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영화 '버닝' 공식 포스터
<리뷰> ‘버닝’ 타오르는 불꽃은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닮아 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이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를 발간하는 ‘스크린 데일리’의 경쟁부문 초청작 평점 집계 결과 4점 만점에 3.8점을 기록했다. 역대 최고점이다. 지난 17일 칸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가 끝난 후 전 세계 영화인들의 시선은 ‘버닝’으로 향했다. 칸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순수한 미장센으로서 영화의 역할을 다하며 관객의 지적 능력을 기대하는 시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라는 찬사를 보냈고, 프랑스 배급사 디아파나의 미쉘 생-장 대표 역시 “걸작 그 자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버닝’이 선사해준 특별함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헛간을 태우다’의 주인공은 옛 여자의 새 남자에게 가끔 헛간을 태우는 취미가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주인공은 그의 이상한 취미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자신의 집 근처 헛간을 태울 계획이라는 그의 말에 따라 주변의 헛간들을 조사하고 관찰했다. 하지만 결국 헛간이 타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새 남자로부터 헛간을 태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이 사랑했던 옛 여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하루키는 섬세한 감성과 그만의 디테일한 묘사 수법으로 모호한 주제를 포장하는데 능숙한 작가다. 과연 하루키가 ‘헛간을 태우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상실감을 이창동은 어떻게 담아냈을까.
종수(유아인 분)는 ‘계급론’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서 어릴 적 도망친 어머니. 배우지도 못했고 변변찮은 기술도 없어 유통업계 막일을 하는 인물이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길을 잃고 안개 속을 무작정 걸어가고 있다. 그는 방향감을 상실하고 헤매는 평범한 한국의 청년을 대변한다. 점점 더 선명해지고 불타오르는 해미(전종서 분)의 기억들, 결국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해미를 보며 그 안에서 통제하지 못할 좌절감과 공허함을 표현해낸 유아인의 연기는 끝까지 가슴 한 켠에서 심오한 슬픔이 맴돌게 만든다.
해미 역시 그렇다. 해미는 어릴 적 마른 우물에 갇혔었던 이야기를 한다. ‘트라우마’. 그녀는 깊은 우물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며, 그렇게 소리 내지도 못한 채 숨죽여 울부짖으며. 가족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말라버린 우물에서 그녀의 깊은 정서적 외로움을 볼 수 있다. 아직도 그녀는 깊은 우물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마른 우물을 기억하는 건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종수의 엄마와 해미 같은 극심한 외로움 속에 살았던 여자들뿐이었다.
화려한 포르쉐를 몰며 이러한 청년들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 인물인 벤(스티븐 연 분)은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삶의 공허함을 채워나간다. 사회를 이루는 가장 밑바닥의 인간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그에겐 그저 ‘베이스의 울림’을 위한 ‘메타포(은유)’일 뿐이다. 잘 걸리지조차 않는 고물차의 시동소리와 공허한 허공을 울려나가는 고급 스포츠카의 엔진소리에서 어두운 계급사회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다. 종수의 아버지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고작 전치 6주의 폭행사건에도 징역형을 살아야 했고 수많은 여성들을 죽이며 대마를 일삼은 벤은 겉보기에 행복하고 평안하게 잘 살아갔다.
영화에서 벤은 이 ‘메타포’를 굉장히 강조했다. 사실 영화를 살펴보면 ‘메타포’로 생각되는 요소가 굉장히 많다. 단 하나의 씬조차 허투루 넘기지 못할 정도로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은 계속된다. 이러한 ‘메타포’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창동 감독은 그 해답을 끝까지 주지 않았다. 확실한 이미지보단 애매하면서도 흐릿한 형태만을 제공했다.
이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라고 말했다. 그는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를 담아내고자 했다. 현 세대의 자화상, 한국 사회 청년들의 상실감 말이다. 엔딩에서 종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피 묻은 자신의 옷들을 모두 벗어 함께 태워버렸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종수의 영혼의 숨소리는 멎어져 갔다. 과거 집을 나간 어머니의 옷을 태웠던 것처럼, 그리고 이 시대의 청년들이 너무나 깊어져 버린 마른 우물에 빠져드는 것처럼.
버닝(Buring)의 타오르는 불꽃은 청춘들의 꺼져가는 영혼의 등불이었다.
송태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