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100주년 글로벌 선언 캠페인(전우용)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고들 하지만, 그분이 만든 글자의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입니다. 글[文]로 가르치는 것이 교(敎)고, 말[言]로 가르치는 것이 훈(訓)이며, 글을 알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인(人)이고, 무지렁이로 땅에 붙어 사는 사람이 민(民)입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글을 모르는 ‘어린 백성’을 위해 특별히 만든 글자였습니다.
28 ‘자(字)’를 만들었다고 했으면서도 이름을 ‘음(音)’이라고 붙인 것은, 온전한 글자라면 뜻까지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입니다. 한자를 익힌 사람들은 이 글자를 언문(諺文, 속된 문자)이나 반글이라고 불렀습니다. ‘반글’이라고 한 것은 ‘반말’과 같은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반말이 ‘낮춤말’로 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상대에 따라 존대, 상대, 평대, 하대, 비대를 선택해야 하는 복잡한 어미 활용법을 익히지 못한 어린이들의 말이었습니다. 어린이나 부녀자에게 보내는 편지 이외의 글을 훈민정음으로 쓰는 것은 스스로 ‘어린(어리석은) 백성임을 인정하는 일로 취급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훈민정음은 ‘나라 글자’라는 뜻의 국문(國文)으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나라가 망한 뒤 일본의 ‘가나’가 새로 국문의 자리를 차지했고, 훈민정음은 ‘가나’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아직 못 배운 식민지 원주민의 제한적 문자 생활을 위한 ‘조선문’이 되었습니다.
1913년, 주시경은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큰 글, 온전한 글이라는 뜻이고, 대한의 글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이름에는 한국인들 스스로 훈민정음을 ‘반글’로 천대했던 역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정신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이후 지방의 조선문 강습회 등에서 간간이 한글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지만, 이 이름은 1920년대 중반까지도 일반화하지 못했습니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新民社) 회원들이 서울의 음식점 식도원에 모여 ‘훈민정음 반포 팔회갑(480년)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당시에는 100년 주기의 세기(世紀)보다는 60년 주기의 주갑(周甲) 또는 회갑(回甲)에 익숙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이날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를 치른 지 5달쯤 지난 때이기도 했습니다. 왕조의 유산이 스스로 한국인들 곁을 떠나간 뒤였습니다.
참석자들은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매년 거행하기로 하고 기념일의 이름을 ‘가갸날’로 정했습니다. 당시에도 가갸거겨보다는 가나다라를 더 많이들 사용했을 터이나, 그 순으로 하면 일본 문자인 ‘가나(かな)’와 구별할 수 없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가갸날 행사는 이날로 끝이었습니다. 이듬해 조선어연구회가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면서 ‘한글’을 훈민정음의 새 이름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총독부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글의 공식 이름은 그냥 ‘조선문’이었습니다. 한글이 국문(國文)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공문서에 한글 전용 원칙이 확정된 뒤의 일이었습니다.(이상, 졸저 <잡동산이 현대사> 한글 항목 참조)
저는 당시 조선어학회와 신민사 회원들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과 ‘조선문’이라는 이름을 모두 거부하고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포한 것은, 중세성과 식민지성에서 해방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은, 이 문자를 옭아매고 있던 신분차별과 민족차별의 굴레를 벗겨내는 구실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한글’은 이 문자를 사용하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 효용을 갖는 문자로 정착했습니다.
저는 세종학당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자마자 EBS를 찾아가 ‘한글날 제정 10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고, 제작진에게는 ‘한글’이라는 새 이름 선포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이 충분히 전달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일은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가, 훈민정음, 언문, 조선문 등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된지 100년이 되는 한글날입니다. 세종학당재단은 50일 전 ‘한글날 100주년 글로벌 선언 캠페인’을 시작하여 계속 유튜브에 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참여하여 어떤 말씀들을 했는지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