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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636)의 치욕을 견디고 중국의 심양으로 끌려가 인질로 지내야만 했던 봉림대군은 귀국 후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세자로 책봉된 뒤 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로 등극한다. 인질로 잡혀 있는 기간 동안에도 서양의 발달된 기술에 관심을 보였던 소현세자의 죽음은 역사학계에서도 여전히 의문에 쌓여있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포함한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인조의 의도가 관철된 것으로 해석하는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고 하겠다. 형인 소현세자와는 달리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실현 불가능했던 이른바 ‘북벌론(北伐論)’을 재위 기간 내내 내세운 것도 결국 정통성이 취약한 효종으로서는 대신들의 뜻에 영합한 것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재야의 인사들을 중용한다는 명목으로 대거 조정에 진출한 산림(山林)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에 의해 이른바 ‘산당’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송준길과 송시열 등 ‘양송’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당시의 정치 현실은 명분론에 치우쳤다고 평가되며, 명분에 집착한 행태는 후에 이른바 ‘예송논쟁’으로 세력 다툼의 장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효종이 죽은 후 윤선도와 송시열 사이에 펼쳐진 ‘예송(禮訟)’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리 결정되면서, 남인 혹은 서인 세력들의 몰락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효종은 재위 10년 만에 종기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현종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부왕인 효종의 상복을 둘러싼 ‘예송논쟁’으로 시달리게 된다. 이미 장자인 소현세자가 장자로 죽어 차자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위치를 ‘대통을 이은 왕’으로 보는가, 아니면 ‘둘째 아들이면서 왕’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실상 상복을 입는 것은 단순한 문제였으나, 그것이 둘째 아들이라는 입장의 노론과 대통을 이은 왕이라는 남인 사이의 명분 싸움으로 전개되었기에 논의의 방향에 따라 상대방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차 예송에서는 노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윤성도가 유배를 가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송시열이 사사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 유배되었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시대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소현세자가 죽은 이후 봉림대군(효종)이 세자로 되면서 자연스럽게 세손이 되었고,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치세 동안 남인과 노론 사이의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로 인해 각 정파 사이의 세력 균형을 꾀하는 탕평책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평가된다. 이후 제대로 운영된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조선 후기 정치적 명분인 탕평책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해된다. 재위 기간 내내 종기로 고생하면서 자주 온천을 찾았으며, 이 책의 저자는 현종의 치세를 ‘곤욕의 세월, 재난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효종이 시행하였던 대동법을 전라도 지역까지 확대하여, 이후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예송논쟁과 자연 재해가 극심했던 그의 치세 동안 나름 균형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현종은 재위 15년 만에 3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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