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나뉘어도 민족은 나뉠 수 없다.
한반도는 지구에 하나 남은 분단국가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반도를 통일해야 책임이 있습니다. 두 동강이 난 조국을 이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의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슬픔입니다. 남북을 나누는 38선이나 휴전선은 사람이 그은 것입니다. 땅은 그렇게 나눌 수 있지만, 민족은 나눌 수 없습니다. 반백 년이 넘게 나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서로를 못 잊고 그리워하는 것은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합니다. 백의, 흰옷은 평화의 색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평화의 민족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이 만주나 시베리아 땅에서 서로를 죽이고 살리고 하던 중에도 한국사람은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일본사람과 중국사람은 모두 칼을 가지고 다녔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싯돌을 품고 다녔습니다. 얼어붙은 만주와 시베리아 땅에서 불을 붙이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지요.
일제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참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통일되지도 않았고 평화의 국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국토의 허리가 두 동강 나고 그나마 반쪽은 공산주의의 어두운 세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남북이 갈라져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평화통일을 이루어 온전한 주권을 되찾아야만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일컫듯 우리 민족은 세계에 평화를 전달하는 배달부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에는 저마다 타고난 뜻이 있습니다. 백의민족은 흰옷은 낮이나 밤이나 눈에 잘 뜨입니다. 어두운 밤중에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색깔은 흰색뿐입니다. 우리 민족은 밤이나 낮이나 세계평화를 전달하고 다니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이 가로놓여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휴전선을 제거하면 그 앞에는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더 큰 휴전선이 놓여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온전한 평화를 얻으려면 러시아와 중국이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까지 뛰어넘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릴 때에 남김없이 몽땅 흘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의 찌꺼기까지 몽땅 흘러 내보내야 미련이 남지 않고 깨끗이 정리됩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마지막까지 이겨내고 말끔히 청산해야만 고난이 끝납니다. 무엇이든지 완전히 청산하고 나면 다시 되돌아오는 법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고통 없이는 민족의 온전한 주권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다들 평화통일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감히 평화통일이란 말을 사용하기조차 겁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줄곧 평화통일을 주장해왔습니다. 지금도 누가 “어떻게 해야 한반도가 통일됩니까?”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 사람보다 더 남한을 사랑하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됩니다.”
1991년 목숨을 걸고 북한 땅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도 모두 그런 사랑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김일성 주석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경제협력, 금강산 개발, 한반도 비핵화,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반공주의자가 공산국가에 들어가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나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전 평양의 만수대 국회의사당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주제로 두 시간에 걸쳐 강연을 펼쳤습니다. 그날 내가 북한 지도층을 상대로 힘주어 말한 것은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입니다. 김일성주의로 무장된 북한의 지도층을 앉혀놓고 내식대로 말해버린 겁니다.
“남북은 반드시 통일돼야 하는데 총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북통일은 무력으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6・25동란도 실패했는데 또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으로도 남북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통일이 될까요? 이 세상은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힘만으로 어쩌지 못합니다. 전쟁과 같이 악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가 된 주체사상으로는 남북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통일된 조국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주의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우리에게 통일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통일은 우리의 숙명이자 우리 시대에 반드시 못한다면 영원히 조상과 후소들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남북을 통일하는 데는 좌익도 안 되고 우익도 안 됩니다. 그 두 가지 사상을 조화시킬 수 있는 두익사상(頭翼思想)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길을 가려면 전 세계 앞에서 남침한 사실을 사과해야 합니다! 북한이 남한에 심어놓은 고정간첩이 2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자수하라는 지령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는 교육을 하여 남북의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애국자들로 만들겠습니다.”
나는 의사당 테이블 주먹으로 내리치며 강력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내 연설을 듣고 있던 북한 측의 윤기복 위원장과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습니다. 그런 발언이 내게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모르지 않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 내 연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곧바로 보고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일부러 그렇게 말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수행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북한 사람들 중 몇몇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느냐고 정색을 하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연설 내용이 너무 강해서 저들 분위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며 식구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를 왜 왔는가? 북한 땅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은 안 하고 가면 천벌을 받는다. 설령 오늘 연설이 빌미가 되어 김 주석을 만나지 못하고 쫓겨난다 해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 후 1994년 7월 8일 갑자기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남북관계는 최악의 국면이었습니다. 한국 땅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배치되고 미국에서는 영변의 핵시설을 파괴시키라는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금세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 상황이 금박했습니다. 북한은 일체의 외국 조문객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형제의 의를 맺었던 김 주석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박보희를 불렀습니다.
“지금 바로 조문사절로 북한으로 가라.”
“지금 북한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힘든 것은 안다. 하지만 무조건 들어가야 해.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서라도 반드시 들어가서 조문하고 와.”
박보희는 베이징으로 건너가서 목숨을 걸고 북한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문 총재의 조문사절은 예외로 하여 평양에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평양에 들어가 조문을 바친 박보희를 만난 김정일은 “부친께서 문총재님이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고 계신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1994년 한반도는 언제 어디서 펑 하고 터질지 모르는 위기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김주석과 맺은 인연 덕분에 한반도의 핵위기를 무사히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때 조문은 단순한 예절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김주석과 만남을 소상하게 소개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는 내 신의가 통한 덕에 그의 사후에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도 우리가 보낸 조문사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면 넘지 못할 벽이 없고 이루지 못할 꿈이 없습니다.
나는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으로 여기고 찾아갔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이 김일성 주석을 넘어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통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북한과 우리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어 남북관계가 어려워질 때마다 힘을 다해 물꼬를 트는 역할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김일성과 만나 진실한마음을 통하여 신뢰를 쌓은 것이 그 뿌리입니다. 신뢰는 그렇게나 중요합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후 우리는 북한에서 평화자동차공장을 비롯해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는 평화자동차 광고탑이 8개나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평화자동차공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던 재개 인사들은 보통강 호텔에 묵었지요. 북한 땅에서 일하는 우리 식구들은 일요일마다 세계평화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일들은 남북의 평화적인 교류와 통일을 위한 평화활동들이지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 민족적인 사랑으로 남북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