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난 수저, 비어 있지 않은 접시
접시 하나가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접시 위가 아니라 접시 아래로 물러나 V자로 벌어져 있습니다.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으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미 내려놓은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접시는 정말 비어 있는 것일까요.
금식이라고 하면 흔히 세 가지가 떠오릅니다. 먹지 않는 것, 몸속을 비워 내는 것, 살을 빼는 것. 빈 접시를 보면 그 생각이 곧바로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 사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음식을 끊는 이유가 굶주림을 견디는 데 있지 않고, 비움 자체가 목적도 아닙니다. 이 사흘이 하려는 일은 생명 활동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식은 세 단계로 갑니다. 청결심법, 금식법, 보식법, 각각 사흘입니다.
앞의 사흘, 청결심법 동안에는 밥을 그대로 먹으면서 아침과 저녁 식후에 청결심차를 마셨습니다. 몸을 씻는 사흘이었습니다. 이제 그다음 사흘, 비로소 접시를 비우는 삼일금식법입니다.
먼저 정리하고, 그다음 비우고, 그 뒤에 다시 받아들입니다. 금식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사흘이기에, 비우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흘에 비우는 것과 깨어나는 것을 가르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로 먹습니다. 밥과 반찬처럼 물질로 된 것을 먹는 물식(物食), 그리고 숨으로 먹는 기식(氣息)입니다. 숨을 쉬는 것도 먹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삼일금식법은 물식(物食)을 금함으로써 기식(氣息)에 의한 능적 부분의 회복을 일깨우는 최선의 방법이며, 인간의 전체적인 생리활동의 한 역할이다."
몸이 늘 기대어 온 물식의 흐름을 멈추면, 그동안 물식에 가려 잠들어 있던 기식이 깨어납니다. 접시가 비었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식이 나가고 기식이 깨어난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 사흘은 음식만 멈추고 끝나지 않습니다.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이 호흡과 묵상입니다.
"약 30여 일 중 3일간을 호흡(呼吸)과 묵상(默想)을 통해 기식활동(氣息活動)을 함으로써 능질(能質) 간의 감각의지(感覺意志)를 회복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물식을 멈추고 오직 미지근한 물과 차를 마시면서, 태식호흡과 묵상으로 몸과 마음의 흐름을 다시 한곳에 모읍니다. 긍정하는 생각, 그리고 규율 있는 일상과의 균형도 함께합니다.
약 30여 일 중 3일간이란 한 달에 한 번, 사흘입니다.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되풀이할수록 좋습니다.
사흘이 되찾으려는 것은 능질 간의 감각의지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기능과 만져지는 기질, 이 둘이 짝을 이루어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 짜임을 몸으로 느끼는 감각, 그것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흘은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목적인 수행이 아닙니다. 먹지 않는 기술을 익히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람이 본래 가진 생리 활동의 질서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몸이 비워지는 사흘이면서, 동시에 감각의지가 다시 깨어나는 사흘입니다.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도 다시 짚습니다.
"음식(飮食)은 삼자(三者)적인 것에 의한 취득물이 아니다. 음식은 오직 자아(自我)적인 필요감각과 본심에 의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생리욕구에 편승하여 찾아 취하게 되는 보충제인 것이다."
120호에서 먹는 것은 구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음식은 밖에서 얻어 오는 물건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러나는 필요를 따라 취하는 보충제입니다. 그 보충제를 사흘 내려놓았다고 해서 내가 비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 접시를 봅니다.
수저는 물러나 있고, 접시 위는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빈 자리가 밝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아니라, 숨이 들어온 자리입니다.
이 사흘은 혼자 버티는 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상관하며 그중에서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법식을 찾아 행사하며 살아가기 위해 깨우쳐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삼일금식법이며, 곧 진식법의 기본이 된다."
빈 접시는 굶주림의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깨우쳐 함께 나누려는 자리였습니다. 그 사흘을 실제로 어떻게 보내는지는 다음 호에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