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빙수
- 이영옥 수필집
한 달에 2만 원씩 5년을 모았다고 했다. 세상에!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남편은 그 큰돈을 은근슬쩍 나에게 밑밥으로 던져보기를 했다. 나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어떻게 모은 돈인데 나를 주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백만 원의 가슴 미어짐을 안다며 거절했다.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남편은 나한테 그 백만 원을 선뜻 봉투째 바쳤다.
백만 원. 참으로 황송했다. 겉으론 점잖게 마다했지만 돈 봉투가 눈앞에 있으니 흔들렸다. 그 돈 주고 나면 남편이 어찌할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준다는데, 며칠의 망설임이 설렘으로 바뀔 즈음 덥석 물었다.
살아봐서 알지만 남편의 입이 들썩거릴 때마다 내 귀는 공치사를 들어야 하고 멀미도 할 것이다. 더불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으스대는 몸짓을 봐 줘야 하리라. 생각해 보니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나는 이미 낚인 것 같았다. (그냥 웃지요)
안전봉을 잡고 변기 앞에 서 있게 한 다음 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풀기 시작했다. 건장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어쩌다 내가 허리춤을 풀고 있을까. 콧날이 시큰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기기엔 아버지도 남자도 없었다. 골짜기 바위틈에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안개가 퍼지듯 부련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소변 양도 아주 적었다. 천천히 다시 옷을 추슬러 드렸다. 지금껏 걱정했던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거동도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아버지를 두고 못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딸로서 너무도 민망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 이제는 계단도 못 오르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우리 집은 오시지도 못한다. 아버지의 거꾸로 가는 시계가 속도를 내고 있다. (남자는 없었다)
팔십 평생을 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이 자신의 이름을 못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김’ 자를 떠올린다. 농사일을 지금껏 하고 계시니 낫을 먼저 그리게 하고 지게를 받치는 작대기를 그리기. 그 다음 아들이 좋아하는 짐(김)을 한 장 그리기. 세 가지를 그린 다음 순서대로 ‘김’ 자를 만들어 준다. ‘을’자도 이런 방법으로 하면 되겠지. ‘기’자는 ‘김’자를 썼으니 다시 한 번 설명하면 되고···. 간단하고 쉬워 금방 배울 것 같았다.
색연필을 잡은 엄마의 손이 긴장한다. 편안히 손목을 스케치북에 놓지 못하고 붓글씨를 쓰듯 들고 있다. 쉽게 생각한 낫이 흔들린다. 작대기도 삐뚤빼뚤이다. 네모난 김은 일그러져 있다. 다시 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새로이 ‘을’자를 써 본다. ‘을’자를 쓰고 나니 ‘김’자를 잊어버린다. 이름 석 자 쓰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님을 이제야 느낀다. 겨우겨우 눈으로 보고 그리면서 세 글자를 써 놓고 물으신다.
“이게 내 이름인감?”
엄마는 감동하시는데 나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평소 한글만 몰랐을 뿐이지 다른 면에서는 오히려 나보다 뛰어난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1박2일 동안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못 써 다음 주를 기약해야 했다.
근무 중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시골에서 전날 보고 왔는데 오랜만인 것처럼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할 듯 말 듯 망설이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 이제 안 보고 쓸 줄 알어. 내 이름자 김을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뭉클했다.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으면 이렇게 전화를 하셨을까. 늙은 엄마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대나무 숲으로 달려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늙은 엄마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빨리 주말이 다가왔으면 싶었다. (김을기 여사의 가나다라)
다행히 육 개월 정도 하다 보니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다. 거래처인 슈퍼를 돌면서 커피를 진열하고 발주를 받는 업무로 바뀌게 된 것이다. 나는 다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거래처를 순회하며 커피를 진열하고 발주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 다짐했던 삼 년이 흐르고 십 년이 되었다. (나는 커피 아줌마)
가만히 그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을 보내준 이는 어떤 마음일가 궁금했다. 상사로서 의례적으로 건네준 것일까. 내 마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그도 그랬을까. 아니면 나 혼자만의 관심이었을까. 날마다 소국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하다가 끝내는 각자의 삶 속에서 흔들리지 말기를 빌었다. 꽃을 건네준 이도, 꽃을 받은 나도 여기까지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국이 있는 가을)
잠시 뒤에 그 구두는 돌아왔지만 정말 다시는 신고 싶지 않았다. 버리고 싶었다. 구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며 모멸감은 옅어졌지만 작고 예쁜 구두에 대한 로망은 변함이 없었다.
진열장에 예쁘게 진열된 구두를 신으면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어도 거짓말처럼 근사한 남자가 손을 내밀 것 같은 상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주로 플랫슈즈를 신는다. 구두의 코 부분에 커다란 장식이 달린 것을 선호한다. 크고 못난 발을 감추는 효과도 있지만 사실은 수고하는 구두에게 주는 꽃이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구두에게 주는 꽃)
아버지의 큰 발이 그날따라 솔직해 보였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원시의 모습이랄까. 달구지에 식구들을 태우고 앞에서 끄는 황소처럼 크고 못생긴 그 발로 가족을 이끌어 온 것이었다. 몇 발 앞서 걸으며 장애물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 좋은 곳만 바라보게 하였으리라. 힘에 겨워 기우뚱거리며 느릿느릿 걸을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단만 맞추고 있었던 건 아닐까. 황소의 발바닥이 트고 갈라져 피가 맺히는 줄도 모르고. (갑골 무늬를 찾아서)
여웃돈이 없으니 크게 저지르진 않지만 미리 사서 쌓아 놓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만 반복할 뿐이다.
아무리 팔랑귀지만, 수시로 일도 잘 저지르지만 내 가난한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하다. (귀에도 마음이 있다)
세상은 달라졌다. 라디오도 많이 변했다. 현재는 ‘보이는 라디오’를 이야기한다. 인터넷으로 진행자와 초대 손님의 얼굴을 보여 주고 스튜디오를 통째로 보여 준다. 나는 이런 변화가 반갑지 않다. 이미 라디오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라디오는 시각이 아닌 청각의 향연이다. (라디오가 좋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뜨개질을 시작했다. 서너 개의 대바늘을 교대로 쓰면서 며칠에 걸쳐 내 장갑을 떴다.
가방 뒷주머니 지퍼를 연 순간 장갑 한 짝이 툭 떨어졌다. 순간 망설이다 용기를 못낸 나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요즘은 겨울이 되어도 예전만큼 춥지가 않다. 월동 준비라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한때는 월동준비가 남자친구, 롱코트, 부츠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긴 시간을 달려온 지금은 해당 사항이 없다. 예외라면 나에게 변치 않는 항목, 장갑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툭하면 잘 잃어버려 항상 아쉽다. 차라리 한 켤레를 잃어버리면 누군가에게 적선한 셈 치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는데 한 짝씩만 잃어버리니 문제다. 어릴 때처럼 아버지한테 근을 매달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잃어버린 한 짝이 슬그머니 나타나길 기다려본다. 떠 주시던 벙어리장갑이 생각난다. 균형이 안 맞는 짝짝이었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장갑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이제는 그런 장갑이 그립다 말해도 아버지는 뜨개질을 해주지 못한다. 창백한 얼굴로 병원에 누워계시기 때문이다. 겨울은 손보다 가슴이 더 시린 계절이 되었다. (장갑)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예쁜 것이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개양귀비가 긴 목을 조아리고 서 있다. 마지막 순간 현종에게 버림받고 피를 토한 듯한 붉은 꽃으로 피어나 가느다란 줄기 끝에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춤을 춘다.
수많은 꽃대가 고개를 숙였다. 봉오리가 커 갈수록 고개를 더 조아렸다. 양귀비가 나라 어지럽힌 죄를 알고 처분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성질 급한 녀석이 먼저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얇고 보드라운 빨강 꽃잎이 바람에 살랑였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지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는 줄기 끝에 피어 있는 꽃은 접시꽃처럼 크고 아름다워 눈을 맞추고 나면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수많은 꽃봉오리가 고개 숙인 까닭을. 꽃들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 무사히 꽃을 피우게 해 달라고, 건강한 씨앗을 퍼트리게 해 달라고 흙 속에 발을 묻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간절히 밀었던 것이다.
잘난 척하며 사는 인간들만 기도하는 줄 알지만 꽃들도 그들의 방법대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인간만이 생명을 잉태한 후 태교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꽃들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꽃들은 화려한 색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도 하고 색으로 안될 때는 냄새로 곤충을 불러와 수정을 하기도 한다. 이도저도 방법이 없을 때는 자연에 기대어 바람결에 꽃가루를 날리기도 한다. 인간과 꽃은 다른 영역을 갖고 있지만 종족 번식의 욕망은 같은 것 같다.
꽃들의 기도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 찰나 같은 시간을 만났다 해도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그렇다 하더라도 캄캄한 밤 어디선가 꽃들이 조용히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5월의 밤은 그냥 좋다. (꽃들도 기도를 한다) / (Continued ···)
올리브 나무 아래서 / 사진 염장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