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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그분’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곧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분명 행위임에 틀림없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랑, 주는 것이 없는 사랑, 관념적인 사랑이란 죽은 사랑이다. 내가 애인을, 벗을 진정 사랑할 때, 내가 아끼는 것, 내게 소중한 것을 주고 싶어지고 또 그렇게 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웃이란 귀찮은 존재, 괴로움을 주는 존재, 없는 것보다 못한 존재일 수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이웃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웃을 거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우리 이웃의 가장 미소한 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 가장 버림받은 자 그가 곧 그리스도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고 교부들은 말씀하신다.
또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들과 모든 민족들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 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 고 가르치신다. 저 암브로시오 성인은 "내 것을 가난한 이에게 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돌려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땅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 결코 부자들만의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빈첸시오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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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라고 불리우는 파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기원 전부터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의 한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에서 따온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 하기 시작했지요. 중세 시대까지 파리는 좁은 골목과 지저분하고 음침한 주거환경으로 밤에는 사람 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슬럼가였답니다. 골목 안에 있는 집과 집은 건너 뛸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어둠 컴컴한 골목에는 지린내와 오물이 쌓여 있었다지요. 골목 안에는 취객들과 부랑자 땜에 파리 시민들은 밤에는 외출을 하기 어려웠답니다.
19세기 나폴래옹3세(1852~70 재위) 때 오스망 남작이라는 시장이 빈민가를 정비하면서 주민들을 시 외곽으로 이전 시키고 도로를 직선으로 확장 정비하고 주택을 일 률적으로 20미터의 높이에 건물 하나하나를 시에서 심사했다지요. 건물마다 똑 같이 지을 수 없게 하면서 오늘날의 파리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이루었답니다.
대개 5층 높이의 건물은 1층은 상점, 2층은 넓은 발코니의 주택, 3,4층은 좁은 발코니의 좀 못해보이는 주택이며 제일 꼭대기 층은 넓은 베란다를 두어 쾌적한 조망과 환기가 잘 되는 주택으로 만들었답니다. 아마 꼭대기 층은 분양이 힘들까 신경을 썼다고 봐야겠지요. 우리나라 말로 5층짜리 주상복합 건물과 엇비슷해 보이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어느 하나 똑같이 생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네요. 건물 외장 색깔도 시정부에서 간섭한답니다. 새로운 파리를 창조해낸 뛰어난 도시계획가 오스만은 빈민지역에 있는 복잡한 가로들을 없애고 현대식 하수· 수로 시설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센 강에 4개의 새 다리를 세우고 기존의 남은 다리 3개를 재건했습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너도밤나무와 참나무의 거대한 삼림은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의 공기를 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파리의 허파'라고 불립니다.
유명한 파리의 지하 하수구와 지하 운하를 못 본 게 섭섭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잔발장과 마리우스가 피신하는 장면에 파리 도시 밑으로 거미줄 같이 뚫린 지하 하수도가 등장하지요. 물론 세계 각국의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과 학자들이 꼭 견학하 는 명소이라지만 저는 젊은 시절에 감동을 받은 세계명작의 현장에 서 보고 싶은 탓이어서 더욱 유감 이었습니다. 전에 Ebs 교육방송에 파리의 하수도를 보여주어서 무척 부러웠습니다. 도시 아래로 거미 줄 같은 운하를 만들고 하수도에 연결된 것을 샅샅이 보여주었거든요. 오늘의 파리를 건설한 오스망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땅 위로 밑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도시계획을 실행 해낸 오스망 시장을 파리지앤느들이 제일 존경한다네요. 오늘의 파리, 세계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오는 곳, 한사람의 천재 오스망, 정정하지요. 파리를 사랑 하고 지켜냈던 빅토르 위고, 스탕달, 지드, 쟝 꼭도와 이브몽땅과 모리스 슈발리에, 그리고 쟝 가방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과 샹송가수, 영화배우 등 예술가들이 쌓아 올린 금자탑 때문에 파리는 빛나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이 도시를 "빛의 도시" 라고 부른답니다.
언뜻 보면 오래된 구닥다리 건물만 있는가 했는데 파리 외곽 라데팡스에는 현대식, 아니 초현대식 감각의 건물이 단지를 이루고 있는데 지나면서 보았습니다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건 뭐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는 건물이 아니라 미적 감각 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실용성 또한 뛰어난 가 봅니다. 저 또한, 역시 프랑스구나 하고 감탄할 밖에요. 고전과 초현대적인 예술의 만남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또한 실용과 순수예술의 어울림도 시내 곳곳에 남아 있지요. 지금 가고 있는 루브르, 고전의 본산에 초현실주의 작품인 유리 피라미드가 그 한복판, 루브르궁 정원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봐서도 알 수 있겠지요.
개선문을 중심으로 넓고 직선으로 뚫린 도로가 방사선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도시설계는 파리의 명물입니다. 원래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돌아간 나폴레옹3세가 시민들의 잦은 봉기를 막기 위한 군사적, 또는 치안유지의 목적으로 그리 계획하였답니다. 넓게, 그리고 직선으로 뚫린 도로는 멀리서도 데모대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고 간단하게 도로 하나만 차단하면 데모대가 시내로 진입하는 걸 막을 수 있다 잖아요. 데모대 입장에서는 도로가 넓어서 바리케이트를 치기에는 힘들 거라는 걸 노렸을 거고요. 파리의 우아한 방사선 모양의 도로가 이러한 이유로 만들어 졌다는 걸 알고 나면 우습지요. 권력자의 욕망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은가 봐요. 바리케이트에 힘입어 권력을 잡게 된 그가 바리케이트를 못 치게 하려고 애썼던 것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지요.
아이러니한 건 잘 닦여진 이 도로를 통해 히틀러의 독일군이 파리로 진입하는데 참 수월했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리가 재빨리 함락된 게 잘 닦여진 도로 탓이었다, 이런 이야기지요. 독일군은 파리에 진주해 있는 동안 유서 깊은 도시를 훼손하지 않았대요. 그러나 퇴각할 때 히틀러가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러나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철수한 덕에 파리는 오늘날에도 유적과 인류문명의 보고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물론 연합군도 파리에는 절대 포격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아마겟돈이라는 영화에서 지구로 떨어지는 혜성의 한 파편이 파리에 떨어졌을 뿐인데 개선문 앞에는 엄청난 웅덩이가 생기면서 파리는 잿더미가 되더군요. 픽션이지만 끔직한 일이예요.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생기는 피해로 부터 인류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끝없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해야 할 테지요.
거짓말처럼 상쾌하게 개인 주일 아침 서둘러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에 오릅니다.
밤새 내린 비로 깨끗하게 정돈된 콩코드 광장에 내려 321m 에팰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9시30분이던가 개관시간에 대어 맨 처음으로 루브르에 들어갑니다. 1200 년 경, 중세 왕이었던 필립 오귀스트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루파라라는 성을 세운 것이 1360 년 샤를르 5세 치하에서 왕궁으로 확장 되었다지요.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와중, 즉 1793 년 "중앙 예술 박물관"으로 개관 되면서 루브르는 박물관으로 임무를 시작했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나폴 레옹 박물관"으로 불리다가 나폴레옹이 물러나면서 오늘의 "루브르" 이름을 되찾게 되었고요. 연간 약 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은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대 루브르 공사 이후 무려 700 미터에 이르는 박물관의 넓은 공간을 오가며 유물을 감상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일러 어느 할 일 없던 사람이 말하기를, 루브르의 진열품 하나마다 단 일초씩만 바라 봐도 다 보려면 보름이 걸린다고 했어요. 그것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볼 때요. 대영박물관, 바티칸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지요.
예술적 안목이 없는 순례자가 인상에 남았던 것은 고대 동방관에 있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의 법전(기원전 1750년경)이었어요. 기원 전 1790년대면 바로 성조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떠나라”라는 명을 받잡고 고향인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거 슬러 마리를 거쳐 하란으로 길고도 긴 이동을 하던 때가 아닙니까? 2.25미터 높이의 원추형 현무암 비석 위에 쐐기문자를 새겨 넣은 함무라비 법전은 당시의 관습법과 국가의 규율과 왕의 훈계를 적은 것이며 비석 머리 부분에 태양의 신이자 정의의 신이기도 한 샤마슈신 앞에 서서 경배를 드리는 함무라비 왕의 모습이 너무 엄숙합니다.
고대 이집트관은 상고대로부터 전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집트의 전 역사를 조감해 볼 수 있는 곳이지 요. 영화 미이라를 보신 분은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을 떠 올리겠지만 루브르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영 박물관은 입장료가 없습니다. 그것은 보관 전시된 유물 중에서 자기나라 유물이 적으면(몇%인가 기준이 있는데)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루브르에는 입장료(17유로)가 있답니다. 참 많이도 뺏어왔고 훔쳐왔어요. 루브르에서는 대영 박물관은 남의 나라 유물을 약탈한 문화재 도둑 국가라고 비아냥거리지만 프랑스 도 그 점에 있어서는 오십 보 백 보가 아닐까요? 또찐개찐도 어울리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루브르를 대표하는 밀로의 비너스와 니케아, 즉 승리의 여신과 미술 시간에 석고 대상을 할 때 꼭 그려보던 아그리파장군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야지요.
루브르 웅장한 계단 꼭대기에 군림한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과 밀로의 '비너스'는 같은 시기의 비슷한 작품이지만 이 두 여신은 수십 세기를 거치는 여정 동안 숱한 역경을 겪었지요. 비너스는 팔을 잃어버렸고, 승리의 여신은 머리를 잃어버렸답니다. 머리 없는 미녀 승리의 여신은 BC203년경 로 도스 사람들이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이랍니다. 1863년 사모트라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지요. 그래서 '니케(Nike)'라는 별명이 붙었대요. 니케는 그리스어 로 '승리'를 뜻한다지요. 유명한 미국 스포츠화 상표도 여기서 나온 이름이고, 그 상표의 로고 역시 승리의 여신의 날개 모양에서 따왔어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뙛놈이 먹는다, 그러지만 나이키로 수고한 건 그리스고 돈을 버는 것은 미국사람입니다. 입장료로 약간의 돈을 챙긴 것은 프랑스가 되겠네 요.
니케아의 여신을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봅니다. 여신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한대요. '나는 시간과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맞서 이겼노라고.'(그리스인이 들려준 그리스 신화에서) 완벽하게 표현된 늘어진 옷자락의 주름과 도약 직전의 힘차고 성스러운 날개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 다. 아마 그토록 당당하게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영혼 덕분이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리스 조각은 부동자세로 율동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조각된 대리석 덩어리 안에 내면의 불꽃, 생명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예요. 미술책에서 보았던 유명한 조각품이 너무 많아서인가 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둔 모조 조각품으로 착 각하기 딱 맞을 정도로 루브르가 얼마나 많은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요.
회화관으로 넘어가는 회랑의 창문 너머로 나폴레옹 광장에 꽉 찬 "유리 피라미드"가 정교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4천 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루브르 박물관 바로 그 바깥 광장에 현대적인, 정교하다 못해 치밀한 아름다움으로 시원하게 뿜어내는 분수를 헤치며 우뚝 솟아오른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의 기하학적인 모습, 오~! 우리 시대에도 이런 훌륭한 예술가가 있다고 항변하는 듯 했습니다. 고대와 현대의 만남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념물은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대 루브르 계획안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는데, 1983년 착공해서 1989년 완공되었습니다. 이 유리 피라미드는 박물관의 일반인 출입구의 하나로써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오밍 페이의 작품으로 고대로마 폼페이 빌라의 안마당인 아트리움을 모티브로 잡았다고 합니다. "루브르 박물관 가운데로 모인 관광객들은 지하통로를 통해 다양한 목적지로 흩어지도록 할 겁니다. 페이는 새 출입구 설계안에 따르면 마름모 모양 유리 603개와 삼각형 유리 70개, 강철을 사용해 삼각형인 피라미드를 만들겠다는 것. 예상 높이 21.6M, 바닥면적 1000M.
설계 당시 관광객 2백만 명 수준으로 설계했는데, 2016년 9백만 명을 넘었다. 무려 4.5배가 많은 숫자지만 새로운 출입구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루브르궁의 모양을 해친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으나 이곳은 루브르의 현대적 상징이 됐습니다. 관광객이 방문할 때 가장 좋아하는 모나리지,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과 같은 수준의 아이콘이 된 겁니다. 유리 피라미드 자체가 루브르 박물관을 상징할 정도로 유명해진 건축물입니다.
이처럼 건축물 하나가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는? 건축가 한 분한데 여쭈어 보았더니 관공서 책상 하나를 건너면서 옛말로 주사가 틀고 또 하나를 건너면 사무관이, 또 서기관이 틀다가 차관 장관 하나를거칠 때 마다 전문가 아닌 공무원이 다 망쳐 놓는다고 합니다. 맡길려면 전문가의 수준을 믿고 기다리면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고 하네요.
회화관으로 넘어가면 다비드 "1804년 12월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의 화려하고도 웅장한 그림을 보게 되지요.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자기 손으로 왕관을 쓰려고 하는 그 오만함, 왕관 수여의 권한을 빼앗긴 교황의 화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순례의 기쁨을 그대는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어느 평론가가 말하길 루부르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고 칭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앞에 섭니다. 가슴을 들어낸 여인이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를, 한 손엔 착검한 소총을 잡은 채 뒤를 돌아보 며 총과 칼을 잡은 파리 시민들을 독려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전쟁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여인 옆에는 양손에 권총을 쥐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소년과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더미, 자욱한 화약연기,.. 이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외젠느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원래 제목 "1830년 7월 28일, 바리케이드를 향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관전(官展)에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나 신정부가 즉시 이 그림을 사들이고 35년 동안 한 번도 일반에게 공개시키지 않았답니다. 이 그림이 일반 시민들에게 너무나 자극적이라고 생각해서인데 현대인들이 모나리자의 애매한 미소에 매료당하기 전까지 미로의 비너스, 니케아의 승리의 여신과 함께 루브르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로 꼽혔답니다. 왕권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오만했던 태양왕 루이14세와 16세의 폭정에 분연히 일어섰던 프랑스 대혁명 때 여인과 소년까지도 피비린내 나는 거사에 참가했답니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으로 나아가게 했던 위대한 거사, 아니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혁명이잖습니까?
재미있는 얘기 해 드릴까요.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이 뉴옼의 위대한 상징인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미국 독립 100 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가 F.A. 바르토르디에게 여신상을 제작 할 것을 의뢰합니다. 지금도 맨하탄에 씩씩하게 서 있는 "미스 리버티"는 바로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에서 그 이미지를 따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오!! 여기에서도 만나다니, 치마부에가 그린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동정녀 마리아"와 지오또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자 프란치스코"를 보노라면 아씨시에서 만났던 성인을 다시 만난 듯 반갑고말고요. 순례의 길이었으니 수많은 그림 중에도 베로네즈의 "가나의 혼인잔치"가 눈에 확 뜨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비파를 타는 전형적인 잔치집의 떠들썩한 분위기, 동네 사람들과 어울린 예수님과 성모님, 뒤편에는 고기와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산한 잔치집 사람들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그려진 지극히도 평범한 그림 앞에 섭니다. 바햐흐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첫 기적이 나올까 긴장 하면서 이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어울리실 뿐 아니라 흥겨운 잔치에 스스럼없이 참석하시어 술잔도 기울이시고 노래도 부르며 기쁘게 웃고 떠드는 참 천진한 분이신가 봐!..." 가나의 혼인 잔치의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여 "골고다" (베로나 성당의 병풍을 위해 만테그나가 그린)에서 비통한 모습을 보이는 성모님을 건성으로 지나칩니다.
...그 유명한 "모나리자(Mona Lisa)"가 다가옵니다.
제가 모나리자 앞에 섰다니까요!! 관광 시즌이 아니어서 모나리자 앞에는 우리 일행 밖에 없어서 버릇처럼 카메라를 꺼냈지만 루브르 전체에서 단 한 곳, 모나리자는 촬영을 할 수 없다는군요.(카메라 플래쉬로 부터 그림을 보호 하려는 조치를 보아도 모나리자가 수많은 예술작품으로 가득 찬 루브르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요.) 1,495년 피렌체의 귀족인 프란치스코 델 조콘다와 결혼한 리자 게라르드니의 얼굴을 그린 것. "라 조콘다(La Gioconda)"는 모나리자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이는 모나리자의 남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태리어로 유뷰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귀족 조콘다의 부인 이름 리자 게라르드니에서 딴 것입니다.
리자(Lisa)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그녀가 사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요.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 작품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사진과 복사본 으로 숱하게 보아왔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루브르가 소장한 모나리자 진본 앞에 있노라니 거의 불가사의한 느낌이네요.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 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 이 오묘한 전율, 내 마음 속을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일 아꼈던 이 그림은 루브르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수수께끼 같은 미소, 놀라운 솜씨로 형상화된 얼굴, 빛이 한 형태에 머물지 않고 확산되도록 서서히 엷어지는 명암 처리, 그리고 인물 뒤의 풍경을 감싸고 있는 비현실적인 안개....." 열 걸음마다 관광객을 상대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의 말을 옮깁니다.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도 내 눈에는 입가에 삐죽 내보이는 미소, 오묘한 미소가 보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미소로 또는 우울해 보이거나 슬픔에 젖은 귀부인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설명에 내 마음은 그럴 수 밖에... '그분'을 만나 뵙고 그 따뜻한 어깨에 기대어 설렘과 두근거리는 제 마음을 그대는 아시나요!!
대단하다고 소문 난 그 어떤 것도 막상 와보면 실망하고 만다는 세상의 유명세에 비해서 모나리자와의 만남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나를 압도하는 벅차오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77✕53 센티미터 제작년도는 1503년에서 1506년 사이 작품입니다.
회랑 곳곳에 준비된 루브르 기념품 가게에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소개 책자가 부실해서 영어판 한 권 사옵니다. 그나마 집에 돌 아와서 그 책을 보며 정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유물과 그림을 내 신통찮은 머리는 헝크러져 아무 것도 기억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맑았던 파리는 거짓말처럼 그 사이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버스까지 달려갈 수밖에...
서둘러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주일 미사를 드려야 하거든요. 어저께 부제품을 올렸던 갈멜 신학교로 돌아옵니다. 주일 미사는 몇 분의 유학생 신부님, 부제님과 대성당 지하 "복자 프리데릭 오자남 무덤 경당"에서 드립니다. 오자남 복자가 누구신지 아시는가요?
앙토안느-프레드릭 오자남 Ozanam, Antoine Frederic(1813∼1853). 프랑스의 문학사가, 철학자이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립자의 한 사람이지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별세하셨던 분입니다. 빈첸시오회를 모르는 분이 계시겠습니까만 오자남 복자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감동을 그대는 이해 하실른지. 말이 나온 김에 빈첸시오회를 알고 넘어갈까요? 갑자기 수다스러워진다고요? 제가 바로 빈첸시오랍니다. 흥분 안 하게 됐어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The Society of St. Vincent de Paul)는 프레드릭 오자남과 소르본 대학교의 5,6명의 학생들과 사랑의 딸회 수도자회 로절리랑뒤 수녀에 의해 1833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의 형제, 자매적 단체로서 회원들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기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섬김으로서, 그리스도 사랑을 증거 한다. 세계 131개국에 590.000명 (파리 세계 총 이사회 2001년 9월 말)에 달하는 남녀회원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체이며 회원들은 매주 시간을 할애하여 이웃을 도움으로서 주님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본회는 교황청의 인가와 교권으로서 운영하지요.
그들은 당시의 그리스도적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대적 사조에 대한 응답에 도전함으로 시작하였답니다. 자선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며 성인의 이름을 땁니다. 빈첸시오라는 말은 프랑스말로 '승리자' 라는 뜻인데, 성 빈첸시오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온 세상을 사랑으로서 정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 때 순교하신 분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자그마한 경당, 제대에는 "너희는 서로 사랑 하여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십여 평정도 될까, 좁지만 순교자의 신심이 넘쳐흘러 저절로 경건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미처 몰랐는데 본당 빈첸시오회원이 일러주더군요, 오자남 복자가 바로 빈첸시오회를 창설하신 분이라네요.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걸...제가 바로 빈첸시오 아닙니까. 그날은 제가 몰랐어요. 바보가 아니고 뭐 예요. 의아하시겠지만 프랑스대혁명 때는 왕을 비롯하여 귀족들과 많은 성직자들이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고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민중과 격리된 채로 지배자와 권력에 아부하였던 교회는 민중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 겸손하게 가난한 민중을 향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사무엘 상권,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오늘도 우리를 부르는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주님, 말씀 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던가요? 늘 깨어서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독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부제 서품식에 참석하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리옹 역 근처 한식 집에서 정갈한 김치찌게로 이별의 점심을 나누고 T.G.V 때제베를 타러 갑니다.
이제 루르드입니다. 약 5시간 반 정도 걸리는 먼 거리, 남쪽으로 스페인 접경에 자리한 피레내 산맥을 이고 있는 산촌, 한 가한 시골 루르드가 이제는 때제베가 설 정도로 세계 각국에서 순례자가 줄을 잇는 유명한 성모님 발현지로 거듭 태어난 곳이 아닙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때제베가 지나며 보여주는 프랑스의 한가한 농촌을 구경하며 마음은 벌써 가냘프지만 곱게 생긴 성모님 품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프랑스는 복 받은 나라인지라 차창 밖에 비치는 농촌은 언덕도 드문 평지,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가 시원스레 지나고 있었습니다. 한 눈에도 기름진 옥토임을 알 수 있는 포도밭이며 고호가 그리도 반했던 해바라기 밭과 올리브와 밀밭인가... 우리나라의 5배 크기의 프랑스가 거인처럼 당당하게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답니다.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역을 지날 때는 어둑어둑 해가 진 저녁 때여서 보르도산 포도주 한 잔 기울일 법 했지만 교포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차마 꺼내지 못했습니다. 도시락을 펼치면 김치 냄새가 확 들이칠 건데, 프랑스 사람들이 질겁을 할 걸요.
캄캄한 밤11시가 되어서야 루르드에 도착하여 5분 거리의 호텔로 버스를 타고 갑니다. 비수기라 호텔들은 거의 문을 닫고 쉬임 없이 흘러가는 가부강 물소리가 적막한 루르드를 깨울까 염려 될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반가운 한식 도시락을 글쎄 밤 12시에 방에서 까먹고 마음도 급하게 루르드 성지를 찾아 나섰지요. 캄캄한 밤길, 길가의 까페도 모두 문을 닫아 온통 어두운 데다가 가로등도 드문 밤길을 걷는 우리만의 순례, 호텔에서 내리막길을 5분은 걸었을까 어둠 속에 우람하게 하늘을 찌르는 "원죄없이잉태된자의대성당" 옆으로 돌아섭니다.
오!! 우리를 기다리신 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맞아주시는 성모님, 마사비엘 동굴은 신비로웠고 겨울 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은 나뭇잎 속에서 저리도 고운 어머니, 노뜨르 담, 우리들의 어머님이 잠도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기적의 성수가 나오는 샘에는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샘물이 콸콸 솟아오르고 성모상 앞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촛불 여남 자루가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슴 깊숙이 흐르는 시원한 기적의 성수를 마시며 고향에 온 듯, 어머니한테 안긴 듯 아득하게 밀려오는 달콤한 피로함, 밤을 새워 흘러가는 가부강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고도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그리운 그대여! 순례 길을 떠나서 가장 깊게 잠든 순례자가 보내는 밤 인사를 그대는 들었는가?
피래네산맥, 그 높은 만년설이 녹아 가부 강으로 흘러와서 멀리서 온 순례자의 귓가에 속삭이는 속 삭임, "잘 왔어! 참 잘 왔어... 성모님이 얼마나 널 기다렸는지 모르지? 멀리 돌아 온 길, 이제 성모님 꼭 잡아야지 그럼, 꼭 잡아야 하고말고. 그래, 잘 왔어! 잘 왔고말고...."
루르드의 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비한 밤중에 찾아 마주한 성모님의 인자한 모습을 ...
사족은 루르드의 호텔은 전부 유태인 꺼랍니다. ㅎㅎㅎㅎ 돈 버는 거는 못 말려요. 다음은 루르드 성모님 이야기만 가지고 엮어볼래요. 이제 우리는 파리를 떠나 어머님 품에 돌아왔습니다. 잘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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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떠나며 꼭 들려보고 싶었던 곳이 너무 많아서 어떡하지요. 순례란 단체로 떠난 것이니 다음을 기약해야지만 오르세 미술관하고 샬트르 수도원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또 샹트 샤펠(St. Chapelle) 성당을 꼽을 수 있네요. 루이 9세가 건립한 고딕 양식의 예배당으로 1245년에 착공되어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습니다. 상트 샤펠을 번역하면 성스러운 성당이란 뜻입니다.
중세의 기록 중에 "스테인 드 글라스는 성경이다. 이것의 탁월함 덕분에 진리의 빛이 교회로 들어와서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일 깨워 준다" 는 글도 전해옵니다.
중세의 교회는 조각, 창, 높은 천장 등 온몸으로 신앙을 가르치는 곳이었네요. 사트 샤펠의 15개 창 안에 정확하게 1113개의 에피소드의 성경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루이9세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이 성당에는 건축과 장식보다 더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성물입니다. 숫자를 들어 비교해볼까요. 성당 건축에 4만 리라가 들었지만 성물을 사들이는데 13만 리라가 들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생트 샤펠을 지은 이유가 애써 수집한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사들인 성물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조각, 예수님이 죽을 때 쓰고 있었다는 가시관 등 여럿이었는데 아쉽게도 프랑스대혁명 때 모두 사라졌습니다. 루이9세는 십자군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했는데 진중에서 병사했다지요. 훗날 성인으로 추대되었답니다. 개인적으로 이 성당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데요, 이유는, 이 성당을 들어가서 왼쪽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를 제외한 세 면 전체가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으로, 너무나 정교하고 훌륭해서 "파리의 보석" 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모습을 보면, 너무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나올 정도입니다. 장미창과는 달리 건물 뼈대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스테인 글라스라고 생각해보세요. 특히 오후에 가면, 밝은 태양빛을 받은 스테인 글라스에서 붉고, 푸른색들이 선명하게 투과되어 눈이 부십니다. 파리에 가면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미술책에서 접할수 있는, 인상파, 낭만파 화가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에 오를레앙 철도의 종착역으로 세워진 역사(驛舍)를 그대로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식사" 고호의 “자화상” “피리 부는 소년”, 놀라지 마시라, 저 유명한 밀레의 “만종(L'Angelus)“과 “이삭 줍기(Les Glaneuses)“ 가 있습니다. 유럽 출장을 갈 때면 대개 볼일은 스위스 츄리히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런던에서 현지 지점 직원들하고 고객을 만나거나 로드쇼에 참석하고마는데 휴일이나 틈을 이용해서 파리나 피렌체와 밀라노, 이태리의 조그만 시골을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오는데 그것도 본 거라고 여행기를 쓸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위에 적은 곳은 꼭 둘러보시라고 권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처한 환경에 따라서 둘러봐야할 곳은 다르겠지요.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자리에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있고 넓다란 광장이 있습니다. 또 콩코르드 광장(Palace de la Concorde)은 어떻고요. 동서 360m, 남북 210m의 네모꼴로 파리 시 내 최대의 광장입니다. 남쪽으로는 센강을 바라보면서 콩크르드 다리를 통해서 건너편의 하원의회와 통하고 북쪽은 루아얄로 뻗어서 마들렌 성당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동쪽은 튈르리 정원을 통해서 루브르 박물관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와 통합니다. 이 광장은 프랑스 혁명 중에 기요틴(단두대)이 설치되어 루이 16세, 마리 앙트와네트를 비롯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처형된 곳으로 더욱 유명하지요. 젊었더라면 이곳을 우선적으로 달려갔을 거고 그 감동을 올렸을 테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순례에만 마음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이제 우린 파리를 떠납니다.
여행이란 낯선 곳을 찾아가는 거라지만 루르드로 가는데 이상하리만큼 포근한 기분, 고향집으로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기다리시기 때문이겠지요. 그리웠던 어머니를 만난 기쁨, 설레임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