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합시다, 성불하세요(한승훈)
[세상 읽기]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필자는 특정한 종교 소속이 없지만 ‘모태신앙’은 있다. 부모님은 그다지 열성적인 신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종교란에는 ‘불교’를 기재했다. 그때의 불교란 어딘가의 신도회에 속해서 활동하거나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는 등의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휴일에 나들이를 나간 길에 유명한 절이 있으면 소액을 시주하고 가볍게 기도를 하는 정도였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가까운 도심 사찰을 찾았다. 늦은 밤까지 화려한 연등을 구경하고, 절 앞 노점에서 잔치국수를 한그릇 사 먹는 연례행사가 이맘때쯤 떠오르는 추억이다.
반면 설법을 듣거나 교리교육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필자는 몇가지 의문을 갖게 됐다. 우리 할머니는 절에서는 왜 “보살님”이라고 불리는가? 절에서의 인사는 왜 “성불하세요”인가 등의 물음이었다. 할머니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과 같은 부류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변 어른들에게 “성불하란 것은 부처님이 되라는 뜻이에요?”라고 물으면, 보통은 “그럴 리가 있겠느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부처님께 빌어서 소원 성취하라는 말이겠지.”
장차 종교학을 전공하게 될 다른 평범한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불교서적들과 경전들을 찾아 읽으며 스스로 그런 의문들을 해소하려 했다. 보살은 스스로 수행에 정진하며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 이상적 인간상이었고, 역시나 성불하라는 말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라는 말이었다. 신도들을 이렇게나 거창한 호칭으로 부르며, 그렇게나 엄청난 덕담을 인사로 나누는 불교는 너무나 파격적으로 여겨졌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서로를 위해 공감하고 헌신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최근 한국 불교계에서 ‘성불’보다는 ‘전법’을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논리의 고전적인 전거는 자신의 성불을 미루더라도 뭇 생명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올해 초 조계종의 신앙단체인 상월결사의 인도순례에서 새삼 강조된 이 슬로건에는 새로운 맥락이 추가돼 있다. 불자는 “타 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이 부처님을 믿게 해서 불교신자로 만들어야 하고, 열성적으로 포교하지 않으면 한국 불교가 “인도 불교처럼” 쇠락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발맞춰 각계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봉은사에서 치러진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에서도 중심 메시지는 “전법합시다”였다.
종교에서 전법/포교/전교/전도/선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라시아의 고대사회에서 종교문화는 지역에 밀착돼 있었고, 정치체나 생활공동체의 지리적 범위를 벗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이후 국가나 제국의 범위 너머까지 적극적으로 퍼져나가는 ‘세계종교’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후대까지 살아남으며 실크로드 교역로와 대항해 시대의 신항로를 타고 지구적으로 전파됐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는 것을 중요한 정체성이자 책무로 삼는 대표적인 전통들이다.
그러나 비종교인을 가입시키거나 타 종교인을 개종시키자는 식으로 양적 성장만을 강조하는 언설 속에서는 신자 수 확대에 대한 욕망 이상의 전망은 찾기 어렵다. 세속화와 탈종교화를 통한 종교 인구의 감소를 적극적인 선교로 극복해야 하고, 그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과거의 중심지가 쇠락했다는 논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것은 1990년대 이후 성장이 둔화한 한국 개신교가 내세웠던 주장이다. 그 결과는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 강화, 폭력적인 선교 행위, 무리한 공적 영향력 확장 시도 등을 통한 사회적 갈등의 증가였다. 별다른 기능 없이 그저 증식하며 해악을 끼치는 세포를 우리는 암이라고 부른다.
가르침의 원점인 초기 경전들을 참고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석가모니는 전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올무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하늘과 땅과 인간의 올무에서 벗어나라. 신과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길을 떠나라.”(상윳따 니까야 S4:1.5) 예수는 복음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는”(누가복음 4:18) 것이라 묘사하였다. 개종시키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