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慰禮城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기전향토문화연구회 임종삼
위례성이냐 위예성이냐?
우리말 문법에 따르면 백제 慰禮城의 소리 값은 위예성이다. 그런데도 학계에서는 慰禮城의 음가를 위례성으로 읽고 적는다. 삼국시대에도 백제 慰禮城의 우리말 소리 값이 위례성이었을까? 1980년에 고쳐 만든 한글맞춤법을 보자.
제5절 머리소리 법칙 제11항, 한자음의 [랴, 려, 료, 류, 리, 례]가 낱말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야, 여, 요, 유, 이, 예]로 적고, 그 밖의 경우에는 본디 소리대로 적는다.
한자 禮의 대표음은 ‘예도 예’이다. 예기, 예절 등의 예가 우선이다. 그 다음이 제례, 상례 등의 ‘예도 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慰禮城을 위례성으로만 읽는다. 삼국사기를 역주한 이병도의 표기를 그대로 따른다. 그를 식민사관 학자로 비난하면서도 그가 역주한 표기를 그대로 쓴다.
제5절 머리소리 법칙 제11항 [붙임], 다음과 같은 말은 둘째 소리마디의 [ㄹ]이 준 것을 인정한다. 홀소리나 [ㄴ] 받침 뒤에 오는 [렬, 률]은 [열, 율]로 표기한다.
위의 문법으로도 慰禮城의 소리값은 위예성이다. 禮가 홀소리 ‘위’ 다음에 오기 때문이다. 나열과 대열, 규율과 운율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병도의 표기를 그대로 따른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 기록한 사학자 이병도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 있을 때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다.[2]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처남이며,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 문화재청장 이건무는 그의 손자이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추구하여 한국근대사학이 성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3]
백제는 하남(河南)과 한산(漢山)에 정착한 백가(百家)의 세력이다. 고구려에서 패수(浿水,예성강)와 대수(帶水,한강하류)를 건너 남하한 비류와 온조의 세력이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는 각기 해빈(海濱) 미추홀(인천)과 하남(河南) 위례성(직산)에 터를 잡았다. 마한 연맹체의 맹주인 마한 목지국 진왕의 동의를 구하고 도움을 받았다. 이후 백제 온조왕은 하남(河南,충남직산) 慰禮城을 한산(漢山,경기,서울) 慰禮城으로 옮기고 국성 한성(漢城)을 세웠다. 백제 온조왕이 하남 慰禮城을 한산 慰禮城으로 옮긴 것은 BC 5년 병진년 온조왕 14년이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전하는 천도(遷都)의 내용은 같다.
온조왕 13년 2월,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7월에 한산(漢山,廣州)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하고 강역을 확정하였는데 북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은 웅천(熊川)에 한하며 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은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는 성궐(城厥)을 세웠다.
14년 정월에 천도(遷都)하였다.
국명 백제(百濟)에서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세력의 규모가 파악된다. 패수(예성강)와 대수(한강하류,임진강)를 건너 해상으로 남하한 이들의 수효는 약 1백가(家)였다. 학자들의 견해에 차이가 있지만 1백가에 딸린 인원은 약 700명으로 본다. 국명 백제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의미를 따서 명명한 것으로 농촌경제학자 김성호 씨는 주장하였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세력을 받아들인 것은 마한이었다. 마한 세력은 하남(河南,충남직산)과 미추홀(仁州,경기인천)에 터를 잡으려는 이들의 도읍을 방해하지 않았다. 마한 54국의 하나인 백제(伯濟)로 받아들여 배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백제(百濟)는 수천의 기병을 양성하여 한반도 중남부의 선주민인 마한 53국을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마한)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 이어 마한 53국을 지방 분권화하여 영주로 임명하고 백제의 속민으로 삼았다. 이들이 바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討(토)한 利殘(이잔)이다. 백잔(百殘)을 돕는 이잔(利殘)이었다.
BC 18년, 백제 온조왕은 하남(河南,직산)에 위례성을 세운다. 기원전 18년에 세운 백제의 초도 하남 慰禮城은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이었다. 경기도 광주군 산성면이 아니었다. 유사 이래 경기도 광주군의 지명은 한산(漢山)이었고 충청도 직산읍의 지명은 하남(河南)이었다. 천안시 성환읍 군서리에 백제의 시조를 추모하는 온조왕사가 있다.
한산(漢山)이 경기, 서울이고 하남(河南)이 직산이라는 사실은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 신라구주군현총도가 증명한다. 신라구주군현총도는 현재의 경기도 광주와 서울을 한산(漢山)으로 기록하고 경기도 평택을 하팔(河八)로 기록하는 것이다. 청구도 신라구주군현총도의 하팔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경계하는 안성천을 가리킨다. 안성천, 진위천, 황구지천 등을 비롯한 8개의 하천이 흐르는 땅이어서 하팔이었다. 안성천의 북쪽인 경기도 평택은 하북(河北)이었고 안성천의 남쪽인 충청도 직산은 하남(河南,)이었다. 지금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하북리에는 하남(河南)의 짝꿍인 하북(河北)이 살아있다. 안양시 범계와 평택시 하북을 오고가는 경기시외버스 300번 노선에 그 근거가 남아있다.
삼한 최고 최대의 저수지는 전라북도 김제의 벽골제이다. 삼국시대 우리말 이름 벽골(碧骨)의 음가는 ‘벼고을’이다. 우리말 벼 고을의 한자 표기가 벽골(碧骨)이다. 이를 부정하는 국내의 한글학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백제의 초도 하남 慰禮城과 백제의 두 번 째 도성 한산 慰禮城을 위예성으로 읽고 써야 한다. 필자는 그 위치를 충청도 천안시 입장면의 慰禮山城과 경기도 광주군 산성면의 南漢山城으로 본다. 위례산성에는 하늘에 제레를 올리던 팔각석축과 온조우물이 남아 있고 남한산성에는 온조왕사와 온조우물이 남아있다.
필자는 위예성을 산위에 세운 도성(궁성)이라는 백제의 표기로 본다. 평지가 아닌 산위에 세운 궁성으로 본다. 북부여에서 남하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성산(西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上而建都)’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에 따른다. 그러므로 위레성이 아니라 위예성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