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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국, 송찬호, 문태준, 김은정, 김인갑의 시
반경환 명시감상 네 번째
----엄재국, 송찬호, 문태준, 김은정, 김인갑의 시
나비의 방
엄재국
이 작은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반지며 진주빛 목걸이
본 적 없는 둥근 열매의 팔찌를 훔치려면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알아야 한다
나비는
날개와 날개 사이의 촘촘한 눈금들을 접었다 폈다
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꽃잎을 연다
다이얼이 돈다 문이 열린다 와르르 쏟아지는,
도대체 둥근 빛깔의 보석들
일시에, 눈앞 캄캄하므로
나풀나풀 나비는,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는 것이다
그가 다녀간 자리
부서지고 달아난 문짝들 수북한데,
이슥한 봄날,
꾹꾹 눌러 퍼 담은 향기를 등에 지고
비틀비틀,
산등성일 오르는 나비의 뒤를 밟은 적 있다
----엄재국 시집 {나비의 방}(도서출판 지혜)에서
엄재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나비의 방}의 해설을 쓴 함기석 시인의 말에 따르면, 엄재국의 시세계는‘이접移接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이접의 시학’이란 “사물과 사물의 결합, 사물과 자아의 결합, 기억과 현실의 결합, 자연과 인공의 결합 등으로 세분화”된 것을 말한다. 요컨대‘이접의 시학’이란 서로 다른 것들, 즉,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시켜 우리 인간들의 인식에 충격을 가하고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엄재국의 시세계를‘상징의 시학’으로 부르고 싶은 데, 왜냐하면 그의 수사법은 은유이며, 그 유사성의 법칙을 통하여 서로 다른 것들, 즉,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시켜 그것을 인간화시키고 극적인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이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것이고, 따라서 그의 [나비의 방]의‘나비’는 인간이 되고, 그 인간은 대도둑의 탈을 쓰게 된다. 이것은 마치 독수리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부엉이를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다. 엄재국 시인에 의하여 나비는 인간이 되고, 그 인간은 대도둑이 된 것이다. 나비의 채밀행위는 인간의 행위와도 같고, 그 인간의 행위는 대도둑의 행위와도 같다. 상징이란 이처럼 상징주의자들이 유사성의 법칙을 통하여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이고, 따라서 상징주의자들이 그 동식물들의 행위에 극적인 성격과 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양한 세계들, 이를테면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와 비극적인 슬픔의 세계, 또는 희극적인 우화의 세계를 펼쳐보이게 된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는 이상낙원의 세계가 되고, 비극적인 슬픔의 세계는 동정과 연민의 세계가 되고, 희극적인 우화의 세계는 야유와 조롱의 세계가 된다. 상징이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것이고, 상징주의자들이란 그 모든 사물이나 동식물들을 인간화시키는 천의 얼굴을 지닌 마법사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징은 신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 상징은 어머니가 되고 누나가 된다. 상징은 장군이 되고 병사가 된다. 상징은 독수리가 되고 부엉이가 된다. 상징은 천사가 되고 악마가 된다. 상징은 의사가 되고 환자가 된다. 상징은 성자가 되고 대도둑이 된다. 상징의 세계는 넓고도 깊으며, 수많은 탈들이 다양하게 변신을 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의 사회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상징에 살고 상징에 죽으며, 상징에 따라 울고 웃는다. 상징이란 탈이고, 배역이며, 그 구성의 원리는 은유, 즉, 유사성의 법칙이며, 우리 인간들은 상징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는 그런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상징, 큰 상징, 이그러진 상징, 추악한 상징, 아름다운 상징, 차가운 상징, 따뜻한 상징 등----, 따지고 보면 상징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있고 상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엄재국 시인은 상징주의자이며, 그의 시세계는‘상징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상징주의자들의 첫 번째 장점은 명명의 힘이고, 그 두 번째 장점은 은유를 통하여 매우 친숙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다양한 상징들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이 작은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열쇠로“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꽃잎을”열듯이,“캐비닛의 비밀번호를”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비는 대도둑이 되고, 가시가 달린 꽃은“반지며 진주빛 목걸이”,“둥근 열매의 팔찌를”보관하고 있는 대저택이 된다. 때는“이슥한 봄날”이고, 대도둑이 꽃의 문을 열고 들어가 다이얼을 돌리면 둥근 빛깔의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보석들의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은 일시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눈부신 것이 되고, 마치 대낮에 환한 등불을 켜는 것과도 같은 것이 된다. 이때에“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는 것이다”라는 시구는 그 보석들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환한 대낮도 어두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되고,“그가 다녀간 자리/ 부서지고 달아난 문짝들 수북한데”라는 시구는 대도둑이 다녀간 자리의 어수선한 살풍경을 지시하게 된다. 꽃은 대저택이 되고, 꿀은 수많은 금은보화가 된다. 나비의 촉수는 열쇠가 되고, 꽃의 아름다움은 환한 대낮의 등불이 된다. 나비와 대도둑도 은유이고, 꽃과 대저택도 은유이다. 꿀과 금은보화도 은유이고, 꽃의 아름다움과 환한 등불도 은유이다. 은유는 수사법 중의 최고의 수사법이며, 모든 상징주의자들의 전가의 보도와도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엄재국 시인의 [나비의 방]은‘상징주의 시학’의 최정점의 시이며, 그 아름다움이 영원불멸의 아름다움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비를 대도둑으로 변모시키고, 꽃을 대저택으로, 꿀을 수많은 금은보화로, 나비의 촉수를 열쇠로, 꽃의 아름다움을 환한 대낮의 등불로 변모시킨 그의 명명의 힘은 천지창조의 그것과도 같으며, 이 명명의 힘에 의하여 [나비의 방]이라는 매우 놀랍고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오랜 관찰의 힘이 상상력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이 상상력의 혁명이 인식의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엄재국 시인의 [나비의 방]은 극적인 세계이며, 이 극적인 세계는‘추리소설적 기법’과도 같은 육하원칙으로 구축되어 있다. 시인은 수사관(혹은 기자)이 되고, 나비는 대도둑이 된다. 육하원칙이란‘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어떤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고, 이 육하원칙에 의하여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그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누가: 나비가
언제: 이슥한 봄날
어디에서: 야생화의 꽃밭에서
무엇을: 둥근 빛깔의 보석들(꿀)을
어떻게: 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풀듯이, 그 꿀들을 훔쳐냈다.
왜: 나비가 나비의 먹이를 확보하려고.
이슥한 봄날, 한 마리의 나비는 야생화의 꽃밭에서 채밀을 하고 있었고, 시인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비의 행방을 쫓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면 시가 되지를 않는다. 따라서 시인은 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나비를 대도둑으로, 자기 자신을 수사관(기자)으로 그 배역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건을 극적으로 전개시켜야 하니까, 과장과 허풍으로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아야 했던 것이고, 그 모든 평범한 것들을 대단한 사건으로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이 작은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와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반지며 진주빛 목걸이/ 본 적 없는 둥근 열매의 팔찌를 훔치려면/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알아야 한다”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나비는/ 날개와 날개 사이의 촘촘한 눈금들을 접었다 폈다/ 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꽃잎을 연다”와 “다이얼이 돈다 문이 열린다 와르르 쏟아지는/ 도대체 둥근 빛깔의 보석들// 일시에, 눈앞 캄캄하므로/ 나풀나풀 나비는,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는 것이다”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매우 친숙하고 평범한 일상적인 사건들을‘세계적인 대사건’으로 변모시키려니까, 매우 적극적인 과장과 허풍을 떨게 되었던 것이다. 나비는 금고털이범이며, 그가 못 여는 대저택의 자물쇠는 없으며, 그는 언제, 어느 때나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훔쳐나오게 된다. 암수의 결합, 즉, 수정이 끝나면 난분분 꽃잎들이 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그가 다녀간 자리/ 부서지고 달아난 문짝들 수북한데”라는 시구는 그 금고털이범의 범행의 현장을 말하고, “이슥한 봄날/ 꾹꾹 눌러 퍼 담은 향기를 등에 지고// 비틀비틀/ 산등성일 오르는 나비의 뒤를 밟은 적 있다”라는 시구는 그 금고털이범을 동경하며, 그 완전범죄에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작은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라는 시구는 그 느닷없음과 함께, 흥미진진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 작은 집을, 마치, 부자들의 대저택처럼 부각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작은 집에는 “반지며 진주빛 목걸이”와 “둥근 열매의 팔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꽃은 대저택이 되고, “나비는/ 날개와 날개 사이의 촘촘한 눈금들을 접었다 폈다”하면서,“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그 능숙한 솜씨로 대저택의 비밀금고를 열어제친 것이다.“나비는/ 날개와 날개 사이의 촘촘한 눈금들을 접었다 폈다”,“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꽃잎을 연다”라는 시구는 그 어려움의 강도를 뜻하고, 따라서 그 대도둑의 솜씨에 의해서,“다이얼이 돈다 문이 열린다 와르르 쏟아지는/ 도대체 둥근 빛깔의 보석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보석은 아름답고 찬란하며, 눈이 부시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백주의 대낮에, 그 대낮보다도 더 환한 등불이 켜진다. 대저택의 침입과 금고털이의 과정도 극적이고, 금고의 열림과 그 보석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과정도 극적이다. 이때의 극적이란 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마저도 감동할 만큼의 극사실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세목의 진정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가 바로 이 엄재국 시인의 [나비의 방]의 완결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먹고, 생명이 생명을 먹으며, 또다른 생명을 낳는다.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삶을 포기한 것과도 같다. 산다는 것은 의로운 행위를 한다는 것이며, 의로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삶을 포기한 것과도 같다. 정의와 불의, 상과 벌은 동일한 행위의 양면이며, 이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과 사고는 극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나비는 대도둑이며, 금고털이범이다. 나비는 언제, 어느 때나 완전범죄자이며, 그의 의로운 행위들에 의하여 모든 꽃들은 그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2016년 모월 모일, 대도大盜 전두환은 한남동의 고급주택가에서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롤렉스 시계, 금괴, 진주목걸이 등을 훔쳤고, 그는 그것들을 장물아비에게 넘기려고 하다가, 그를 쫓고 있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 금은보화의 주인공들은 어느 누구도 그 도둑맞은 사실들을 부인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두환은 “진짜 대도둑은 아무 것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이 땅의 부자들이지, 나는 정의의 사나이이다”라고 그 도둑질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도大盜 전두환은 그 주인없는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팔아서, 가난하고 힘들고, 너무나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서민들을 도와주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주인이고, 어느 누가 대도둑이란 말인가?
어느 누가 의인이고, 어느 누가 대악당이란 말인가?
나비, 나비, 누구나 부자가 되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
높은 담장을 넘고, 철제금고의 비밀번호를 풀 수 있는 세계적인 갑부인 빌 케이츠와도 같은 열쇠(지혜)가 있어야 한다.
장미
송찬호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헐거운 사모思慕의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 애비가 되어
아침 이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다시 창문과 지붕을 흔들며
천둥으로 울면서 돌아온다면
가시를 신부 삼아
내 그대의 여윈 목에
맑은 이슬 꿰어 걸어주리라
---송찬호 시집 {분홍 나막신}에서
송찬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분홍 나막신}은 그 사랑이 낡았다는 점에서는 1960년대의 흑백영화와도 같은 사랑이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낡을수록 더욱더 새로워진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송찬호 시인의 시적 주제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다 감싸안는 전인류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송찬호 시인의 [장미]는 상상력의 혁명의 소산이며, 그의 전인류애적인 사랑이 꽃 피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송찬호 시인은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가 아니라 사랑의 신인 에로스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권력자, 또는 최고의 심판자로서의 제우스의 상징인‘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천둥은 불화의 상징이며 모든 사람들을 떠나가게 하지만, 사랑은 평화의 상징이며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때문이다. 검은 먹구름 속에서 온천지가 폭발할 듯한 천둥, 날이 흐리고 큰비가 올듯한 서늘한 대기 속에서 느닷없이 하늘을 쪼개버릴 듯이 으르렁거리는 천둥----. 천둥은 하늘의 벼락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는 제우스 신의 노여움과도 같다.
장미는 꽃 중의 꽃이며,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평화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나 천둥을 흙 속에 파종하여 장미로 가꾸고 싶다는 소망은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너무나도 처절하게 실패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우스는 신들 중의 신이며 최고의 권력자이지, 인간이 아니다. 천둥은 다이나마이트같은 제우스의 노기띤 목소리이지,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로스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나 전쟁과 평화, 또는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전쟁 뒤에는 평화가 있고, 모든 평화 뒤에는 전쟁이 있다. 모든 사랑 뒤에는 증오가 있고, 모든 증오 뒤에는 사랑이 있다. 인간이 없으면 신도 존재할 수가 없고, 신이 없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전도사로서 송찬호 시인은 제우스와의 싸움에서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패배는 승리보다도 더욱더 아름다운 패배였던 것이다. 눈앞의 승리는 아름답지만, 눈앞의 패배는 더욱더 비참하고 처절하다. 하지만, 그러나 그 비참하고 처절한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패배는 더욱더 아름답고 찬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송찬호 시인의 장인 정신이며, 그 결과가, 꽃 중의 꽃인 [장미]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느 누가 일찍이“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장미”로 꽃 피우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겠으며, 과연 어느 누가 “언젠가 다시 창문과 지붕을 흔들며/ 천둥으로 울면서 돌아온다면/ 가시를 신부 삼아/ 내 그대의 여윈 목에/ 맑은 이슬 꿰어 걸어주리라”고 노래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송찬호 시인은‘상상력의 혁명의 대가’이며,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의 언어인 천둥은 흙 속에 뿌리를 둔 장미가 되고, 그 장미는 “아침 이슬”이라는 목걸이를 두른 신부가 된다. 꽃 중의 꽃인 장미, 전세계의 공원과 화원, 또는 가정에서 1만 5천여 종이나 자라고 있는 장미, 꽃잎은 향료로, 열매는 이뇨와 해독제로 서양의 귀족들의 필수품이었던 장미----.
천둥이 장미가 되려면 땅 속으로 스며들어야만 하고, 장미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꽃 피어나려면 온 천지가 폭발할 듯이 천둥이 울어야만 한다. 천둥이 울고 장미가 꽃 피어난다. 아니, 장미가 울고 천둥이 꽃 피어난다. 천둥이 꽃 피어나고, 장미는 아침 이슬을 그의 가시로 꿰어 만든 목걸이의 주인공이 된다.
천둥- 장미- 아침 이슬- 가시- 신부. 상징주의자의 상상력이 천둥을 흙 속에 파종하여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장미로 꽃 피워낸 것이다. 시인은 장미의 남편이자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고, 장미는 시인의 아내이자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된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평화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연출해낸다.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문태준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텐데
집 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텐데
민들레가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텐데
---{황해문화}, 2016년 여름호에서
우리들의 고향에는 신이 살고 있고, 이 신의 말씀에 따라서 모든 만물이 자라나고 꽃 피어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시냇물이 흐르듯이 도道가 있고, 이 도의 이치에 따라서 그 어떠한 비방이나 다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닌 하나이며,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게 된다. 나의 죄는 우리 모두의 죄가 되고, 나의 영광은 우리 모두의 영광이 된다. 만인평등은 불변의 법칙이 되고, 개인의 자유는 신이 부여한 생득권이 된다. 도덕도 없고, 법도 없다. 가난한 사람도 없고, 병든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우리들의 고향은 영원한 이상낙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의 고향은 이상낙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상낙원은 시나 신화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세계이다. 고향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도, 도道도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자유를 잃고 신의 질서에 편입하게 된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자유를 얻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도가 존재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자유를 잃고 도의 질서에 편입되게 된다. 도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자유를 얻고 자기 자신을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고향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며, 이 존재론적인 모순이 우리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떠나온 자는 고향을 찾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고, 자기 자신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산다. 문태준 시인의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은 고향을 떠나온 자로서, 그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의 회한이 하나의 환영처럼 펼쳐진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루카치의 말대로,‘범죄와 광기는 선험적 고향상실의 개관화’이며, 우리는 이 타락한 시대에, 그 타락에 대응하는 타락한 방법으로 그 고향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사이렌의 피리소리에 발광하는 오딧세우스이며, 영원히 살기 위하여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지는 엠페도클레스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텐데/ 집 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텐데/ 민들레가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텐데”라는 문태준 시인의 시구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이때에,“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은 무시무시한 범죄와 싸늘한 민심民心과 ‘군중 속의 고립’을 겪어야만 하는 천형의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이 있어도 신이 없고, 도가 있어도 도가 없다. 만인평등이 있어도 만인평등이 없고, 자유가 있어도 자유가 없다. 가족에 구속된 죄인, 직장에 구속된 죄인, 자본에 구속된 죄인, 교회에 구속된 죄인, 정당에 구속된 죄인, 법률에 구속된 죄인, 친구에게 구속된 죄인, 이웃에게 구속된 죄인----.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죄인이며 영원히 그 감옥의 탈출을 꿈꾸는 장발장인지도 모른다.
도시를 떠나면, 그 감옥을 탈출하면“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것이다. 도시를 떠나면, 그 감옥을 탈출하면, “집 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자비롭고 친절한 신의 손짓----고향 혹은 이상낙원의 손짓----에 따라, “민들레가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요컨대, 그때 그때마다 매우 자유롭게 변신하는 천의 얼굴을 지닌 인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해냈고, 그 신에게 ‘인간의 아버지’라는 가짜 권능을 부여해 왔다. 인간은 그 신에게 예배를 하면서도 그들이 하고 싶은 것, 그들이 얻고 싶은 것, 그들이 물리치거나 퇴치하고 싶은 것을 그 신의 권능에 따라 처리해줄 것을 강요해왔던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구원자이자 영원한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신화와 종교의 기원이기도 한 것이다. 신은 인간이 되었고, 인간은 신이 되었다. 신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정의, 자유, 사랑, 평화는 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이상낙원(고향)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문태준 시인의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은 이상낙원이며, 그가 실제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그곳을 찾아간다면 그 이상낙원은 또다른 지옥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흙내처럼 평범”함도 쉽지 않으며, 그 평범함은 비상함 속의 평범함일 뿐인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만일’의 가정어법은 신이 될 수 없는 자의 탄식이기는 하지만, 이 ‘만일’의 상상력에 의하여 모든 신화와 종교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떠돌이--나그네에게는 이 말들처럼 더없이 아름답고 달콤한 말도
없을 것이다.
짐바브웨 코끼리의 아빠 찾기
김은정
아빠를 찾아 야생의 잠베지 강으로 왔는데 여전히 아빠는 없었어요
없어서 난 평원에서 느릿느릿 흙먼지를 일으키며 물웅덩이에서 물을 마시고 진흙 위에서 뒹굴고 악어를 쫓으며 난 아빠한테로 가는 길 잃었는데
그렇지만 내 길은 언제나 물가로, 아빠한테로 이어진다는 빅토리아 폭포 소리를 들었어요
그 재주로 난 또 붉은 아까시나무 꼬투리 열매를 따 먹고 수천 년을 걸었나요?
신출내기 치타와 하이에나, 고슴도치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춤추는 그 길에서 코끼리의 뼈 무더기 앞에서 울기도 했나요?
사자의 포효에 두려워 떨기도 했나요?
협곡의 물안개 사이로 아빠의 증거 같은 무지개가 피어올라요 무지개 끝에 피어난 흰 꽃을 쫓아 난 또 룬데강으로 걸어요
걷고 또 걷지만 저 강 끝에 아빠가 없다는 것도, 아빠의 자궁 같은 이 땅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것도 난 알아요
아빠의 딸로 태어나 아빠의 품에 안길 때까지 이 여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난 알아요
*짐바브웨의 내용은『론니 플랫』2016년 5월호 잠베지 강을 따라서 기사를 참고, 인용했습니다.
----{애지}, 2016년 가을호에서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어떤 사건에서 그 원인을 더듬어 올라가고, 그 원인에서 ‘원인의 원인’을 더듬어 올라가면 최초의 원인이 나오게 된다. 이 최초의 원인이 만물의 창조자이고, 이 만물의 창조자가 아버지(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이 아버지를 숭배하는 종교이며, 이 아버지의 은총에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영생불사의 존재이고,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존재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은 인간 존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인간들은 아버지에게 노예적인 복종 태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이 땅으로 내려오신 적도 없고, 그 말씀, 그 진리를 진짜 살아 있는 육성으로 들려준 적도 없다. ‘아버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그 어렵고 힘든 삶을 헤쳐나갈 수가 없다.’ ‘아니다. 최초의 아버지는 존재한 적도 없고, 그 아버지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어느 때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광신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어주고, 두 번째는 아버지는 부재하지만, 단지 상상의 존재로서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범한 인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어주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나 오늘날의 ‘빅뱅 이론’에 근거를 둔 무신론의 정당성을 말해준다.
나는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무신론자이며, 이런 점에 있어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르메트르의 ‘빅뱅 이론’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신봉자라고 할 수가 있다. 최초의 우주는 약 6천년 전에 아버지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약 137억년 전, 먼지와 가스덩어리의 입자들이 고밀도로 압축된 결과, 대폭발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빅뱅 이후, 우주의 크기는 1초 동안 20억 곱하기 10억km로 팽창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대폭발 이후, 수많은 동식물들이 자연의 상태에서 탄생을 했고, 우리 인간들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원숭이로부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서 신이 된 것은 아니었고, 그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하고, 그 신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신도가 되어갔던 것이다. 하나의 가상으로서의 신마저도 없다면 우리 인간들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 불안감과 그 공포감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유신론에서 무신론까지 살펴본 것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우리 인간들은 아버지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는 나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며,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천지창조주라고 할 수가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자연의 텃밭에다가 씨앗을 뿌리고 만물이 자라나도록 그 뜨거운 사랑으로 아침해를 떠오르게 하신 아버지, 차가운 공기와 더운 공기를 충돌시켜 비를 내려주시고, 밤이면 밤마다 달빛과 별빛으로 옛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아버지, 국가와 단체와 일터를 만들어 언제, 어느 때나 서로서로 협력하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아버지, 도덕과 법과 질서를 만들어 상호간의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신 아버지, 그토록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과 모든 장애물들을 다 극복할 수 있도록 최고급의 지혜를 가르쳐주신 아버지----. 이 세상은 아버지의 전능으로 열렸고, 이 세상의 삶은 아버지의 은총으로 가능해졌다. 모든 종교는 아버지를 찬양하는 종교이며, 아버지를 찬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은정 시인의 시적 화자가 “아빠를 찾아 야생의 잠베지 강으로 왔는데”도 “아빠는 없고”, 그는 “평원에서 느릿느릿 흙먼지를 일으키며 물웅덩이에서 물을 마시고 진흙 위에서 뒹굴고 악어를 쫓으며” “아빠한테로 가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 “내 길은 언제나 물가로, 아빠한테로 이어진다는 빅토리아 폭포 소리를” 들었고, “그 재주로” “붉은 아까시나무 꼬투리 열매를 따 먹고 수천 년을” 걷게 된다. 이때에 그 재주는 타고난 소질이나 재능이외에도 아빠 찾기의 집념을 드러내는 것이고, “붉은 아까시나무 꼬투리 열매를 따 먹고 수천 년을” 걸었다는 것은 ‘아빠 찾기의 역사’가 그처럼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출내기 치타와 하이에나, 고슴도치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춤추는 그 길에서 코끼리의 뼈 무더기 앞에서 울기도 했나요?”라는 시구는 수없이 울었다는 것을 뜻하고, “사자의 포효에 두려워 떨기도 했나요?”라는 시구는 또한, 수없이 그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빠 찾기는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아빠 찾기의 여정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건 실존적 투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련과 극복은 시적 화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그 아빠 찾기의 목표는 그의 목숨을 요구한다. 아버지는 무지개이고, 환영이다. 아버지는 무지개처럼 아름답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협곡의 물안개 사이로 아빠의 증거 같은 무지개가 피어올라요”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무지개 끝에 피어난 흰꽃을 쫓아 난 또 룬데 강으로 걸어요”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걷고 또 걷지만 저 강 끝에 아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이 또한 “아빠의 자궁 같은 이 땅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요컨대 “아빠의 딸로 태어나 아빠의 품에 안길 때까지 이 여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지개이며 환영이다. 아버지는 무지개로 존재하고, 아버지는 또한, 환영으로 존재한다. 아버지는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채로 존재한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 존재하는 곳, 언제, 어느 때나 사시사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젖과 꿀이 넘쳐 흐르는 이상낙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은정 시인의 [짐바브웨 코끼리의 아빠 찾기]는 ‘아빠 찾기의 걸작품’인데, 왜냐하면 아빠 찾기의 진정성이 칠색영롱한 무지개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김은정 시인의 [짐바브웨 코끼리의 아빠 찾기]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아빠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아빠 찾기의 시적 주제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 잠베지 강과 룬데 강의 강물도 무지개로 피어오른다. 치타, 하이에나, 고슴도치, 코끼리, 사자 등이 의미하는 시련과 고통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 그 끝없는 아빠 찾기의 여정도 무지개로 피어오른다. 김은정 시인의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한 문체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 ‘인간 존재의 역사’인 ‘아빠 찾기’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지식도 무지개로 피어오른다.
빨주노초파남보----. [짐바브웨 코끼리의 아빠 찾기]는 총천역색의 드라마이며,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시적 화자의 ‘모노 드라마’가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빅토리아 폭포의 무지개처럼 펼쳐진다.
와아, 절경이다!
말문이 닫힐 것 같고,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
김인갑
한 번도 정착해보지 못한 바람이 부도난 건설현장 천막을 흔들고 있다 어쩌다 이곳에 닻을 내리게 되었을까 도심 한가운데 정박 중인 배 한척, 암초에 둘러싸여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 일년전, 출항을 앞두고 선장은 사라졌다 바다로 달아난 게 분명했지만 수배자 명단 속, 선장은 부표사이에 숨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간 배 근처에 보이지 않던 선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뱃머리 담당 사내는 타수가 없는 틈에 키를 잡고 돛 담당인 사내도 바람이 불지 않자 낮잠에 빠졌다 각자 자리가 있는 사내들도 노를 점검하거나 조타실에서 화투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언제까지 선장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내도 있었지만 아무도 선장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조타실의 사내들도 키를 잡던 사내도 모두 집으로 돌아간 밤, 뒤늦게 잠깬 돛 담당 사내의 겉옷이 밤바람에 펄석펄석 거린다 아무래도, 내일부턴 배 근처에 선원들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노을이 돛대를 잡고 힘겹게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국 사내는 덜컹거리던 희망과 함께 오르내리던 곤돌라에서 투신을 시도 한다 선장 없는 항해를 꿈꾸고 있을 사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게 깊어가는 밤**,
저 배를 침몰시킬 것 같다
*존 밀링턴 씽의 단막극 제목.
**유창성 시인의 신생의 바다에서 인용.
----{애지}, 가을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이며, 이 직업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이 결정된다. 농부는 농업의 신과 국가를 만들고, 상인은 상업의 신과 국가를 만든다. 유목민은 유목민의 신과 국가를 만들고, 어부는 어부의 신과 국가를 만든다. 모든 종교와 국가와 역사의 기원은 직업이며, 직업이란 그가 먹고 살아가야 할 밥그릇을 확보하는 수단을 말한다. 직업에 따라서 계급과 신분의 서열이 결정되고, 직업의 수준에 따라서 국민의 소득과 문화선진국이냐, 아니냐의 국가의 서열이 결정되게 된다. 직업은 밥그릇 싸움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이 밥그릇 싸움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초토화되거나 몰락할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 밥그릇 싸움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싸움이며, 모든 교육은 이 밥그릇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을 알고 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전략과 전술은 최고급의 고등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고등사기술은 지혜로 포장되고 이 지혜를 얻기 위한 교육과정은 제일의 천성을 제이의 천성으로 바꾸어야 할만큼 수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업은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보증수표이며,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황제의 왕관과도 같다.
김인갑의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은 제목 자체가 형용모순인데, 왜냐하면 말을 탄 기사들이란 지상전의 승리를 위해서 육성된 병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이란 이미 밥그릇 싸움에서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병사들이며, 그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한 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항해할 수 없는 배는 이미 부도가 난 건설회사 현장의 천막이 되고, 건설회사의 소장은 “얼마전 출항을 앞두고” 사라진 선장이 된다. 건설회사의 사장이나 경영진들은 “수배자 명단 속의 인물”이 되고,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추풍의 낙엽과도 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뱃머리 담당의 사내가 타수가 없는 틈에 키를 잡고, 돛 담당의 사내는 바람이 불지 않자 낮잠에 빠진다. 그밖의 사내들은 노를 점검하거나 조타실에서 화투를 치며 하루를 보내지만, 아무도 선장이 되려고 하지를 않는다. 결국,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의 주인공인 사내는 “덜컹거리던 희망과 함께 오르내리던 곤돌라에서 투신을 시도한다.” 참담하다. 암울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의 기사란 최고의 영광이며, 만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바다로 가는 기사들’이란 동키호테와도 같은 어릿광대이며, 만인들의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영광은 직업의 문제이며, 직업의 문제는 출신성분의 문제이다.
사회적 공간은 폭력적인 서열구조로 구축된 공간이며, 이 폭력적인 서열구조는 생존경쟁에 의해서 결정되게 된다. 직업은 자리잡기 싸움이며, 자리잡기 싸움은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객의 싸움과도 같다. 부자는 경제자본이 많은 자를 말하고, 지식인은 문화자본이 많은 자를 말한다. 경제자본이든, 문화자본이든, 언제, 어느 때나 자본이 많은 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의 직업----이를테면 회장, 사장, 판사, 검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을 최고의 영광의 직업으로 포장하게 된다. 영광은 오점 없는 영광이고, 치욕을 모르는 영광이다. 이 자리잡기 싸움, 이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자들은 더없이 어렵고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하루 밥 한 끼가 최고의 목표가 되는 최하 천민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도 없고, 계급차별이 없는 사회도 없다. 김인갑의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은 천하무적의 용사가 아니라, 이미 싸움도 하기 전에 패배를 하게 된 사회적 천민이자 어릿광대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회적 천민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이자 몰락의 역사이다. 희망도 사치이고, 돈과 명예와 권력도 사치이다. 김인갑 시인은 [바다로 가는 기사騎士들], 즉, 건설현장의 노동자들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들의 패배와 몰락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서,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