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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저자가 그동안 해왔던 누군가의 문집을 번역한 것이라고 예단했다. <체수유병집>이라는 낯선 표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체수(滯穗)나 유병(遺秉) 이 모두 수확할 때 떨어진 이삭을 일컫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책의 ‘서문’을 읽었을 때, 비로소 저자가 이러한 제목을 붙인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또한 한문학을 전공하는 그의 기질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달변을 옆에서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전의 번역이나 옛글을 편집해서 엮은 것이 아닌, 저자의 생각들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내가 아는 저자는 달변가이다. 학회가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생각들을 꺼내놓으며 좌중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에 맞추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들이 저자가 평소 생각했던 바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고 하겠다.
평소 저자는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는 습관이 있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저자의 연구실에 들른 적이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연구실이 책과 온갖 자료들로 가득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각종 프린트물과 메모들을 모은 파일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모습이었다. 그러한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그동안 왕성한 결과물을 쏟아냈던 것이리라. 정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충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연구 태도라 할 것이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항목에서 저자의 학문적 이력과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2부에서는 그가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다룬 글들만으로 채워져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주로 공부를 하면서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고, 그러한 자료들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책을 쓰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에도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종종 행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자료를 모아 엮은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철저히 자기화하여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그동안 고전 번역과 옛글의 편집에 매달렸던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나에게는 4부에 있는 ‘논문 작성과 텍스트 분석’이라는 내용의 글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최근 들어 대학원생들의 학위논문 작성을 지도하면서, 논문에 대한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다. 단지 학위논문만이 아니라, 소논문 하나 쓰는 것도 버거워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 글에 내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내용들이 다 담겨있었다. 앞으로는 이 글을 읽힘으로써, 글쓰기에 대한 기본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앞으로도 저자의 생각이 담긴 글들이 보다 많이 출간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게 하는 계기였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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