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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대외 관계의 변화
Ⅰ. 10~12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1. 송나라의 통일과 북방 유민목민족의 대두
가. 5대 10국의 혼란 수습
후주(後周)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은 당나라 멸망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960년 송(宋)을 건국했다. 송은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문치주의의 결과 송은 국방력이 쇠락했다.
5대 10국
오대십국 (五代十國) | 오대(五代) | 후량(後粱) | 907년 ~ 923년 |
후당(後唐) | 923년 ~ 936년 | ||
후진(後晉) | 936년 ~ 946년 | ||
후한(後漢) | 947년 ~ 950년 | ||
후주(後周) | 951년 ~ 960년 | ||
십국(十國) | 오(吳), 전촉(前蜀), 남한(南漢),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북한(北漢) | 902년 ~ 979년 |
나. 북방 유목민족의 대두
거란(契丹, 遼[요]. 916~1125년), 여진(女眞, 금[金], 1115~1234년), 몽골(蒙古, 1206건국 원 1271~1368년)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북방의 유목민들은 중원의 한족을 압박했다.
2. 고려의 대응
지배층의 성향에 따라 북방민족에 대한 대응이 달랐다.
대 거란(契丹)정책 | 건국 초기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굳건히 대처했다. |
대 여진(女眞)정책 | 문벌 귀족정치가 무르익으면서 유약한 사대주의를 취했다. |
대 몽골(蒙古)정책 | 무신 집권으로 항쟁을 고수했다. |
Ⅱ. 거란(契丹)과의 관계
1. 고려의 거란정책
가. 거란의 성장
오랫동안 당나라 지배하에 있던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엘뤼아 빠오지)가 제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 대거란국(大契丹國)을 세우고 926년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937년에 국호를 요(遼)라고 하였다.
나. 고려의 대응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태조 25년 942년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바쳤으나 태조는 거란인은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사신은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굶어죽게 하였다.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光軍)을 조직하는 등 송과 친교를 맺고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2. 거란의 침입
가. 목적
거란은 장차 있을 송나라와의 대결을 대비해 고려를 견제함으로써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거란과 충돌하였고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0이 있어서 여진인을 사신으로 삼아 송과 통하고 거란과는 적대시하였는데 이것 또한 거란을 자극하였다. 거란은 정안국을 멸하고 성종 10년 991년에 압록강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여진인과 송과의 교통을 끊었다.
나. 과정
침입 | 내용 |
1차 침입(성종 12년 993년) | 동경 유수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으나 중군사 서희(徐熙)의 담판[상군사 시중 박양유, 중군사 내의시랑 서희,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으로 거란은 퇴각하고 강동 6주(흥화진[興化鎭, 義州]. 용주[龍州, 龍川], 통주[通州, 宣川], 철주[鐵州, 鐵山], 귀주[龜州, 龜城], 곽주[郭州, 郭山])를 차지할 수 있었다. |
2차 침입(현종 원년 1010년) | 강동 6주 요구와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김치양(金致陽) 일당을 멸한 뒤 현종(顯宗)을 옹립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요의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다. 행영도통사 강조[부장 이현운, 장연우]는 적을 가볍게 보고 패배하여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피살되었고 흥화진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刑部郎中) 양규(楊規),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羲令) 장경(張顥)과 서경을 지켰고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갔다. 양규는 거란과 전투중 전사했으며 거란은 보급로 차단을 두려워하고 별 성과가 없자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물러났다. |
3차 침입(현종 9년 1018년) | 고려왕의 입조 회피와 강동 6주 반환을 구실로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와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시달리다가 퇴각하는 거란군을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생존자는 수천에 불과했다. |
다. 결과
현종 10년 1019년 고려와 거란은 강화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거란 침공 이후 고려는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덕종 2년 1033년부터 정종 10년 1044년간에 걸쳐 압록강 입구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 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Ⅲ. 여진과의 관계
1. 건국 초기의 고려의 여진정책
가. 여진의 존재 형태
여진은 고조선과 고구려시대 숙신(肅愼), 삼국시대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고려시대 여진(女眞), 조선 초기 야인(野人), 조선 후기 만주족(滿洲族) 등으로 불렸다. 여진은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있다가 발해 멸망 이후 부족 단위로 생활하였다.
나. 여진에 대한 회유책과 동화정책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에 귀화 투항에 오는 여진인(向化人, 投化人)들을 자치주를 통해 다스렸다.
2.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
가. 여진의 성장
여진은 추장 우코내(烏古迺)의 아들 영가(盈歌), 손자 우야소(烏雅束, 영가의 조카) 등의 추장이 나타나 완안부(완옌부,完顔部)가 여진족을 통합했다. 숙종 9년 1104년부터 고려는 여진과 정면으로 부딪쳐 임간(林幹), 윤관(尹瓘) 등은 정주성에서 완안부에게 대패했다.
나. 동북 9성 개척
숙종은 윤관의 신기군(神騎軍, 귀족으로 구성된 기병), 신보군(神步軍, 양인(白丁)으로 구성된 보병), 항마군(降魔軍, 승병으로 조직된 군)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 편성의 건의를 받아 들여 여진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 예종(睿宗) 2년 1107년 도원수 윤관(尹瓘, ?~1111)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은 17만명을 이끌고 여진을 정복하여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인의 끊임없는 침략과 애원 및 일부 윤관에 대한 시기 등이 작용하여 개척한지 1년만에 9성은 여진에게 반환되었다.
3. 금의 건국
가. 금의 건국
9성을 돌려 받은 여진은 아구타(阿骨打, 우야소의 동생)에 의해 더욱 강성해져 예종 10년 1115년 금(金, 1115~1234)을 건국하였다.
나. 금의 성장
금은 1125년 거란(契丹)을 멸망시키고 송(北宋)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시켰으며 고려에 대해서도 군신관계를 요구하여 고려는 인조 4년 1126년 이자겸이 주장으로 수용했다.
다. 금의 멸망
6대 장종(章宗. 완안경(完顔璟))은 중국 문화에 정통했지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데다 황하 범람과 몽골계 유목민이 침입해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실지 회복을 노리는 남송의 도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제7대 위소왕(衛紹王. 완안윤제(完顔允濟))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제8대 선종(宣宗. 완안순(完顔珣)때인 1214년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변경으로 옮겼지만, 한인과 불화가 깊어져 더욱 혼란에 빠졌다. 제9대 애종(哀宗. 완안수서(完顔守緖))은 변경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황태자 제10대 말황제(末帝. 완안승린(完顔承麟))도 반나절만에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은 10대 119년 만에 멸망했다.
Ⅳ. 송과의 관계
1. 양국의 접근 목적
가. 고려의 목적
고려는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 송나라의 목적
군사적, 정치적 목적에서 고려에 접근했다. 송나라는 고려가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공을 막아내자 그 국력을 높게 평가했고 고려의 군사력을 통해 거란(요)과 여진(금)을 견제하려 했다.
2. 양국의 교역
가. 공식적 교역(공무역)
조공품과 회사품의 형식으로 교역했고 거란과 여진의 방해로 공식적인 사신교류는 어려웠다.
나. 비공식적 교역(사무역)
비공식적인 상인의 교류는 북방 민족의 방해 속에서도 활발했다.
Ⅴ. 몽골과의 관계
1. 몽골과의 접촉
가. 몽골의 성장
거란과 금나라에 예속되었던 몽골은 징기스칸(Genghis Khan, 成吉思汗, 鐵木眞, 테무친, 위 1206∼1227)의 등장으로 1206년 건국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27년 서하, 1234년 금,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나. 여몽의 거란 격퇴(강동의 역)
1219년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거란을 고려, 몽골 및 동진국이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격퇴시켰고 몽골은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2. 몽골의 침입
가. 원인
몽골은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고려와 사이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몽고 사신 제구유(저고여, 著古與)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천필, 모시 2천필, 종이 10만장을 강요하고 귀국 도중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9차에 걸쳐 침입하였다.
나. 경과
몽고의 침입(대몽항쟁)
구분 | 연대 | 장수 | 구실 | 경과 |
1차 | 고종 18년 1231.8~1232.3 | 살리타이(撒禮塔) | 고종 12년 1255년 著古與(저고여, 제구유) 피살사건 | 서북면 마산 동산역 및 관악산 초적 활동 72명 다루가치(達魯花赤, 단사관) |
서북면병마사 朴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정주분도장군 金慶孫 자주성 성주 崔椿命 | ||||
2차 | 1232.8~12 | 살리타이(撒禮塔), 반장 홍복원(洪福源) | 1232년 6월 16일 강화천도(참지정사 유승단,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처형) 반대) | 처인부곡 白峴院(자현원) 승려 金允侯살리타이(撒禮塔) 살해. 용인현으로 승격돠고 김윤후 (상장군→攝郞將) 임명.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 다루가치 축출 |
승병 金允侯 | ||||
3차 | 1235.7~1239.3 | 탕쿠(唐古, tanggu, 당올(唐兀), 당올태(唐兀台), 당올대(唐兀臺)),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룍환도 | 전주, 경주까지 칩입. 황용사9층목탑 소실 |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 | ||||
4차 | 1247.7 | 阿母侃(아무간),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과 국왕친조 | 价州・竹州에서 몽고군 대파 |
충주산성 方壺別監 김윤후 | ||||
5차 | 1253 | 지라타이(車羅大) | 충주노예 활약. 김윤후 攝上將軍 승진. 충주 國原京 승격 | |
김윤후 | ||||
6차 | 1254.7~1255.2 | 지라타이(車羅大) | 충부부근의 다인철소 | |
7차 | 1255.8~1256.10 | 지라타이(車羅大) | ||
8차 | 1257.5・10 | 지라타이(車羅大) | ||
9차 | 1258.6~1259.3 | 지라타이(車羅大) | ||
홍대순(洪大純)-홍복원(洪福源)-홍다구(洪茶丘)
원간섭기(1270∼1351)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3. 개경 환도와 강화
가. 최씨 정권의 몰락
온건파인 김준(金俊)과 류경(柳璥)이 최의(崔竩)를 타도하고(무오정변, 戊政變)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나. 무신정권의 최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살해하여 무신정권의 막이 내렸다.다. 개경 환도
원종 11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9년간의 강화도 시대가 막을 내렸다.
4. 삼별초(三別抄)의 저항(1270~1273년)
가. 배경
삼별초(三別抄)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무인들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지고 다시 몽고와의 항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가 도망쳐 온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한다. 삼별초(三別抄)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이며 대몽항쟁의 중심부대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었다.
나. 과정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개경환도가 발표되자 즉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喜)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항몽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1270.6~8월)에서 진도(1270.8.19~1271.5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로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이 다시 진도에서 제주도(1271.5~1273.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제주가 함락하여 항쟁은 끝났다.
다. 의의
고려 무인의 대몽고 항쟁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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