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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사경회 - 안유환
지리산 자락의 남사교회당은 마을에서 진양호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변 언덕위에 서있다. 적벽돌로 건축된 아담한 단층 건물은 30년이 가까운 세월에도 처음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거진 숲이 교회당 주변을 감싸고 있어 십자가가 없다면 예쁜 펜션이나 별장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교회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들판엔 누렇게 고개 숙인 벼가 탐스럽고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소담스런 가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빌딩숲에 갇혀 살던 도시인들이 어쩌다 시골길을 지날 때면 감탄해 마지않는 낭만적인 풍경이 그 속에 서려있다. 그러나 그들은 농부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기까지, 곧은 허리가 굽어지고, 부드럽던 피부가 가죽처럼 찌들기까지의 그 세월의 아픔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은 언제나 평화로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교회당에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부흥사경회’ 준비에 한창이다. 10여년 전에는 교육전도사도 한 사람 있었지만 이제 이석주 목사에게 유일한 일꾼은 진주에 살고 있는 막내딸 진희이다. 주일이면 아버지 교회로 와서 피아노 반주를 해주고 엄마의 일손을 돕기도 한다. 진희가 결혼을 하여 혹 멀리 떠난다면 교회는 대책이 없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진희는 알루미늄 삼각사다리 위에 올라서서 준비해두었던 부흥회 자막을 강대상 벽에 붙이고 있다. ‘교회창립 30주년기념 부흥사경회’, ‘주제 : 더 좋은 것은 미래에 있습니다’. 엄마는 아래서 사다리를 잡아주고 있다.
이번 집회 강사인 백창훈 목사는 아내와 함께 조금 전 교회에 도착, 조용히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백 목사는 이 목사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선지동산의 신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차산을 뒤로 끼고 한강을 굽어보며 서있는 광나루 신학교는 가을이 되면 곱게 물든 단풍이 함께 어우러져 캠퍼스는 아담한 수도원 같은 정취를 자아낸다. 이때쯤 광장교회 쪽에서 학교로 오르는 정문 길에는 빨갛게 물든 벚나무 잎이 낙엽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학교를 돌보는 일손들이 있지만 넓은 캠퍼스 구석구석에 떨어지는 낙엽을 제때에 다 치우지는 못한다. 어쩌다 비가 내리면 길은 낙엽으로 인해 더욱 지저분해진다. 신학교시절 백창훈은 ‘내가 시간을 내어 저 낙엽을 쓸어야 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학교는 한가하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빴다. 그러다보니 낙엽을 치우려는 마음은 늘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어느 날 백창훈은 6:00에 시작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기말 리포트 준비 자료를 구하기 위해 학생사로 내려갔다. 그때 밤새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창훈 보다 1년 후배인 이석주 였다. 교내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이 200여명은 되었지만 오직 한사람 이석주가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바로 정문 경비실에 들려 빗자루를 받아 매일 낙엽을 쓸었던 것이다. 이석주의 봉사는 그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백창훈은 그때부터 이석주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모님, 수고 많습니다.”
백 목사는 기도를 마치고 딸과 함께 자막을 붙이고 있는 이 목사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목사님, 언제 오셨습니까?”
이 목사 부인이 돌아보며 인사를 받았다.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예, 오후예배를 마친 뒤 교인들을 태워드리러 갔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진희도 사다리에서 내려와 백 목사에게 인사를 했다.
“사모님, 반갑습니다. 수고 많으시지요.”
백 목사의 아내도 이 목사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백 목사의 아내는 이 목사 댁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기에 서로가 낯설지 않은 관계이다.
“부흥회 준비하시느라 따님과 함께 수고가 많으시네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좀 쉬시지요.”
백 목사가 사모를 따라 교회당 뒤에 붙은 사택 쪽으로 돌아갈 때 교회 승합차가 바쁘게 언덕길을 올라왔다. 이 목사가 교인들을 태워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목사님, 일찍 도착하셨네요. 사모님, 오랜 만입니다.”
차에서 내리며 이 목사가 백 목사 내외를 맞았다.
“이 목사님, 혼자서 수고가 너무 많습니다. 교인수송은 부교역자들에게 맡겨야 할 텐데, 이러다 세월 다 가겠습니다.”
백 목사는 이 목사의 검게 탄 얼굴이 안쓰러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하하, 이미 세월 다 갔지요. 제가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다되었잖아요. 시골교회들은 오늘까지 도시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해온 겁니다. 젊은이들이 다 떠나는 농촌에 들어오려고 하는 목회자가 없으니 지키는데 까지 자리를 지켜야지요.”
이 목사는 언제나 서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교회는 30여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이 목사는 우선 백 목사 내외가 여장을 풀도록 숙소로 안내했다. 숙소는 예담촌 ‘최씨 고가’(경남도 문화재 117호)로 예약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 목사가 이 마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사용했던 집회장소라고 말했다. 그때는 연탄난방인데다 부엌이 따로 없는 사랑채에서 취사를 하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대청마루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여름에는 견딜 만 했지만 겨울날씨는 몹시 차가웠다. 비닐포장으로 가리개를 하고 연탄난로를 피우며 피난민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는 이집이 비어 있었으나 지금은 진주노회에서 은퇴한 L목사 내외가 8년째 기거 하며 최 씨 고가를 돌보아 주고 있다.
처음 숙소에 여장을 풀 때 백 목사는 어떻게 여기서 사흘 밤을 지낼 수 있을까 몹시 염려스러웠다. 집의 구조는 3평정도의 좁은 방들이 밭전(田)자 형태로 붙어있고 각방은 여닫이나 미닫이로 드나들 수 있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화장실과 세면장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1920년에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기위해 지어진 최 씨 고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여인들이 살던 안채, 남자들이 거주하던 사랑채, 그리고 곳간채와 익랑채가 ㅁ자 형태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들어서는 솟을 대문 옆으로 하인들이 거주하던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백 목사는 맨 먼저 화장실을 알아보기 위해 집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달려있지 않은 재래식 화장실은 행랑채 서편에 위치하며 3개의 높다란 돌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이곳은 사랑채에서 30~40m나 떨어져 있었으며 현재는 이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샤워장과 화장실은 백 목사가 머물 사랑채 방에서 100m를 넘게 가야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방에서 널따란 마루로 나와야한다. 댓돌을 딛고 내려와 축담에서 왼쪽으로 사랑채 끝까지 가면 안채로 통하는 동쪽 중문이 있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돌면 화단사이로 길이 나있다. 수국,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가 피어있는 꽃길이다. 석곽으로 짜여있는 우물터까지 열 발자국 쯤 걸어가 왼쪽으로 높은 토담사이 통로를 지나면 큰 텃밭이 나온다. 또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10m쯤 걸으면 비로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다. 세면장이나 화장실에 가는 길은 마치 이웃집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다가왔다. 백 목사 내외는 여행용 가방을 아무렇게나 사랑채 방에 놓아두고 다시 승합차로 교회로 돌아왔다. 마을에는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눈에 띠었다. 집집마다 감나무에는 빨갛게 가을이 익어가고 마을 입구에는 부흥회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숙소에서 교회까지의 거리는 걸어서도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다.
백 목사의 아내는 저녁준비도 도울 겸 사택으로 들어가고 백 목사와 이 목사는 폐교 된 초등학교 교정을 둘러보며 산책하기로 했다. 넓은 운동장이 있는 학교는 교회와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 목사는 부지런하고 유능한 이 목사가 지리산 골짜기에 묻혀있는 것이 안타까워 초창기에 부산 근교의 교회에 소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목사는 ‘지리산 선교동지회’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지역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면서 백 목사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때 상황 그대로라면 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할 일도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영락교회 여전도회의 도움으로 교회당을 건축했을 때만 해도 남사교회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물론 초창기에는 시련이 많았다. 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남사마을 예담촌 주민들은 교회당 건축을 시작할 때 오물을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회 바로 옆에 위치한 남사 초등학교에는 120여명의 학생들이 재학했고 10여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마을에는 수십 명의 중고등학생들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나 주일날에는 교회당이 어린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때는 교육전도사도 한 사람 동역할 수 있었다. 그러다 10년이 지나기 까지 매년 아이들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금부터 20년 전에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교회당을 찾아오던 아이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그동안 이 목사의 세 자녀들도 모두 남사 초등학교를 졸업했었다. 이들이 자라서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다른 아이들도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다. 교회학교가 모이지 못한지는 오래되었다.
백 목사가 5년 전 은퇴를 앞두고 시무해온 교회에 마땅한 후임자를 구할 때였다. 백 목사는 당회원들과 의논하고 이 목사를 청빙하도록 의견을 모았다. 당회가 백 목사의 제안에 동의한 것은 신학교 시절 이 목사가 정문 길 낙엽을 쓸던 일과 지리산 골짜기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전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 우리교회로 목회지를 옮기면 어떨까요? 목사님만 허락하면 다른 얘기는 다 되어 있습니다.”
백 목사는 이 목사의 어려워진 교회 형편을 보면서 청빙 이야기를 꺼냈었다.
“목사님, 기도해 보겠습니다.”
이 목사가 지난번처럼 첫 마디에 사양하지 않고 기도해보겠다고 여운을 남긴 것은 그만큼 지금의 교회사정이 어려워 마음에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달 후에 백 목사가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이 목사는 처음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목사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여기가 좋습니다. 학교는 폐교될 수 있어도 교회가 문을 닫아서는 안 되겠지요.”
이 목사는 백 목사의 청빙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죄송함을 표했다.
“이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백 목사는 오히려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목사도 이제 은퇴를 3~4년 남겨놓고 있다.
폐교된 남사초등학교는 담장이 없어 어느 쪽으로나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잡초가 우거진 운동장에는 여기저기 버려진 건축자재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본관입구 쪽 에는 ‘지리산 공예다자인 센터’라는 낡은 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한때는 진주나 부산·마산 등지에서도 수강생들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문을 닫았다. 운동장 한쪽에는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도 보였다. 학교 울타리로는 오래된 벚나무가 빨갛게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헐어진 시멘트 교문 지주 옆에는 플라타너스가 넓은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교문 가까이에는 동창회가 폐교된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오석 교지비(校址碑)를 세워 놓았다. 남사 초등학교는 1937년 5월 14일 사설학술강습회로 발족하여 1942년 4월 1일 남사공립국민학교로 개교한 이래 농촌인구의 감소로 말미암아 1998년 폐교되기까지 55회에 걸쳐 161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념비를 읽는 백 목사의 눈에는 한국농촌의 쇠락을 슬로비디오로 보는 듯 했다. 폐교되기 전 어느 여름 백 목사가 남사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문 옆 나무그늘아래 앉아 교장을 비롯한 몇몇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교회 사정이 여전히 어렵지요.”
백 목사는 어려운 후배교회를 돕지 못하고 있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교회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몸부림을 쳐보았습니다. 산기슭에 머루도 심어보고, 분재도 해보았습니다만 재주가 없어 잘 가꿔 내지 못했습니다.”
이 목사는 분재에는 기술이 필요하더라고 말했다.
“양봉을 하는 교회도 있던데요.”
“예, 이웃교회 목사님이 꿀벌 세 통을 분양해주어서 벌도 길러보았습니다. 사흘 후에 들여다보았더니 벌통 앞에 벌이 새카맣게 죽어있었습니다. 말벌이란 놈이 꿀벌을 모두 물어 죽인 것입니다.”
이 목사는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면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고 교회를 일으키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지리산자락의 해는 빨리 기울고 있었다. 진희가 저녁식사를 하라는 전화를 했다. 진희는 곧바로 자기 집으로 가고 두 목사 내외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강사를 대접하는 식탁은 진수성찬이었다.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했지만 부흥집회는 참으로 부담이 되는 군요.”
백 목사는 집회를 부탁받고 나서 몇 차례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목사님,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평소 하시던 대로 은혜로운 말씀주시면 좋겠습니다.”
“제직수련회나 기관의 연합집회들은 여러 차례 인도한 적은 있지만 부흥집회는 난생 처음이잖아요. 6개월을 꼬박 준비했다면 다른 목회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백 목사는 말씀을 준비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준비된 설교원고를 다시 읽어보면 본인에게 조차 와 닿는 것이 없어 본문을 바꾸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25년 동안 목회를 하며 말씀을 전했던 설교 노트를 두루 살펴보았지만 요즘 부흥회에 맞는 설교는 한편도 찾을 수 없었다.
“저도 몇 번 집회를 인도해보았습니다만 준비할 때의 부담스러움과 말씀을 전할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은혜를 더 받곤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의 집회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정신적 부담은 내려놓을 수가 없네요.”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게 하지요.”
이 목사는 늦게 신학교에 들어간 백 목사보다 7~8년 연하이다.
“이 목사님도 신학교 입학이 좀 늦었지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귀한 세월을 다 보냈지요. 저는 외가 쪽으로는 믿음의 가정이지만 아버지는 유교에 젖은 분이었습니다. 자라나면서 신앙적 갈등을 많이 겪었어요. 어머니는 교회에 빠지지 말라 당부하시고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일을 시키려했으니까요.”
이 목사는 월남파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인천에서 회사원으로 잠시 일했다. 울산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아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았다. 한편으로 고향교회에서는 돌아온 일꾼을 반겼고 여러 가지 일들을 맡겼다.
“저는 그때 교회의 일들을 맡을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요. 오래도록 객지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 목사는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목사님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장로였던 것 같은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그래도 모태신앙인인데다 장로로 세움 받았다면 이 목사님은 나보다는 신앙적 여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내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는 가나안농군학교와 연관을 가졌을 때부터입니다.”
이 목사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가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고나서는 1년 동안 학생생활주임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저도 제대 후에 바로 가나안농군학교에서 1주일동안 신앙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용기 장로의 생활철학은 당시 어려운 우리 삶에 많은 울림을 주었지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치약은 3mm를 짜서 쓰고 세수할 때 비누는 남자는 두 번, 여자는 세 번 문질러 세면을 하게했지요. 내가 1주일간 교육을 받고 수료할 때는 평생토록 김용기 장로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백 목사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일을 회고했다.
“그 때 제천에서 온 한 목사님이 저를 보고 말했어요. ‘이 선생은 신학공부를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저는 그때까지 신학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만날 때마다 권유를 한 것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합동 측 교단의 목사였지만 장로회 신학교에 가도록 주선을 해주었다고 했다. 이 목사의 가나안농군학교 생활이 광나루 신학교에서 매일 새벽 낙엽을 쓰는 생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목사가 지리산으로 들어온 것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저는 대도시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보다는 복음을 받지 못한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 현장의 상황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 목사는 그의 선택이 어쩌면 무모한 발걸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목사님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도 가나안농군학교의 영향을 받았고 신학교에서도 줄곧 목회자가 없는 농촌교회를 생각했으니까요.”
백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신학생 의식구조 조사에서 나타난 것은 졸업생95%가 도시교회를 지원하고 있었다.
“저도 그때를 기억합니다. 150명의 졸업생 가운데 농촌목회를 희망하는 사람은 불과 7~8명에 불과했지요.”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나입니다. 목회자가 없는 농어촌 교회나 낙도 또는 벽촌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실천에 옮겼군요.”
“그때는 2년 동안 농촌목회나 개척교회를 하지 않으면 목사고시에 합격해도 안수를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럼에도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실제로는 큰 교회에서 일하면서 적은 그 교회 기도원이나 큰 교회가 지원하는 농어촌교회에 두고 있는 편법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개척을 하여 장래에 큰 교회를 이루어보겠다는 꿈을 토로하는 동기들도 있었어요. 유명한 목회자의 자녀들일 수록 적은 다른데 두고 대도시 큰 교회에서 시무하는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아버지들이 아마 자기가 시무하던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으로 흘러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이 농촌이나 벽지교회에서 훈련받고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취지였지요. 저는 그 제도를 꾸준히 밀고나가야 한국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을 공공연히 어기는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이 생겨나면서 그 법은 결국 80년대 중반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를 마치 출세성공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와 신학교의 딱딱한 제도적인 얘기가 계속되자 두 사모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에는 목사 둘만 남았다.
“한 인격이 변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라 생각됩니다. 복음을 받고 놀랍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여전히 관성의 법칙처럼 습관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목사는 남사교회의 목회경험을 털어놓았다.
“제가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역마다 교회당만 크게 세워놓으면 하나님이 다 채워주신다는 말이 있을 만큼 교회성장은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이곳 남사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작은 교회당이 꽉 찼다. 그때 사택의 보일러 고장수리를 위해 마을에 사는 기술자를 찾아갔을 때 이 목사는 한 중년남성을 만났다. 그는 마산에서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하다 남사마을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의 전기시설들까지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그는 늦게 복음을 접했지만 교회에 열심 했고 전 교회에서는 안수집사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보일러수리를 하게 된 것이 다시 교회에 출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출석하고부터 그는 주일예배와 수요기도회는 물론 새벽기도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교인 한사람이 귀한 마당에 열심 있는 새 교인은 이 목사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학교를 돕기도 하고 교인수송승합차를 운전해주기도 했다. 이미 다른 교회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생활에 대한 교육을 새롭게 할 필요도 없는 일꾼이었다.
“목회자가 그 교인을 사랑하는 표시는 직분을 주고 일을 맡기는 것이지요. 교인들도 한결같이 그를 좋아하고 따르므로 개척15주년을 맞을 때 그를 장로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는 얘기를 하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충성된 사람에게는 직분을 맡기고 다소 부족한 점이 있어도 앞으로 잘 감당해 갈 것이라 믿고 기대를 걸어보잖아요. 나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백 목사는 자기의 목회경험을 생각하며 이 목사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사람이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아요. 그는 장로로 세움 받고도 오래도록 타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화투를 치는 습관은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더 젊을 때는 큰 노름판에 빠진 적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 다니던 교회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도 노름 때문에 빚어진 일이 본인의 가정과 교회에 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를 온 뒤로 큰 노름판을 벌이는 문제는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화투놀이를 하는 일은 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일 오후에 결석한 환자들이나 갑자기 입원한 교우들의 병원심방에 동행하도록 그에게 전화를 하면 늘 집에 없었습니다. 예고 없이 집을 찾아가보면 부인 집사는 C장로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은 마을 노인방이었습니다. 거기서는 날마다 화투판이 벌어지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다음날 새벽기도회에는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교회출석과 헌신적인 봉사를 생각하면 항존직으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겠군요.”
“세우기 전에는 그런 악습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또 한 가지 습관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담배를 피우면 지옥 간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잖아요. 불신자들과 화투놀이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은 너무도 덕스럽지 못했고 오히려 교회 문을 가로막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교회에 잘 나옵니까?”
백 목사는 이 목사의 처지가 하도 딱한 것 같아 C장로의 근황을 물었다.
“교회에 나오지 못한지가 3년이 넘었습니다. 건강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어느 날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몸 상태가 호전될 때는 아들이 휠체어에 태워 한번 씩 교회에 출석할 때도 있지만 거동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번 부흥회에 참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목사는 C장로의 형편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기도할 것뿐이지요.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백 목사는 이 목사를 위로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기적 같은 일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목사는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했다.
“산 너머 마을에는 외지에서 들어와 혼자 살고 있는 80대 노인 한분이 계십니다. 귀가 몹시 들리지 않아서 사비를 털어 보청기를 하나 해드렸습니다. 그 후부터 설교말씀이 잘 들려 예배하는 기쁨이 크다면서 자주 고마워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몹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택에 들려 차를 한 잔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배웅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하던 노인이 길가에 놓인 돌에 바퀴가 걸려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특별히 다친 데는 없었으나 보청기 볼륨이 갑자기 높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그분은 보청기 볼륨을 낮추어서 다시 꼈습니다. 그는 보청기가 이상이 있는 것처럼 뺐다, 꽂았다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내가 잘 들리느냐고 물었지만 그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보청기를 끼지 않아도 청력이 정상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것이 청력회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 생각됩니다.”
이 목사는 이밖에도 초창기 개척 때 태풍이 몰아쳐 마을 하천이 넘쳤을 때 몸을 던져 복구 작업을 도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또한 까닭 모르게 눈이 어두워져 고생하는 할머니의 백내장 무료수술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차츰 좋아졌습니다. 교회를 짓기 전에는 마을회관의 스피커를 통해 예배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을 울리기까지 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그러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유지 한분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하는 날 차임벨을 울렸습니다. 그날은 주일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회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장례식 날 녹음종을 울린 것이 불경스럽다는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못 가게 말린 것이지요.”
이 목사는 뜻하지 않은 일로 비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희생정신과 지속적인 헌신이었다. 13세 때 이 마을 양가에 대리모로 들어온 여인은 끝내 애기를 낳지 못하자 버림을 받아 혼자 살고 있었다. 94세의 그 할머니는 평생을 화투놀이와 술 담배에 빠져 소망 없이 살다가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이 목사는 할머니가 병들었을 때 자주 그 할머니를 보살펴주었고 교회에서 사모가 마련한 반찬을 때때로 공급해 주었다. 외로운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교회가 주선하여 장례식을 치러주기도 했다. 당시 지리산 지역은 복음화가 1.7%에 불과한 실정이었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산청을 비롯해 함양, 거창, 합천, 생비량에 까지 12개 교회가 세워졌다. 그 목회자들이 지리산 선교동지회 모체가 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많은 일을 했지요?”
“한때는 신학교 졸업 동기생들이 지리산 지역에 ‘선교여행’을 하고나서 해외선교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할 일이 많다는 호소를 했습니다. 그 결과 신학교 교수님들의 주선으로 서울 영락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이 이 지역 교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언젠가 차황군 지역에서 교인이 한사람도 없는 빈 교회를 본적이 있습니다. 농촌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오래도록 이농현상은 이어져왔지만 요즘은 농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귀농이 아니라 귀촌이지요. 귀촌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거처를 주선해주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목사의 꿈은 여전히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 목사님은 은퇴 후에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저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수도원 운동을 펼쳐볼까 생각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의 깊은 영성이나 감수성을 회복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성도의 생활을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중세 수도원의 역할이 요구되기도 하지요.”
저녁식사 후에 백 목사 내외는 숙소로 돌아왔다.
첫날저녁 땅거미가 짙어지고 있었다. 세면장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와도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백 목사는 밤중에 한두 번은 화장실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문밖에서 “사모님, 요강 필요하십니까?”하는 허 사모의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덜커덕거리는 미닫이문을 겨우 밀치며 “괜찮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남의 집에서 요강을 사용한다는 것이 쑥스러웠을 것이다. 백 목사는 아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 주시면 좋지요.”하고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뚜껑이 덮인 스텐 요강을 두 손으로 받아 뒷방에 들여놓았다. 가장 염려스럽고 불편하던 마음이 요강 하나로 평온을 되찾았다. 그것은 화장실이 따른 방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백 목사는 새벽녘에 잠이 깨어 요강에 소변을 보고 나서 자리에 다시 누웠다.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해도 잠은 돌아오지 않고 귀뚜라미 소리만 밀물처럼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머리맡의 손전등을 켜고 벗어놓았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바늘은 새벽5시를 넘어가고 있다.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옆방으로 건너가려고 미닫이문을 밀었다. 아내의 잠을 깨울까 싶어 조용히 미닫이를 열려고 했지만 덜커덕, 덜커덕, 소리가 몇 번이나 나고서 문이 열렸다. 아내가 부스스 눈을 뜨면서 백 목사를 쳐다보는 모습이 손전등 불빛에 비췬다. 아내는 잠시 쳐다보는 듯 하드니 다시 눈을 감는다.
백 목사는 옆방으로 건너와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은 방문 위쪽 천정에 붙어 있다. 불빛이 멀지만 글을 읽기에는 불편이 없었다. 대나무 삿자리로 장판을 대신한 방 한가운데 있는 교자상 위에는 투명한 타원형 플라스틱 쟁반에 잘 익은 무화과 4개와 생수병이 놓여있었다. 허 사모가 어제저녁에 갖다놓은 것이다. 등받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옆에 개켜있던 홑이불로 교자상 아래 가부좌한 다리를 감쌌다. 방안에 냉기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초가을 지리산 자락 예담촌의 새벽은 싸늘한 날씨이다. 백 목사는 성경을 펴고 설교원고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소망이란 것은 어느 한 점, 한 단계에 머물지 않고 자꾸 부풀어 오르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70점을 받던 아이가 80점, 90점을 받고 싶다. 어쩌다 한 과목 100점을 받은 아이가 올100을 받겠다고 생각하며 바라는 것, 이것이 희망입니다. 백석을 하던 농부가 천석을 꿈꾸고 나아가서는 만석군이 되겠다는 것, 이것이 소망입니다. 정치학도의 꿈은 구 의원, 시 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데 까지 희망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속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고 더 나은 것을 사모하는 것,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받은바 은혜가 많지만 더 큰 은혜를 바라는 것,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사도로, 선지자로 세우시고, 병 고치는 은사, 방언 등 온갖 좋은 은사를 주셨지만 거기서 머물지 말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의 애굽 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더 잘 살아보려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더 큰 성공을 바라는 것도 탐심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방법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로가나 모로 가나 서울 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던지 정직하게 올바른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더 큰 소망을 갖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돈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명예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지막 소망은 돈 많이 벌고 높은 직위를 얻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더 좋은 소망은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 —
귀뚜라미는 쉬지 않고 울어 제킨다. 귀뚤귀뚤, 찌륵찌륵, 또르락또르락, 쩨제째제, 크게 작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백 목사는 귀뚜라미 소리가 이처럼 다양한 줄은 처음 알았다. 마치 우렁찬 합창이거나 새벽을 불러올리는 교향곡이다. 오전6시30분이 지나며 날이 희붐해지자 귀뚜라미들은 합창을 멈추었다. 여기저기서 새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부흥사경회 첫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2015년 크리스천문학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