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등
외인촌
추일서정
설야(雪夜)
장곡천장에 오는 눈
눈 오는 밤의 시
은수저
다시 목련
향수
뎃생
海邊가의 무덤
등
김광균 시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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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김광균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 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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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촌 / 김광균
하이얀 모색(慕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에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와사등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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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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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선일보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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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천장에 오는 눈
찻집 미모사 지붕 우에
호텔의 풍속계 우에
기울어진 포스트 우에
눈이 나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 소음의 호수 잠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우에
낡은 필림 같은 눈이 나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나리는 눈발이 속삭인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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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의 시 / 김광균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
이 밤 내 조그만 그림자 우에 눈이 나린다.
눈은 정다운 옛이야기
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
좁은 길에 흩어져
아스피린 분말이 되어 곱-게 빛나고
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
그 우를 지나간다.
눈은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
고독한 도시의 이마를 적시고
공원의 동상 우에
동무의 하숙 지붕 우에
카스파처럼 서러운 등불 우에
밤새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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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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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목련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니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내리더니
목련은 한 잎 두 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 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 볼까
임진화 / 범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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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매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류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 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오기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떨기 들국화 처럼 차고 서글프다
시집 ; 와사등(瓦祈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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뎃생 / 김광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조선일보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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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邊가의 무덤
꽃 하나 풀 하나 없는 荒凉한 모래밭에
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 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며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黃土 무덤 위에 한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 잠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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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燈)
벌레 소리는
고운 설움을 달빛에 뿜는다.
여윈 손길을 내어젓는다.
방안에 돌아와 등불을 끄다.
자욱--한 어둠 저쪽을
목쉰 기적이 지나간다.
비인 가슴 하잔히 울리어논채
혼곤한 벼개머리 고이 적시며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위에
차단--한 내 꿈 위에
밤새 퍼붓다.
와사등 / 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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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 시인 소개
1914. 1. 19 경기 개성∼1993. 11. 23 서울.
시인.
신석초, 서정주 등과 《자오선》, 《시인 부락》 따위의 동인지에서 활약하였다.
온건하고 회화적인 시풍을 나타내 193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임진왜란》 따위가 있다.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고 이론화된 모더니즘 시론을 주조로 하여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착에 이바지했다. 송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산과 용산 등에서 공장 사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병〉(동아일보, 1929. 10. 19)·〈야경차〉(동아일보, 1930. 1. 12)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 쓴 시 27편을 모아 제1시집 〈와사등 瓦斯燈〉(1939)을 펴냈다. 8·15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관계하면서 이념 대립을 지양하는 '제3문학론'을 내세웠으나, 곧 문단을 떠나 사업에만 열중했다. 8·15해방 이전까지 쓴 시 19편을 모아 제2시집 〈기항지 寄港地〉(1947)를 펴냈다. 6·25전쟁 이후 건설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제3시집 〈황혼가〉(1957)를 펴냈다.
당대의 비평가 김기림·백철이 "청각조차 시각화하는 기이한 재주", "무형적인 것을 유형화하는 능력"으로 평가했듯이 그의 시는 현대문명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언어의식 및 회화적 이미지 같은 모더니즘론에 근거했다.
그의 시는 자신이 꾸며낸 세계와 상상력에 의한 사물 제시보다 정서적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시적 구조에 있어 공간성을 긍정하고 도시 문명의 혼란 속에서 현대성을 찾는 시어를 사용한 특징을 가진다. 특히 본격적인 의미의 모더니즘 시보다는 독특한 의미의 이미지즘 시를 보여주었는데, 그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간적 형식의 탐구로 현대 문명이 음악적 본질보다는 회화적 본질, 즉 추상보다는 구체, 청각보다는 시각으로 조직된 까닭에 문명의 탐구는 공간적 이미지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공간성은 자연과 문명 등 시간적·지리적으로 단절된 이중구조로 나타난다. 둘째, 대상을 시각적·회화적 이미지로 한정해야만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색채감각어를 자주 썼다. 이미지를 감각적 형태에 응결시키고 사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정밀하게 한정하는 태도는 서구 이미지즘 시의 창작원리를 따른 것이다. 셋째, 그는 감상적 정서의 표출로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감상이 아닌, 객관화되어 특정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감상성은 주로 회복되지 않는 과거 및 실향의식으로 나타나 단절된 역사의식이나 현대 문명에 대한 소외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적 체험과 동떨어진 몽롱한 분위기를 강조해 모더니즘의 미학적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과거와 현실 사이의 불연속, 단절감에서 비롯된 감상성은 시 구조상 이질적인 공간 구조를 형성했지만 T. E. 흄이 제시한 불연속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다. 또 문명비판의 태도 역시 전통과 역사의식에 의거한 문명의 재생을 바탕으로 하는 T. S. 엘리엇의 문명관과 다르게 소외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모더니즘 시로서 그의 시의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