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두 비문
영웅 트럭에 탄 두 사람은 운전과 잠을 교대로 했다. 벤은 우크라이나를 지나 폴란드에 도착하자 목이
불편해서 헛기침을 했다. 헤이든이 걱정스러워 물었다.
“목이 많이 불편하나?”
“코가 막히고 목이 조금 불편해서 기침을 한 정도니 괜찮습니다.”
“아니야, 날씨는 덥고 부서진 건물 복구공사를 한다고 먼지로 가득해서 호흡기 질환자들도 많을 거야.
공기 좋은데서 살다가 여길 오니 그럴 수도 있겠어. 오늘은 친구병원에서 하룻밤 넉넉히 쉬어 가자고.”
“곧 적응 하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벤은 헤이든의 아내가 근무할 폴란드병원에 들러 친찰을 받고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아침. 헤이든의 친구가 초대한 식사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는 벤의 피로는 나아졌다. 폐허의 폴란드 땅의
흙먼지와 부서진 건물, 동물의 사체와 미처 치우지 못한 사체의 잔해도 보였다.
벤은 호흡기 때문에 말을 줄이고 입을 닫았다.
영웅트럭은 벤처럼 호흡기 걱정도 없이 잘도 달렸다. 벤은 숲정이가 가까워오자 설렘이 가득했다.
요하나와 결혼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떠난 여행의 피로도 잊고 꿈속에도 그리웠던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세 그루의 나무와 큰 바위가 있는 입구. 하지만 벤이 생각했던 입구가 달라져 있었다.
작은 나무와 숲이 있던 곳은 탱크와 군 트럭이 짓이기고 들어간 길이 생겼다. 포탄이 떨어져 불타고
구덩이가 생긴 여기저기를 피해 들어가니 막시가 ‘여기도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상상보다 더욱
처참했다.
불에 타 숯 더미가 된 집들, 이마를 마주 대고 살았던 집도 마주 보고 부서져 있고, 마을 교회도 폭격에
무너지고마을에 큰 나무들도 불타 시커먼 고목으로 서 있었다. 벤은 새로 난 나무와 풀들이 어지럽게 자란
격전지 흔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여~”
경배하는 유일신을 부른다기보다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한탄이었다.
벤은 헤이든에게 마주보고 폭삭 가라앉은 집을 자신이 살던 집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상절리의 집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헤이든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벤의 뒤를 따라다녔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눈만 뜨면 요하나와 만나고 동생들과 개를 몰고 작은 언덕을
뛰고 산에 오르던 수많은 추억들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벤은 너무나 많은 추억에 젖고 부서진 숲정이 최후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어머니가 찾아보라던 목걸이 함을 망각하고 말았다.
요하나와 남녀동생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나무와 억새 숲이 보였다.
특별히‘제인’은 숨바꼭질 중에 제일 잘 들켰다. 키가 커서도 아니고 밝은 옷을 입어서도 아니고 유난히
잘 들키자 ‘필릭스’가 아리송한 말로 벤과 제인을 놀렸다.
“벤 형은 언제나 제인 누나를 제일 잘 찾아요? 제인 누나는 꼭꼭 숨어야지 왜 잘 들켜요?”
“어? 그건 모르지 보이니까 찾은 거지.”
“제인은 벤 형을 좋아해서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들켰지.”
“필릭스 장난하지 마라. 형한테 혼난다.”
“형~생각도 내 맘대로 못해?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제인은 벤 오빠가 잘 찾으니까 들킨 거라며 얼굴을 붉혔다. 요하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연년생
막내 필릭스의 직설에 제인의 얼굴은 늘 머리채가 뽑혀 나온 홍당무가 되었다.
그렇게 끝났던 추억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벤은 나무와 억새가 군데군데 무더기로 자란 숲으로 갔다. 그곳은 마리아와 그 윗세대의 평토장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비문은 그대로 서있는데 그 뒤로 새로 생긴 비문 2개가 키 큰 억세 사이로 보였다.
순간 벤은 전쟁으로 돌아가신 숲정이 분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비문을 만들었지?”
왼편에 비문을 눈으로 읽어보았다. ‘에밋 천국에서 만나요. 막시 밀리언.’
막시를 마지막으로 본 날‘여기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피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와 생각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피하라고 한 말이었다. 비문은 전쟁이 끝나고 막시가 돌아와서 세워 준
것 같았다. 벤은 옆에 있는 제법 큰 또 하나의 비문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주여~”
차마 읽을 수가 없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주먹으로 걷어내고 읽어 내렸다. 빼곡히 적혀 있는 이름들.
리투아니아인 부부. 떠돌이 여행가인 벨라루스인 호멜 부부. 독일인 부부. 소비에트인. 자기 고장의 질 좋은
호밀이라며 가져온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부부와 체코 등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 그리고 아이들은 물론
자신과 요하나가족 이름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헤이든이 말했다.
“두 분 가족이 이렇게 살아 계신데 이름이 있는 것을 보니까 행방을 모르거나 시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기록한 것 같아요.”
“그러면 이름이 적힌 사람 중에 전쟁을 피하여 살아 계신분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벤은 비문의 마지막을 보았다.
-숲정이를 사랑하는 사람 25명 여기 잠들다. 천국에서 만나요 키예프 한나-
묘비를 세운 사람은 키예프삼촌 부부였다. 하지만 삼촌의 두 아이 중에 한명도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어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와 울컥했다.
“조카아이까지 죽다니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돌아가셨어요.”
“전쟁은 적군도 아군도 선함도 악함도 구별하지 않고 목숨을 빼앗아 가는 비정한 것이지요. 전쟁이 신의 뜻이
라지만 이건 신의 뜻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을 조종하는 사탄의 악랄한 계략일겁니다.”
잘 따르던 아이들의 죽음에 할 말을 잃고 멍한 시선으로 비문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날마다 공동체 식사를 하고, 요하나와 교회 청소를 하면 제인도 돕겠다고 팔을 걷어 올리던 생각.
삼촌과 밭을 일구고 수확을 해서 어머니와 요리를 했던 행복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자 삼촌 생각이 났다.
“삼촌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숙모님을 따라 독일로 갔을까?”
“숙모가 독일 분?”
“예. 숙모님 아버지는 목사님인데 고향으로 가셨을 것 같아요. 부모님은 신을 대신하여 늘 위로를 해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렇지요.”
“우리도 여기에 있었다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신께서 우리 두 가족을 살리시려고 전쟁을 앞둔 날
저에게 상관과 다툼이 일어나게 하시고, 새벽에 급하게 탈영하게 만들어 피신시킨 것을 보니 이제야 크고
비밀한 신의 뜻을 알겠어요.”
“맞아요. 우리도 여기까지 인도하셨잖아요?”
벤은 묘비에 적힌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헤이든은 무슨 생각이 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묘비에 에밋은 가족 같은데 묘비를 세운 막시 밀리언과는 어떤 관계지요?”
“예. 부자인데 마을 장로님으로 존경받는 어른이셨습니다.”
“아~그렇다면 혹시 막시 밀리언은 카멜레온이 악마라고 저주하며 찾아다녔던 독일 군 군목이 아닙니까?”
“예? 맞아요.”
“그런데 지난번에 왜 막시 밀리언이 고향사람이라고 말을 안 해 주었어요?”
“아 그건......”
벤은 막시와의 관계에서 싫어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이름까지 다 부르지 않고 ‘막시’라고만 부르는 사람
이라고 말해 주었다. 헤이든은 루카스 가족은 선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막시는 악하던지 아니면 어떤 큰
비밀이 있는 사람이라는 기자의 촉수가 손을 뻗었다.
“벤, 내가 군의관 때 잠깐 대필을 하던 보조기자를 했다고 했지요?”
“예.”
“어느 날 막시 밀리언이라는 군목이 오른쪽손가락을 여러 개나 다친 부상자를 데려와 급히 부탁했어요.”
“예? 막시가 요?”
“나는 그날 종군기자를 응급수술을 해 주었는데 손이 불편하니 대신 기사를 써 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불러 주는 대로 썼다가 읽기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 주었지요.”
“아~”
헤이든은 종군 기자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글 솜씨를 가졌다며 그 후로도 부탁을 하고, 이후에도
대필 과정에서 취재한 내용을 거의 알게 되었고, 나중에 군의관을 마친 후에도 관계를 유지하며 초보기자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벤은 그 이후로 막시를 만났는지 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럼 그때 막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사도 있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막시는 부상자를 데려온 것이 전부지만 첫 인상이 목사를 떠나서 부상자를 급히 치료 해
달라는 부탁의 목소리에 사랑이 담겨 있다 랄까? 내가 보기엔 인간미가 넘쳐 보였어요.”
“인간미요?”
벤은 인간미라는 말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전쟁터에 각국에 젊은 크리스천들을 징집해 가는 모병관으로
수없는 청년들을 죽게 만든 그에게 인간미라는 말을 붙여 준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었다.
막시는 카멜레온의 말처럼‘사탄의 괴수’라는 생각뿐이었다.
헤이든은 종군기자와 친분을 맺어 여러 사건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며 그때 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9년9월1일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3년1월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에 유럽에 살던 유대인은 대략 9백만 명쯤이었어요. 히틀러는 정치적 통합을
강제로 이루려고 독일인은 우월한 민족이고,유대인과 슬라브인과 집시 족들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우월한 민족은 열등한 민족과 섞이면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유대인
말살의 시작이었지요.”
헤이든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지구상에 우월한 민족만 살아남겠다는 독일 우월주의자 히틀러의 악랄한 ‘우세 종 출현의 서곡’은
그렇게 학살로 시작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