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餘白 - 신석정
항상 찬란한 태양이 굽어보는 곳에는 혈압이 높은 척추동물들이
모여서 살아왔다
그렇게 소중히 여겨오는 역사란
이 동물들의 원시적 표정과 포호와
포호애서 발생한 투쟁을 장식한 한 장의 하잘것없는 사망진단서
의 축복이다
아예 이 허망한 진단서에서
너의 청춘과 애정과
빛나는
설계와 드높이 찬양할 죄와 벌의 기록일랑 찾지 말라!
이렇게 비좁은 지군데도
저 너그러운 태양이 포기한 지역이 있어
그 어둔 풍토에서 마련되는 풍속을
도시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
여백이 있는 것이다
- 1955
신석정 시인의 <여백>은 문명사적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인간 중심의 역사와 '찬란한 태양'으로 상징되는 주류 문명을 비판하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소외된 공간과 삶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세속적인 문명사의 허무함을 비판하고, 기록되지 않은 소외된 공간(여백) 속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신석정 시인은 과거의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시풍에서 벗어나,
문명의 비정한 속성을 통찰하는 모더니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여백'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투쟁이 멈춘 곳,
자연과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구원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할 점:
이 시를 감상하실 때, 시인이 말하는 '여백'을 '무기력한 곳'으로 보지 않고,
'도심의 투쟁적 삶에서 벗어나 비움을 실천하는 정신적 안식처'로 이해하시면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