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15년 정해년 3월 17일(병오)
맑음. 산예(狻猊)를 지나 금교(金郊)에 도착하였다. 평산(平山)에 머물러 묵었다. 평산부사(平山府使) 이군미(李君美)[直彦]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의침(趙義琛)이 찾아왔다. 서장관(書狀官) 원언인(元彦仁)[士安]과 함께 술을 대작하며 시를 수창(酬唱)하였다.
晴 過狻猊 到金郊 留宿平山 府使李君美來話 趙義琛見方 與書狀官元彦仁 酌酒酬唱
▶ 수창(酬唱) :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
만력(萬曆) 15년 정해년 3월 18일(정미)
맑음. 흥의(興義)를 지나 평산(平山)에서 묵었다. 김수걸(金秀傑)이 서쪽에서 왔기에 가서(家書)를 부쳤다. 문상경(文尙敬), 문상례(文尙禮), 이엽(李曄)이 전별하러 왔다. 광문(廣文) 이세보(李世保)가 와서 정담을 나누었다.
晴 過興義 宿平山 金秀傑自西來 以家書付之 文尙敬 文尙禮 李曄來餞 廣文李世保來敍
▶ 평산(平山) : 17일에 평산이 나왔으므로, 서흥(瑞興)의 오류로 보임.
▶ 가서(家書) : 자기 집에서 오거나 자기 집에 보내는 편지. 가신(家信).
▶ 광문(廣文) : 유학교관(儒學敎官)을 이르는 말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당시에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처지로 살아가던 정건(鄭虔)을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로 삼았다. 그러자 두보(杜甫)가 〈취시가(醉時歌)〉에서 “여러 공(公)은 줄줄이 높은 관직에 오르지만, 광문 선생은 벼슬이 유독 한미하네. 명문가 사람들은 흔히 산해진미도 싫어하지만, 광문 선생은 자신이 먹을 밥도 부족하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 甲第紛紛厭梁肉 廣文先生飯不足]”라고 하며 정건을 높여서 ‘광문선생(廣文先生)’이라고 불렀다. 이후로 재주는 뛰어나지만 불우하게 사는 유학교관을 흔히 ‘광문선생’이라고 칭한다. 《新唐書 卷 2020 文藝列傳》
《국역 배삼익 조천록》 p148 ~149,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