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성(竹醒) 정은교(鄭誾敎)
樂民 장달수
늦겨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날 아침, 까꼬실 마을이라고 불리는 귀곡에 들어가기 위해 진양호 선착장에 나갔다. 아직 배가 도착하지 않아 선착장에 새겨진 ‘망향’ 이란 시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을은 저 물을 딛고 오르지 못하고 이리/사람 가슴에 들어와 가슴을 두드리고 있네/그 골목 다정한 이웃/그 물가 백사장 눈부신 햇발/마을을 떠나 어디로 가 있는가/앞들과 뒷들 새미골 들판의 탐스런 오곡들/녹두섬 밭고랑에 알알이 고구마 감자/그렇게 살지고 영글어서 지금 어디로 가 있는가/삼재도 들어오지 못하는 천하지 낙양/사람의 역사와 함께하여 인재와 문화/수틀에 수 놓이듯 문채가 빛났는데/그 인재 그 이름 다 얻다 놓고/마을은 이리 사람 가슴에 들어와/가슴만 두드리고 있는가” 지금은 물아래 들어간 고향을 바라보는 실향민들의 마음을 절절히 드러낸 글이다. 사람의 역사와 함께하여 인재와 문화 수틀에 수 놓이듯 문채가 빛났던 마을. 귀곡에는 대대로 해주 정씨들이 살아왔던 곳이다. 이곳 해주 정씨들은 농포 이후 13대에 이르도록 한 대도 거르지 않고 문집이 나온 선비 집안으로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 가문 중 하나로 성장해 왔다. 강물 위에 언 살 얼음을 깨고 까꼬실에 도착했다. 고향을 찾은 실향민들은 옛날이야기를 하며 옛 생각을 떠올렸고, 오솔길을 따라가다 한 선비의 유택을 만날 수 있다.
죽성(竹醒) 정은교(鄭誾敎). 그는 나라 잃은 슬픔을 간직한 채 이곳 황학산 아래에 은거할 터를 잡고 학문 정진으로 평생을 보낸 해주 정씨 집안의 선비다. 잘 정돈된 묘소에는 한말 선비 권용현(權龍鉉)이 지은 묘비가 서 있다. 먼저 '靑山霜落竹初醒'이란 글귀가 눈에 띄었다. '죽성'이란 호의 뜻을 설명하는 말이다 '청산에 서리 내리니 대나무는 비로소 파릇해진다'는 뜻으로 선비의 절개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죽성은 1850년 북평리(北坪里) 산성촌(山城村)에서 산포(山圃) 광빈(匡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3-4세 때 형들을 따라 독서를 하였으며, 5세 때 비로소 다정재(茶井齋)에게 글을 배웠는데 자질이 총명해 문리를 남들보다 빨리 터득했다. 죽성은 어릴 때 부모를 잃었다. 8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11세 때는 모친 초계정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슬픔이 지나쳐 거의 실신할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상중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한다. 부모를 잃은 죽성은 형들의 보살핌으로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15세 때 영동(永同)으로 이사를 가서 인근의 선비 수십 명과 월전시사(月田詩社)에서 강론을 하고 시를 읊조렸다. 이어 운창(芸窓) 박성양(朴性陽·1809-1890)과 인산(仁山) 소면휘(蘇冕輝 1814-1889) 등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운창은 서울 출신으로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 (闢邪銘)'을 지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인산은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으며,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인물은 아니지만 노론계 인물로 죽성 집안과는 학연이 오래전부터 맺어져 있으며, 이들의 학문 사상이 죽성에게 많은 영향을 비친 것으로 보인다. 운창과 인산은 죽성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이로부터 더욱 경사 백가에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틈틈이 과거문도 익혀 과거장에 나아갔으나 관리들의 횡포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을 쏟게 된다. 25세 때 다시 진주 단동(丹洞)으로 이주를 하고 다시 33세 때는 용암(龍巖)으로 옮겼다. 이듬해에 선비의 바른 몸가짐이 널리 알려져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7년에 영호남 선비들이 동춘당 송준길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동참을 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죽으면 종묘에 신주(神主)를 모신 뒤 그 임금에게 특히 충성하였거나 국가에 큰 공적을 세우고 죽은 신하에 대한 보답으로 종묘에 신하의 신주를 모시게 하였는데 이것을 묘정에 배향한다 한다. 동춘당은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효종의 측근에서 보필한 신하다.
1895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척사설(斥邪說)'을 지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쳤으며 명성왕후 시해 후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풍속이 갑자기 변하자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했으며 또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과 글을 지어 단발령이 불가하다는 뜻을 강력하게 밝히기도 했다. 1900년에 진주에 낙육재(樂育齋)를 설치하고 선비들을 교육시켰는데, 이때 죽성이 강장(講長)이 되어 규약을 정하고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인근 사람들이 모두 흡족해 하며 이를 잘 따랐다. 당시 경남의 도청이 있던 진주의 선비들은 영조 때부터 대구에 있던 사림(士林)들의 고등 교육기관인 낙육재를 유치키로 하고 학부에 호소하여 이를 설치하고 덕망 있고 학문이 깊은 사람을 강장으로 선출했는데, 이때 죽성이 선출된 것이다. 진주 낙육재는 구한말 의병 활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죽성은 면암 최익현의 학문과 절의를 숭모했다. 52세 때에 면암의 고향인 포천으로 가서 면암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자, 면암이 학식을 접해 보고 크게 기뻐했다. 이로부터 면암을 자주 찾아뵙고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죽성은 제자의 예를 갖춘 후 한해도 빠짐없이 면암을 찾아가서 학문을 질정하고 면암이 남쪽 지방으로 오면 반드시 죽성을 만나 학문을 토론했다. 1905년 을사늑약을 당하자 , 면암이 그 이듬해인 1906년 1월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놓고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 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는데, 죽성은 통보를 받고 참석을 하려 했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 잃은 슬픔을 시로써 드러냈으며, 동쪽을 향해 앉지 않을 정도로 왜놈들을 미워했다.
이듬해 죽성은 까꼬실로 들어온다. 죽성은 까꼬실로 들어와 황학산 아래 서실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는데, 그 서실 이름을 '후심정(後심亭)'이라고 지었다. 죽성은 '후심정명(後심亭銘)'을 남겼다.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비통함을 참고 분함을 삼키며 맹인처럼 농아처럼 살며 숲속에 자취를 감추고자 한다(士當斯世 忍痛含寃 宜聾宜啞 斂跡林樊)" 당시 죽성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또 죽성은 황학산 아래에 살며 도연명의 절개를 본받고자 했다. 그리고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즐겨 읽었으며, 선조인 농포공의 격문을 외우며 매양 비분강개한 마음을 달랬다 한다. 나라를 잃은 선비가 나라를 구하려 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힘이 없는 것을 옛 선인들의 글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고자 한 것이다. 황학산 아래에서 말년을 보내던 죽성은 나이 80이 넘자 기력이 세잔해져 병치레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3년 정월 병으로 자리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84세였다.
진양속지 유행조에 죽성의 이름이 올라 있다. "진실하게 궁구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돈독한 행실을 실천했다. 일찍 고아가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경술년 회갑을 맞아 다시 3년복을 입었다. 고종 승하 후 종신토록 흰옷을 입었으며 유고가 있다.(固窮好學篤行實踐痛恨早孤以庚戌回甲追服三年又以高宗昇遐後終身素服有遺稿)" 죽성의 평생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죽성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온 뒤 후심정 자리를 둘러보았다. 후심정은 황폐해져 찾을 길 없지만 죽성의 지조는 아직 이곳에 서며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