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들어준 시간의 결과물들
- '읽는 힘'에서 원초적인 동력을 찾는다.(이금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신문, 잡지, 책을 읽고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모두 기억해 둘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스크랩을 하거나 적어두었죠. 언제든지 생각날 수 있게. 겸손한 표현이지만, 노트들은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도 쉽게 찾아보고 이용할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노랗고 나달나달 가장자리가 닳은 오려둔 신문, 단정한 글씨의 메모로 가득 찬 노트는 1년에 한 권 정도씩은 나왔다. 몇 년 전부터 속도와 저장성 때문에 컴퓨터로 바꿔서 더 이상 노트가 쌓이지는 않지만 예전에 써 두었던 노트들은 여전히 소중하다.
크기와 색깔, 두께가 제각각인 노트에는 아주 사소한 날씨 얘기부터 전문적인 연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담겨 있어 이금희 씨의 관심의 폭을 엿보게 한다. 당장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 이금희 씨의 막히지 않는 진행과 풍부한 화제의 원천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방송에서 한번 활용한 것에는 붉은색 엑스표가 쳐져 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함이다.
물론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유용한 정보가 그 당시에는 더 눈길을 끈다. 신문이나 잡지, 책 등 많은 것을 보지만 어느 쪽에서 주로 도움을 받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진행하는 프로에 따라 다르죠. 예를 들어, 클래식 같은 전문프로를 진행할 경우에는 클래식 잡지가 가장 큰 도움이 돼요.
목적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관련 자료를 뒤지며 정보를 수집해서 쓸 때도 많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1회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민족적으로도 큰 획을 그었던 그 프로그램은 이금희 씨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3~4시간을 진행하면서 스물 다섯 가족을 만나는데, 대본도 전혀 없었고 상황을 예측할 수도 없었어요. 첫 회였으니까요. 대략적인 인적사항 외에는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매스컴에 나와 있는 모든 자료를 뒤져 갔죠. 그들의 신상명세뿐 아니라, 그들의 희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까지요. A4 용지로 백장 정도 뽑아 정리해서 10장 정도로 만들어 갔어요.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재료였던 셈이죠.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산가족의 기쁨과 슬픔에 인간적으로 반응했던 것만으로 이금희 씨의 가치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듯 인간적인 진행 뒤편에는 철저한 준비가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일주일에 한 권에서 두 권 정도 읽는다. 바쁜 일정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속도와 집중력인 셈이다. 항상 책을 들고 다니고, 5분 정도 짬이 나더라도 읽어요. 특히 누구를 기다릴 때 많이 읽죠. 헬스클럽에서 운동할 때는 자전거 타면서 자전거 앞에 놓고 읽고, 운동이 끝나고 목욕할 때도 욕조에 누워 읽어요. 바로 베껴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 드는 인용구를 만나면, 접어두었다가 나중에 그 페이지를 보고 다시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찾아 적어둔다. 늘 준비되어 있고 자투리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자세가 단단하다. 신문 잡지를 보면서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이다. 취미로 '인터뷰 기사 읽는 것'을 꼽을 정도. 제 일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죠. 물론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꼽는 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열린 사람'.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사람과는 자연스러운 인터뷰가 불가능하다. 반면, 열린 사람과의 인터뷰는 거침없고 즐겁다. 또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일류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가르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준이 '자부심'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취미 등에 소신과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과 만나면 즐거워요. 얼마 전에 인터뷰했던, 아홉 남매를 둔 부부의 경우 쌀 한가마를 한달에 먹는 등 경제적 압박이 심했지만 가정과 가족에 대한 소신이 있고 그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여 인상 깊고 보기 좋았어요.
어떤 일을 하든 내부에 자원이 많아야 풍부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순히 재능만을 믿는 것은 허공을 짚으려는 것처럼 헛되다. 이금희 씨는 아나운서가 되고,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읽는 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그곳에 나오는 상식, 감정, 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이죠. 여러 가지를 많이 읽는 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읽지 않고, 자료를 만들지 않고서는 가진 것이 없으니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죠. 초등학교 때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고등학교 때 꾸준히 방송반 활동을 해왔지만, 그녀가 현재의 위치에 서게 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그러한 활동의 경험이 아니라 그 동안 읽어온 책들, 그리고 그 결과가 진하게 녹아있는 노트들이었다.
http://sookmyung.ac.kr/(숙명여자대학교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