸)한 옷 ②군데군데 기운(氣運) 해진 옷. 해어진 옷. 낡은 옷.
宣傳官李士宗은 善歌라 嘗出使松都한데 卸鞍天壽院川邊하고 脫冠加腹而臥로 高唱數三曲이라
선전관 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송도에 갔는데, 천수원 시냇가에서 안장을 풀고 관을 벗어 배 위에 얹고, 드러누워서 노래 두세 곡을 높이 불렀다.
* 天壽院: 院은 역과 역 사이에 있는 휴게소이다.
眞伊有所如에 亦歇馬于院側이라가 耳聞之曰 此歌曲甚異하니 必非村家俚曲이라 吾聞컨대 京都有風流李士宗이 當代絶唱이라하니 必此人也라하고 使人往探之하니 果士宗也라
진이도 갈 곳이 있음에, 또한 원 근처에서 말을 쉬다가 귀 기울여 듣고 말하기를 “이 노래의 곡조는 심히 특이하니 반드시 촌가의 속된 곡조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경도의 풍류 이사종이 당대의 절창이라고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하고 사람을 시켜 가서 찾게 했더니, 과연 이사종이었다.
於是에 移席相近致其款하여 引至其家留數日하고 曰 當與子로 六年同住라하고 翌日에 盡移家産三年之資于士宗家라 其父母妻子를 仰事俯育之費를 皆辦自自家하고 親着臂鞲하며 盡妾婦禮하여 使士宗家不助錙銖라
이에 자리를 옮겨 서로 가까이하여 그 다정함을 극치로 하여 이사종을 이끌고 집으로 가서 며칠을 머물고 말하기를 “마땅히 그대로 더불어 6년을 함께 살아야 하겠습니다.”하고 다음 날 가산과 3년의 비용을 이사종의 집으로 모두 옮겼다. 그 부모 처자를 우러러 섬기고 부육하는 비용을 다 자기의 집으로부터 마련하고, 직접 비구를 착용하며, 첩의 예를 다하면서 이사종의 집으로 하여금 조금도 돕지 못하게 했다.
* 비구(臂鞲): 소매를 걷어매는 가죽으로 만든 띠.
旣三年에 士宗이 餉眞伊一家를 一如眞伊餉士宗하여 以報之者適三年이라 眞伊曰 業已遂하고 約期滿矣라하고 辭而去라
삼년을 마침에 이사종이 진이의 온 집안을 먹여 살리기를 한결같이 진이가 이사종의 집을 먹여 살린 것같이 하여, 보답하기를 3년 동안 했다. 진이가 말하기를 “업이 이미 이루어졌고, 약속한 기일이 다 되었습니다.”하고 하직하고 돌아갔다.
後眞伊病且死에 謂家人曰 吾生時에 性好紛華하니 死後에 勿葬我山谷하고 宜葬之大逵邊이라하다 今松都大路邊에 有松都名娼眞伊墓라 林悌ㅣ 爲平安都事하여 過松都라가 爲文祭于其墓하고 卒被朝評이라
후에 진이가 병들어 죽게 되자 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 성품이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은 후에도 나를 산골짜기에 장사지내지 말고 마땅히 큰길 가에 장사지내주오.”하였다. 지금 송도의 큰 길가에 송도 명창 진이의 묘가 있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나면서 그 묘에 축문을 지어 제사 지냈다가 끝내 조정의 비평을 당했다.
柳夢寅(1559~1623) 於于野談 65
68. 曝曬別監蔡世英之汪涕
柳夢寅(1559~1623)
蔡壽가 以內翰으로 爲曝曬別監하여 曝史冊于全州한데 宣言하되 士大夫ㅣ 奉使州府에 使妓女로 侍寢于客舍한데 頗淫褻이라하고 先移文列邑하여 勿令妓女로 服事賓館이라
채수가 내한으로써 포쇄별감이 되어 전주에서 사책을 햇볕에 쬐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선언하기를 “사대부들이 주나 부에 사명을 받들고 갈 때에 기생을 시켜 객사의 침소에서 시중들게 하는데, 이는 아주 음란하고 더러운 일이다.”하고 먼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기녀들을 시켜서 빈객의 숙소에서 섬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 內翰: 翰林의 다른 이름.
* 포쇄별감(曝曬別監): 조선시대에 사고의 서적을 점검하고 햇볕을 쬐어 말리던 관원. 예문관의 검열이 이 직책을 맡았다.
沿路虔慴하여 所至州府에 女色莫敢近이라 至全州하니 連月霪雨하여 不得開史庫라 因留連不勝無悰이라
가는 길마다 놀라고 두려워해서 도착하는 주와 부의 여색들이 감히 가까이하는 자가 없었다. 전주에 이르르니 여러 달 동안 장마가 들어서 사고를 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계속 머물러 있게 되니, 즐거움이 없어 견딜 수 없었다.
府尹謂判官曰 年少史官이 久滯賓館이나 令嚴不敢衒女色이라 主人待貴客에 豈宜如是索然이리오 幸判官好爲之라하니
부윤이 판관에게 말하기를 “나이 젊은 사관이 오래도록 빈객 관사에 머무는데, 명령이 엄해서 감히 여색을 들일 수 없소. 주인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데 어찌 어처럼 삭막하게 할 수 있겠소? 판관이 잘 처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 하니,
判官이 唯而退하여 與首娼謀하여 選府妓年少美色者하여 使之淡粧白衣裳하니 容色一倍러라 擧杵敲臼于客舍密邇處하고 又與陪童約하되
판관이 예! 하고 물러가서 기생 중 우두머리와 의논하여 부의 기생 중에 어리고 예쁜 자를 골라 화장을 옅게 하고 흰옷을 입게 하니, 容色이 배나 더 좋아졌다. 그녀로 하여금 절구공이를 들고 객사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방아를 찧게 하고 시중드는 아이와 약속하기를
翰林如問爾어든 爾必對曰 非官妓라 京中宰相家婢한대 休沐于親家라가 遭喪하여 留三月하니 將近百日之期라 爲此淹留라하라
“한림이 만약 너에게 묻거든 너는 반드시 ‘관기가 아닙니다. 서울의 재상 집 시녀인데 친가에 휴가를 왔다가 상을 당하여 석 달을 머물다 보니, 곧 백일 기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이리하여 오래 체류하게 된 것입니다.’하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於是에 蔡ㅣ 見素服之姝敲臼于廊側하니 容態絶殊라 心惘惘失措하여 密問陪童曰 彼敲臼之女는 州妓耶아 對曰 否라 京城金判書家婢로 因親喪留連邑中이니다
이에 채수가 행랑 곁에서 절구질하는 소복한 여인을 보게 되니, 용태가 매우 빼어났다. 마음이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배동에게 묻기를 “저기 절구질하는 여인은 주의 기생이냐?” 배동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서울 김판서 댁의 시녀인데 친상을 당해서 고을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曰 何時遭喪고 曰 已近百日하니 免喪將以比日歸니이다 蔡於其夜에 達曙不寐라 翌日에 又問陪童曰 若非官妓면 爾可不告府官하고 密誘而致之乎아 曰 方有主者라 恐難用力니이다 曰 然試言之하고 勿洩外人하라
묻기를 “언제 상을 당했느냐?” 대답하기를 “이미 백일이 가까워졌으니, 脫喪을 하면 며칠 안에 돌아갈 것입니다.” 채수는 그날 밤에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또 배동에게 묻기를 “만약 관기가 아니면 네가 부의 관원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데려올 수 있겠느냐?” 대답하기를 “주인이 있는 사람이라 힘을 쓰기가 두렵고 어렵습니다.” 말하기를 “그래도 시험삼아 말해보고 외인에게 누설하지 말아라.”하다.
陪童奔告府官하고 誘而致之客舍라 自此로 夜來朝往하니 自以邑人莫知라 一日은 府官이 爲內翰張高宴이라 紅粧이 成行羅綺하니 眩目이라 昔日白衣之妓가 金裝雲䯻하고 亦間琴歌之列이라 蔡ㅣ 見之大駭하고 乃知見賣라
배동이 부의 관원에게 달려가 고하고, 그녀를 이끌어 객사로 데리고 갔다. 이로부터 밤에 왔다가 아침에 가니, 자연히 고을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부의 관원이 채수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붉게 화장한 여인들이 열을 지어 비단옷을 입고 있으니, 눈앞이 아찔했다. 예전에 흰옷을 입었던 기생이 황금색 머리 장식을 하고 구름 같은 쪽을 찌고서 역시 가야금을 연주하는 대열에 끼어있었다. 채수는 그를 보고 크게 놀랐고, 속임 당한 것을 알았다.
自此로 略不顧忌하고 任其日夜共床하여 情愛交融하여 雖交頸比翼不能踰也라 及其已事而還하여 與之相別于郵亭에 欲制其淚而自进於雙眥하여 雖避人而抆之나 亦莫能禁也라
이로부터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밤낮으로 침상을 함께하여 애정이 서로 무르익어서 비록 서로 목을 비벼대는 비익조라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어 그녀와 역사에서 이별하게 됨에 그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양 눈초리에서 저절로 눈물이 솟아 나와서 비록 사람을 피하여 눈물을 닦으려 했으나, 또한 금할 수 없었다.
遂仰屋忍涕하고 問陪童曰 此屋何年所營가 曰 某年營之니이다 曰 其時府判爲誰아 曰 某也니이다 蔡ㅣ 於是乎에 始低首而歎曰 吁라 人生可憐이라 今也에 已成鬼錄이라하며 汪然涕瀉衫袖盡濕이라
마침내 역사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참고 배동에게 묻기를 “이 집은 어느 해에 지은 것이냐?” 배동이 말하기를 “어느 해에 지었습니다.” 묻기를 “당시의 부사와 판관은 누구였느냐?” “아무개였습니다.” 채수는 이에 비로소 머리를 숙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인생이 가련하구나! 그들은 지금 이미 저승에 갔겠구나!” 하며 눈물이 줄줄 흘러 적삼 소매를 모두 적셨다.
邑人이 傳笑之曰 蔡曝曬之淚는 淚脚도 甚鉅라하다 余ㅣ 嘗聞老妓露凝香之言한대 曰 客舍行官에 見妓嬉笑者는 難犯이요 見妓正色者는 易制라하다
고을 사람들이 전해가며 웃으며 말하기를 “채포쇄의 눈물은 눈물 발도 아주 굵구나!”라 하였다. 내가 예전에 늙은 기생 露凝香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객사에 온 관원 중에 기생을 보고 기쁘게 웃는 분은 범하기가 어렵고, 기생을 보고 정색을 하는 분은 오히려 다루기 쉽다.”고 하였다.
柳夢寅(1559~1623) 於于野談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