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동서양 왕들의 선택 살펴 보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 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원작으로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삼국유사의 경문왕'과 '그리스로마신화의 미다스 왕'이다.1 복두장이(왕이나 벼슬아치가 쓰는 모자(복두)를 만들거나 고치던 사람)와 미용사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강권하는 왕의 모습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진실을 알리는 것은 본능적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는 설화는 어느 정도 개작이 필수이다. 즉 전하고자 하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전체적인 플롯은 단순화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 비슷한 설화가 존재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교훈이 있음을 보여 준다.2 우리는 삼국유사의 경문왕과 그리스로마신화의 미다스왕을 통해 "국민의 말을 잘 들어주는 왕이야 말로 참된 왕이다."라는 교훈을 얻곤 한다. 다만 억압자이자 권력자로 그려지는 왕들은 왜 '당나귀 귀'가 되는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단순화된 설화 속, 그 왕들의 선택을 살펴 본다.
1. <삼국사기>의 경문왕
신라시대의 일이다. 헌안왕이 화랑 응렴에게 어떤 자가 현자인지 묻자, 응렴은 '겸손한 사람, 검소한 사람,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으로 꼽는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은 응렴을 사윗감으로 정한다. 응렴이 집에 돌아가 이 일을 말하자 집에서는 미인인 둘째 공주를 고르라 하지만 범교사(승려)는 첫째공주를 택하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응렴은 승려의 말을 따르고, 헌안왕이 죽은 뒤 첫째 사위인 응렴이 왕이 된다. 이 응렴이 바로 경문왕이다. 응렴은 왕이 된 기념으로 미인인 둘째 공주까지 취하고, 범교사에게 크게 한 턱 쏜다. 범교사가 말한 세 가지 좋은 일이란 1. 첫째 공주를 택함으로써 헌안왕의 총애를 얻은 일 2. 맏공주를 얻어 왕이 된 일 3. 왕이 되어 아름다운 둘째 공주까지 취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재해는 끊이질 않았고, 왕이 잘 때면 저녁마다 뱀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뱀을 내쫓으려 했으나, 경문왕은 뱀이 없으면 편히 잘 수 없다며 뱀들의 혀를 덮고 있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고, 이 사실은 복두장이만이 알고 있었다. 경문왕이 이를 비밀로 하라고 엄히 말하여, 가슴앓이를 하던 복두장이는 죽을 때까지 이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다. 이를 안 경문왕은 대나무를 전무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게 하였는데, 그래도 그 소리는 계속 났다고 한다.
헌안왕이 세상 일을 물었을 때 응렴의 대답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겸손하고 검소하며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현자로 통할 것이다. 응렴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승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첫째 공주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된 뒤 응렴의 행동은 자신의 대답과는 영 딴판이었다. 자는 동안에도 뱀을 곁에 두어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첫째 공주 대신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욕심낸다. 뿐만 아니라 경문왕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자연재해가 잦고, 역병이 창궐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 역병에 산수유가 효과를 보인다 생각하여 대나무를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경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수용하는 등 왕으로서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나 개혁에 실패한 당나귀 귀 임금님으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2. 그리스로마신화의 미다스 왕
미다스는 미다스(midas)의 손으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설화 중 하나이다. 그런 미다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실레노스가 술에 취해 방황하고 있자 미다스는 그를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하며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이에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미다스는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후 미다스는 큰 부자가 되었으나, 음식도 딸도 금으로 변해 버려 상심한다. 디오니소스를 다시 찾아가 능력을 없애달라고 간청하자, 디오니소스는 파톨로스 강에 몸을 씻으면 능력이 사라지게 해 주었다.
미다스는 자신의 몸도, 황금으로 변한 딸도 파톨로스 강에 씻기고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 놓는다. 이로 인해 부귀영화에 질려 버린 미다스는 속세를 버리고 숲에 들어가 반신반양인 목신 판을 섬기며 산다. 그러던 중 판은 아폴론에게 연주 내기를 신청하고, 트몰로스 산신이 심판이 되어 둘의 연주 시합이 펼쳐졌다. 판이 피리를 불고, 아폴론은 리라를 연주를 했다. 두 신 모두 훌륭한 연주를 펼쳤지만, 트몰로스 산신은 아폴론의 편을 들었다. 청중들은 모두 동의했지만 미다스는 동의하지 못했다. 이에 반발한 미다스를 주제넘다 판단한 아폴론은 그에게 사람의 귀보다 동물의 귀가 더 어울린다 판단하여 당나귀 귀로 바꿔 버렸다고 한다. 이후 미다스는 귀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의 머리를 정리하는 이발사만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들은 미다스가 신의 선택을 거스르고, 판의 연주가 더 아름답다고 한 것을 어리석다고 표현한다. 즉 미다스는 신 앞에서 두 번이나 경솔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미다스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산으로 도망치게 된 배경을 보아야 한다. 그는 만지는 모든 것들을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으나, 그 능력으로 딸까지 잃을 뻔하였다. 속세를 버리고 도망치듯 자연으로 돌아가 만난 것이 판이다. 어쩌면 올림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석적인 아폴론의 연주보다 자유롭고 자연에 동화된 판의 연주를 더 우수하다고 판단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일한 슬로건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두 설화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두 왕 모두 성격의 변화를 보여주는 입체적 인물임은 동일하다. 하지만 경문왕은 왕으로서 욕심을 부리고 어질지 못하여 백성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당나귀 귀가 되었고, 미다스는 욕심을 버리고 주장을 굽히지 않아 당나귀 귀가 되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훈을 주고 있는 설화인 것이다.
1 임금님(나라의 통치자)의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지는 설화는 인도, 몽고, 터키 등에서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2 그 예로 콩쥐팥쥐(한국)-섭한 아가씨(중국)-신데렐라(유럽), 옴두꺼비 장가간 이야기(한국)-개구리왕자(독일) 등이 있다.
[출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동서양 왕들의 선택 살펴 보기|작성자 axs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