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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때 묻은 그릇(담론)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시詩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맹자 - 설약說約)
브로델 Fernand Braudel은 구조주의와 역사를 결합해서 독특한 사관史觀을 피력했습니다. 바다의 심층, 중간층, 표층이 있듯이 피라미드의 하부에 해당하는 부분을 구조사 構造史라고 합니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중간 부분이 국면사, 맨 위의 상층 부분이 사건사에 해당합니다. 사건사는 바다로 치면 해면의 파도에 불과한데 주로 정치적인 변화가 이에 속합니다.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는 까닭은 장기長期 지속의 구조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다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브로델이 이야기하는 장기 지속의 구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표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옳습니다. 고전과 역사는 비켜 갈 수 없습니다.
<주역>은 시詩, 서書와 함께 삼경三經에 듭니다. <사기>'태사공 자서'를 보면, 시는 풍風에 장長하다고 했습니다. 또 서는 정政 즉 정치에 장하다고 했습니다. 장長하다는 것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易은 음양, 오행, 사시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變化를 읽는 데 장하다고 합니다.
<주역>은 세계의 운동에 관한, 오래된 철학적 서술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만 점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을 엿보는 관상이나 사주팔자와 달리 점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판단을 돕기 위해 하는 최후의 행위입니다. 점이 지금 생각으로는 미신이지만 그 당시엔 과학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은 우주 구성의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또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합니다. 영화 <인터 스텔라>에서는 웜홀을 지나고 블랙홀로 들어가는 체험을 안겨 주면서 상대성원리와 중력을 설명합니다. 인과율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이 불가합니다. 카를 융Carl G. Jung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아니라 동시성의 원리가 작용한다고 하며 <주역>의 점이 예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강의에서는 <주역>의 독법 讀法에 주목합니다. <주역>은 수많은 세상의 변화를 비슷한 것끼리 64개의 패턴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64괘 하나하나가 그러한 경로를 보여줍니다.
공자가 <주역>을 끈이 세 번 끊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님과 친구분들의 대화를 회상해 보면 그 시절까지도 <주역>은 사유의 보편적 틀이었던 셈입니다.
<주역>의 독법이란 괘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독법을 <주역>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독법 자체가 보여주는 사유의 틀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내가 '주역 독법의 관계론'이라고 개념화하였습니다. 우리 강의의 핵심 개념이 '관계'라고 밝혀 두었습니다. 탈근대의 과제가 바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강의의 핵심 개념인 '<주역> 독법의 관계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위位'는 효爻의 자리입니다. 효를 읽을 때에는 먼저 그 자리(위)를 읽습니다. 각 괘에는 양효의 자리와 음효의 자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에 있어야 능동적인 운동을 하고, 음효는 음효의 자리에 있어야 수동적으로 운동하는 것을 '득위'했다고 하고, 효가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한 경우를 '실위'했다고 합니다. 효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효가 처해 있는 자리와의 관계를 중시하기에 관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의 70% 자리가 득위의 비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능력과 권력의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비比'입니다. 비는 바로 옆에 있는 효와 음양 상응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응應'입니다. '비'가 바로 이웃한 효와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해서 응은 하괘와 상괘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으로 관계성의 폭을 조금 더 넓게 보는 것입니다. <주역> 독법에서는 응을 위보다 더 높게 칩니다. 효가 실위한 경우라도 정응正應이면 허물이 없다(无殆)고 합니다. 관계의 범위를 키우면 그만큼 더 힘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중中'입니다. 중은 하괘의 중과 상괘의 중을 중시하는 독법입니다. 특히 5효의 중이 득위하고 정응인 경우를 중정中正이라고 하여 대단히 높게 평가합니다. 중을 중시하는 까닭은 관계성이 극대화되는 자리이며, 또한 가장 안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안정감입니다. 노인들이 늘 충고하기를 '중간만 가라', '모나면 정 맞는다'고 합니다. 3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주역>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식틀입니다.
여기 보여드리는 이 괘는 지천태괘라고 합니다. 이 태괘는 매우 좋은 괘로 읽힙니다. 바로 하괘와 상괘의 관계 때문입니다. 땅인 곤괘가 위에 있고 하늘인 건괘가 아래에 있습니다. 땅의 기운은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올라갑니다. 상하의 기운이 중간에서 서로 만나서(交) 통通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또한 태괘는 혁명을 합리화하는 논리로도 읽힙니다.
<주역>의 관계론은 대성괘와 대성괘의 관계를 보는 독법에도 나타납니다. 주역에는 64개의 대성괘가 있습니다. 태괘의 다음 괘는 지천태가 역전된 천지비괘입니다.
비는 경색된다, 막힌다는 뜻으로 좋지 않는 괘로 봅니다. 천지비괘는 하늘인 건괘가 위에 있고 땅인 곤괘가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비괘를 태괘와 대비하는 경우에는 또 다르게 읽힙니다. 태괘는 초효부터 그 기세가 점점 상승해 가다가 후반부에는 서서히 하강합니다. 반면에 비괘는 초반에는 고난을 겪다가 후반에는 그 기세가 서서히 상승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처음 에 나쁘고 나중에 좋은 선흉후길과 처음에 좋다가 나중에 나쁜 선길후흉 중에서 어느쪽을 선호합니까? 조삼모사, 조사모삼은요?
맨 위의 상효 하나만 양효이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인 산지박山地剝괘입니다. 박剝은 박탈당하다,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단 한 개 남은 양효마저도 언제 음효로 전락될지 모르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상효의 효사에 내가 자주 소개하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 나옵니다.'씨 과실'은 먹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절망의 박괘 역시 다음 괘와의 관계에서 '희망'의 괘로 의미가 역전됩니다.
맨 아래 효만 양효이고 초효부터 5효까지 모두 음효인 지뢰복괘입니다. 박괘가 역전된 모양입니다. 최후의 석과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그림입니다. 석과가 땅 속의 우레 즉 잠재적 가능성으로 묻혀 있습니다. 박괘는 복괘와의 관계 속에서 '희망'의 괘로 바뀝니다. 석과는 새봄의 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됩니다.
이처럼 <주역> 독법은 효와 자리, 효와 효, 소성괘와 소성괘, 대성괘와 대성괘 등 중층적인 관계를 읽는 것입니다. 좋은 괘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 가지고 길흉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64괘 384효, 4096개의 효로 이루어진 <주역>은 무수한 관련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적 사고, 불변의 진리, 배타적 정체성 등 근대적인 인식틀에 갇혀 있던 나에게 <주역>은 충격이고 반성이었습니다. 나아가 비근대를 조직하고 탈근대를 지향하는 귀중한 디딤돌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장횡거는 <주역>의 관계성을 대대待對원리로 설명합니다. 태극기의 리쾌는 화, 불입니다. 또 감괘는 물입니다. 장횡거는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대대원리라고 합니다. (*호장기택- 서로 감추어 준다, 잘 모신다)
또 하나 <주역>은 소수자 관점입니다. 양효가 많은 것이 음괘이고, 음효가 많은 것이 양괘로 마이너리티 우선입니다. 소수자가 결정권을 가집니다.
다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미완성'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64괘 중에 제일 마지막 괘가 완성이 아닌,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리괘(상)와 감괘(하)가 결합된 화수미제火水未濟괘입니다. '꼬리를 적시는 작은 실수가 있는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주역>은 세계에 대한 인식틀입니다. 윤리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세상의 변화도 궁극적인 완성이란 없습니다.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이고, '미완성'은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이 네 가지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 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덕목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단연 겸손입니다. <주역>의 지산겸괘에서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주역>이 수천 년 전의 사상이지만 생각하면 대단히 친숙합니다. (* 고암 이응노 선생의 일화)
노인들은 고암 선생의 경우처럼 사람을 관계 속에 놓습니다. 이러한 정서가 <주역>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재에서 <주역>을 '물 뜨는 그릇'에 비유했습니다. 바닷물을 그릇으로 뜨면 그릇에 담긴 물은 바닷물이기는 하지만 바다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물은 어차피 그릇으로 뜰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그릇이긴 하지만 그나마 세계를 뜨기 위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역>의 인식틀이 친숙하다는 것은 우리가 집집마다 비슷비슷한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히 린R.J.Lynn이 <주역>을 'The Classic of Change (변화의 고전)'이라 번역한데서 알 수 있듯이 변화를 읽는 틀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인 것은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불변의 어떤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화와 불변에 대한 생각은 그만큼 오래된 주제입니다.
<주역>에서는 변화를 '역이불역 易而不易 불역이대역 不易而大易'으로 요약합니다. <주역>은 우리의 손때 묻은 친숙한 그릇이고 그 관계론은 탈근대의 사상적 보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이기도 합니다.
담론 PP 57 ~ 75 [출처] 4 손때 묻은 그릇|작성자 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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