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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올랐던 수양대군, 그는 세조라는 시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비록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 선위(禪位)라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나이 어린 단종으로서는 무력으로 압박하는 수양대군 일당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무력하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끝내 죽음으로 맞선 신하들이 있었으니, 그들 가운데 성삼문 등 여섯 사람을 일컬어 ‘사육신(死六臣)’이라 칭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육신’이란 칭호를 안겨주었던 <육신전>이란 기록을 남긴 사람이 바로 이 평전의 대상인 남효온이다.
남효온은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어린 나이였지만, 성삼문 등 죽음으로 항거한 이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5살의 나이로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능호인 소릉을 복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상소를 올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에 부닥쳤다. 세조에 의해 폐서인되었기에,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웠던 훈구세력들에게는 그 문제가 아킬레스건처럼 여겨졌다. 만약 소릉을 복위시킨다면, 자연스럽게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훈구파들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그 자신 단종에 의리를 지킨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남효온을 ‘유교문명의 성세를 꿈꾼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원칙으로 보자면 세조의 왕위 찬탈은 부당한 것이었고, 평생 그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훈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 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상소문을 올린 이후 그는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문을 짓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생을 마쳤던 것이다. 글로나마 단종 복위운동을 펼치다 죽음으로 항거했던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육신전>을 지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로서의 ‘사육신’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 책은 연산군에 의해 남효온의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아들까지 목이 베이는 참형을 당한 사건을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조 이후 예종과 성종대를 지나,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 남효온에 대한 훈구파들의 집요한 공격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의 남효온의 생애를 기술하고, 그의 견결한 정신세계와 <육신전>을 집필하게 된 동기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짚어보고 있다. 김시습을 비롯한 교유 인물들 역시, 당시 세조 정권의 부당함에 맞서 벼슬을 포기한 채 살아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연산군이 다스리던 때를 전후한 시기에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사소한 빌미를 잡아 훈구파들이 사림파들을 대거 참살하는 ‘사화(史禍)’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한다. 모두 4차례에 걸쳐 발생한 사화로 인해, 그 때마다 젊은 사림파 문인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시간이 지나면, 다시 훈구파에 맞서는 사림파들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사림파가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러한 결과를 이끌기까지 남효온과 같은 인물들의 강직한 행동이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남효온은 ‘사육신’을 역사에서 불러내고 그 자신 ‘생육신’으로서의 이름을 얻었지만, 젊은 시절에 올린 상소문으로 인해 평생을 힘들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 또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의지하며 그 암울한 시대를 버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단순히 ‘생육신’으로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가 걸어갔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남효온의 문집과 그에 관해 기록한 다양한 문헌들을 섭렵한 저자의 성실함으로, 이러한 평전의 구성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하여 남효온이란 인물과 그가 살았던 조선 전기의 역사적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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