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왼쪽다리가….”
막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가 환자의 왼쪽다리를 쓰지 못할 것 같다면서 다시 외과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사고발생 후 신속하게 응급조치한 덕분에 과다출혈을 막을 수 있었고, 다행히 환자가 조수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치명적 부상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의사는 덧붙였다. 의사의 사무적 말투가 다행이란 건지, 불행이란 건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다.
정후는 회복실로 옮기는 현주를 바라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꽝, 둔탁한 굉음에 몸을 돌렸을 때 K5승용차는 20여 미터 떨어진 전신주까지 밀려가서야 멈췄고 승용차를 들이받은 덤프트럭은 잠깐 후진하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덤프트럭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을 때까지도 차량번호는 식별할 수 없었다.
“현주야!”
제일 먼저 정후가 달려가 조수석문을 열었을 때 현주는 정신을 잃은 채 문 바깥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현주의 이마에서 흐르는 흥건한 피, 조수석시트와 뭉개진 차체전면에 끼어 빠지지 않는 현주의 다리. 정후는 당시의 악몽 같은 상황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현주야.
정후와 현주가 만난 건 이틀간에 걸쳐 폭설이 내리고 닷새가 지나서였다.
“오늘도 저한테 시간내주지 않을 거죠?”
현주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매장이 휴일인 날이면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현주와의 만남이 여러모로 의미가 없었기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녀를 피해왔었다.
“근처에 왔다가 전화 드렸어요. 저녁식사 같이해요.”
근처에 왔는데 차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현주를 만났다.
“잘 지냈지? 더 예뻐진 거 같은데. 첫눈 오는 날 못가서 미안해.”
“얼마나 많이 기다린 줄 아세요. 귀 안 가려웠어요? 내가 막 욕했는데.”
“장사는 잘 돼?”
귓속을 후벼 파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통 안돼요.”
태화물산을 퇴직한 현주는 일산 T플라자에 아웃도어 매장을 얻어 B브랜드 등산레저용품 등을 판매했다.
“너무 오래 가족과 떨어져 지냈잖아. 고향에 내려가서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이나 가지 그래?”
같이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족을 두고 홀로 객지생활을 하는 현주가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날더러 집에 가라고요?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데…, 이런 모습으로 시집이나 가란말예요?”
현주는 말도 안 된다는 양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핏, 폐 끼치지 않을 테니까 내 걱정일랑 마세요.”
“얘가 완전히 맛이 갔군. 말도 막하고 말이야.”
“이젠 회사상사도 아닌데요, 뭐!”
“야! 그렇다고…, 내참! 어이가 없어서.”
와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현주는 주절주절, 술주정하듯 길지 않은 독백을 뱉어냈다.
“제가 여기 남아있는 건요.”
현주가 잠깐의 인연에 마음을 두고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오직 한사람 때문에 제가 이러고 있다는 게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요.”
현주 나름대로 추구하는 바가 있을 테고 또 정태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한테 전혀 관심도 두지 않으시지만 전 그렇지 않아요. 어떤 때는 이러는 제 자신이 너무 미워서….”
그런 현주가 지금은 내게 심정적으로 상당히 기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나 현주야. 네가 애처롭기는 하지만 우린 이미 헤어졌어. 대단한 만남도 아니었지만… 미안하지만 처음 말했던 대로 너를 완전히 지우련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지난날을 훌훌 털어버려.
살짝 술기운이 오른 현주는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다. 전철역까지 바래다주고 가려다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이사 간 일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곽순환도로에서 자유로 분기점으로 빠져나왔을 때 현주는 머리가 아프다며 눈을 떴다. 도로변에 보이는 약국 앞에 차를 세웠다. 두통약과 피로회복제를 사려는 순간, 약국 바깥에서 들리는 커다란 충격음에 약사도 깜짝 놀라 병을 떨어뜨렸다.
“바로 119에 연락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뛰쳐나갔는데 승용차는 저만치 전봇대에 멈춰 서서 반쯤 찌그러지고 말았다. 현주가 앉은 조수석 문을 간신히 열었을 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규칙한 호흡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 그건 단순사고가 아니었어, 의도된 거야. 덤프트럭은 나를 목표로 돌진한 거였어.
정후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현주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도 사고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짚어나갔다. 정차된 차의 운전석을 노리고 충돌했다는 건 운전자에게 위해를 가하려했음이다.
충돌현장에는 멈추려고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도 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덤프트럭은 꽤나 긴 길을 뒤쫓아 왔었다. 사고현장의 약국이 있는 길은 통행량이 거의 없었고, 아주 잠깐 동안 약국에 들어간 사이 멈춘 차를 덮쳤다.
- 누구지? 왜지?
유럽에서 귀국한 지 두 달 남짓한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다. 조현욱 회장님의 납치 그리고 죽음. 그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또 이런 일이 생겼다. 정후는 두 사건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 이정후와 조 회장님…. 그렇다면 태화물산?
정후는 태화물산과 관련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가능성들을 조합하고 추론해나갔다.
정후는 극구 만류하는 대주주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태화물산, 이젠 더 이상 열정을 바칠만한 곳이 아니다.
윤아 역시 퇴직과 동시에 태화물산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오정태 사장에게 넘겨주었다. 오 사장은 조현욱 회장의 장례를 치루고 열흘이 지나지 않아 윤아의 고모이자 전임 조 회장의 동생 조경화와 이혼했다. 퇴직을 전후해 정후는 잠이 들면 정태의 모습이 나타났고, 시선이 꽂이는 곳마다 그 자리에 정태가 있었다.
- 조 회장과 윤아의 주식을 헐값에 인수하고도 선심 쓰는 척 하는 꼴이라니.
다시 정태 옆으로 경화고모의 실루엣이 어둠을 뚫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혼하세요, 고모! 고통스러운 걸 참아가면서 그런 사람이랑 같이 살 이유가 뭐예요?”
갈퀴처럼 다그치는 말에 고모는 숨을 죽였다. 평소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언행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고모가 자존심까지 침해당하면서 허울뿐인 결혼생활을 이어간다는 게 화가 나요.”
비음을 토해내던 고모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자 오히려 냉정해졌다.
“고모가 어떻게 결정하든 이 시간 이후로 저한테 고모부 오정태 사장은 존재하지 않아요. 내 기억에서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거예요.”
그날, 참고 또 참아냈을 고모의 곪은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지만 정후는 지금에 와서도 이혼을 종용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처음만나 줄곧 친조카처럼 보살펴준 다감한 고모가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의 아내라는 사실이 모멸감까지 안겨주는 것이었다.
곪고 짓무르다가 굳으려던 상처가 자꾸만 바늘처럼 뚫고나와 또 다른 상처로 전이됐다. 허위와 위선으로 이어지는 결혼생활은 이혼만 못하다고 생각해요. 도저히 아니라고 판단되는 건 그것이 설령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하더라도 깨뜨리는 게 낫다고 봐요.
벌레 같은 놈과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고모는 더 불행해진단 말입니다. 불행의 틀이 된다면 그건 이미 가치를 상실한 결혼이다. 유지할 이유가 없다. 정후는 그렇게 단정했다.
- 고모! 그렇지만 얘는 용서해주세요. 얜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정후는 힘이 들어가 충혈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손등으로 두 눈을 비볐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고모와 현주가 엮여서 떠오르자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얹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현주야! 깼구나.”
핼쑥해진 현주모습을 보는 정후의 속이 다시 미어진다. 내 다리가 어떻게 된 거죠? 왜 내 다리가 없어졌죠? 그저께, 마취에서 깨어난 현주는 왼쪽무릎 밑의 다리가 없는 걸 알고 사색이 되는가싶더니 침대시트를 끌어올려 얼굴을 덮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라는 게 이런 걸까. 정후는 시트 속에서 들썩이는 현주를 보며 그런 아픔을 느껴야 했다. 소리 내서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을 현주를 부둥켜안고 오히려 정후가 오열을 했다.
“저 때문에 그렇게 슬피 울 줄 몰랐어요.”
“현주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고였어요. 부장님 탓이 아녜요.”
겨우 이틀 만에 마음을 추스른 것처럼 보이는 현주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현주는 그게 단순한 사고인 걸로 알고 있다. 정후는 아직 현주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죽이려다가 네가 죽을 뻔했어. 현주가 엄한 피해자였음을 밝히고 그녀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려면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캐내야 한다.
“현주야!”
“…….”
정후는 현주를 불러놓고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두 손으로 현주의 손을 모아 쥐고 눈시울만 뜨거워지는 자신이 미워 분노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