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의 시 읽기
POETRY Review
진혜진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를 읽다 _ 김송포
정다연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읽다 _ 서요나
진혜진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를 읽다 _ 김송포
빗방울 랩소디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피날레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 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진혜진 시인의 ‘포도에서 만납시다’를 읽고
김송포
진혜진 시인의 시집 제목을 본 순간, 포도 같은 여자, 포도 알 같은 상큼함이 떠올랐다. 제목이 ‘포도에서 만납시다’ 포도밭에서 만나자는 건가. 포도 알 같은 상큼 향을 낸다는 것인가. 알 듯 모를 듯 그녀의 시를 따라 가본다. 포도는 하나의 알로 이루어진듯하지만, 송이로 넝쿨로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쌓아야 몸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씨를 품고 알알이 태어난다. 우리의 시간도 오래 깊을수록 묵을수록 뜨거워지고 색깔도 향도 짙어지는 것처럼, 그녀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지만 사랑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들려는 과정을 담고 있다. 떨리는 음색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로 전하는 문장의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안다. 하나하나 송이 같은 글자를 두고 이것일까 저것일까. 고민하며 선택하는 갈림길에서 시적인 표시가 적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못다 한 언어를 향한 따스한 순간이 시류를 통해 다가오고 있음을 시집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빗방울 랩소디는 하나의 물방울이라도 스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녀의 세심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산은 비가 왔을 때 몸을 가려주는 천막이 되기도 하고 안심의 도구이기도 하다. 예기치 않을 때 오는 비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진혜진 시인은 감옥이 된다고 했다. 비가 갑자기 쏟아질 때, 막막해질 때 누가 옆에 다가와 우산을 받쳐주는 장면을 흔히 생각 한다. 비는 눈물이라고 하여 대신 울어주기도 한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역설의 문장으로 바꿔 쓰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이 된다는 어법을 쓰고 있다. 그 안에 갇혀 있을 때 수감의 몸이라고 표현을 한다. 귀걸이 팔찌 모두 귀찮을 존재로 부각이 될 때, 우리가 소나기를 맞을 때, 기분을 느끼며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에 주목하여 자신의 심정을 두드리고 있다.
빗방울에게 하소연하듯 당신의 가면을 벗어 보시죠. 이렇게 흠뻑 젖어도 당신은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실 겁니까. 원망의 마음을 적어간다. 삶의 현장에서 수도 없이 상실감이 있지만, 시작하지 않고 끝내려는 우수를 아시나요. 미움과 상처는 누가 누구에게 손을 내밀어야 끝이 난다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이에 질주하는 차는 빗방울 튕기며 사라지고, 잠시 미워했던 마음을 용서로 바꾸고, 비는 감옥이 아니라 바깥세상으로 나가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우주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광시곡의 빗방울로 변해 있다. 빗방울을 로맨틱이 아닌 이지적인 냉철함으로 바라보고 있으나 결국 악곡의 장르처럼 랩소디로 마무리 지으며 자신을 가다듬는 모습이 성숙하게 다가오는 시로 스며들었다.
김송포
2013년 《시문학》 등단
시집 『부탁해요 곡절 씨』 『우리의 소통은 로큰 롤』
정다연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읽다_서요나
흑백필름
정다연
그때 너와 나는 영화의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했지
반복되는 여진과 정전, 부서질 듯 떨리는 유리컵은
주인공의 불안이나 재난 이후 더 어두워진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부르르 떨며 날아가고 있다는 것 -
순서대로 입장을 마감합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서울식물원에서
왜 돈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늦길 잘했어
반성했지
리아트리스 알로카시아 루테아
유리 온실에서 자라는 온화한 식물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
너와 나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자
다짐했었는데
요즘은 이곳보다 편안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밤과 약을 잘 챙겨 먹고 어느 때보다도 건강해 -
선량한 어른이 되었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사람을 비껴가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고
이제 어디서든 고함을 지르지 않아
해치도록 허락된 것만 해치고
가끔은 넘치게 기부를 하지
그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어
중요한 것은 보지 못했던 식물의 이름이나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질서, 어른들의 말이 아니었고
때로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어야 했다는 것
길을 막아서고
잠깐만 시간을 내주세요 들어주세요 말했어야 했다는 것
한걸음도 포기해서는 안 됐다는 것 -
이제 나는 너와 찍은 사진을 열어보지 않아
봐도 아프지 않기 때문이지
가끔은 곤두박질, 세상이 다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해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
지진이 아무런 피해도 남기지 않고 이곳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
그때 나는 왜 추위에 떨던 네 모습만 떠올렸는지
춥도록 단일해지는 주체들의 공동체
- 정다연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속 「흑백필름」 시평
서요나
정면에서 마주 본 우리의 육신이 좌우 대칭의 형태를 띠듯이, 영혼은 서로 다른 두 성질로 대칭되어 한 몸에 깃든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지진이 흔들 수 있을 만큼의 깊이로 세계에 붙박인 쪽과 흔들 수 없을 만큼의 높이로 허공에 부유하는 쪽으로서.
세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 영혼이 태어난 출구가 있다면 이는 한 쌍의 대칭 중에서 어느 쪽을 향해 따라가게 될까.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속으로 느리게 빨려 들어가는(혹은 되돌아가는) 세계의 우리가 아직은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때 ‘반복되는 여진과 정전’에 떨리는 건 어느 쪽의 영혼일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바치는 일은 둘 중 어느 쪽의 명을 내어주는 공동체 운동일까에 대해서.
어떤 ‘재난’은 나의 ‘불안’과 ‘삶’을 빗겨 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들이받아 뒤흔든다.
그건 미생물의 색깔 한 점도 비춰줄 수 없는 흑백영화 속 무채색의 세계를 우리가 여전히, 모든 것이 꺼지고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만이 끌고 가는 세상을 우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의 사람만이 나를 어른으로 만든다.
여기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세계로 횡단해 가지 않고도 ‘법 없이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자’고 서로를 향해 맹세하는 뜨거운 관성이, 따뜻하고 ‘편안한 곳’으로 달궈주는 화학적 원리의 공간이다.
화학의 시간에서 횡단은, 즉 성장은 하나의 폭발, 즉 사고이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시드는 종으로 태어나 함부로 사랑받으면 터져 버리는 인간으로 자라간다.
그건 ‘때로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어야 했다는 것 / 길을 막아서고 / 잠깐만 시간을 내주세요 들어주세요 말했어야 했다는 것’, 그런 아득한 아쉬움을 안고 멀어지다가 ‘가끔은 곤두박질, 세상이 다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 도착하는 일이다.
한 쌍의 대칭을 갖고 태어나 왼손, 혹은 오른손잡이로 자라는 성장의 역사처럼, 무뎌져가는 한쪽 손처럼, 그 어떤 재난도 들이받지 않는 절반 치의 영혼만이 남고 ‘지진이 아무런 피해도 남기지 않’는 몸으로 건축된 이곳에서, 기수가 사라진 말과 같이 세계는 어딘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위하여 달려간다.
오늘의 거리는 ‘돈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식물원 내부의 식물들 같은 객체성 안으로 우리를 집어삼킨다.
화폐의 소유자 없는 화폐가 일사불란하게 작동시키는 여기 이 차원이 목적지도 없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나의 사람은 흑백필름처럼 잔류하는 것이다.
당신은 한 장의 화폐를 교환하는 행위에도 대체되지만, 식물들의 이름을 짓고 불러줄 수 있는 유일한 주체다.
주체는 주체라고 불러줄 차원이 사라지고 난 시간에서도 주체의 기관을 잃지 않으며, 세계는 그 몸에서 점점 빠져나가고 당신은 이제 영원히 추워지는 사람이다.
나의 인간은, 나의 사람은 언제나 ‘추위에 떨던’ 사람이다.
서요나
2018년 계간 《페이퍼이듬》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물과 민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