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유 ***
비유는 성경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친숙한 상황을 설정하여 빗대어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비유 이야기들은 영적인 진리나 종교적인 원리 또는 윤리적인 교훈 등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것들은 그림으로 바로 그려낼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한 언어를 사용하며 대체로 속담이나 격언, 또는 대화문이나 짧은 이야기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복음서에는 비유 이야기로 분류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적게는 약 35개, 많게는 72개 정도의 비유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전해 주시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비유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설명하시기 위해 지혜가 담긴 격언이나 가공의 짧은 이야기들을 많이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에 사용된 소재들은 대부분 당시 팔레스티나의 환경이나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그분께서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들에는 씨 뿌리는 사람과 씨와 토양, 씨앗과 성장,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가지, 반석 위에 지은 집, 포도밭 주인과 일꾼들, 그물, 겨자씨, 누룩, 밀과 가라지, 양과 염소, 목자와 양, 착한 사마리아인, 바리사이와 세리, 주인과 종, 끈질긴 친구, 간청하는 과부와 재판관, 집사, 되찾은 아들, 어리석은 부자, 부자와 라자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도둑, 혼인 잔치, 되찾은 양과 은전, 보물과 진주 상인, 탑, 탈렌트, 돈 등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들 속에 담겨진 핵심적인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다. 비유 이야기들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격과 도래 그리고 그 가치와 성장 나아가 그 나라가 요구하는 희생 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비유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이 설명된 경우도 있고 그분을 철저하게 따르라는 요구가 주어진 경우도 있다.
그 밖에도 노동, 봉사, 보상, 기도, 이웃 사랑, 겸손, 세속적인 부, 길 잃은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종말에 대비하여 깨어 있음, 심판 등에 관한 가르침들도 비유의 형태로 전달되었다. 다시 말해 비유의 형태로 된 이야기들은 하느님께서 오실 때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자기중심적이거나 탐욕스러웠던 지난날의 그릇된 삶을 포기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한 것들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전해 주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비유의 형태로 된 이야기들은 그저 재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복음 선포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 이야기를 들었거나 듣는 사람들은 그에 응답해야만 한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 앞에서 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에 담겨 있는 의미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당신의 직무와 그것이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설명해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그분의 적대자들은 그분의 비유 말씀 역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직무를 아무런 의미 없이 바라본 사람들에게는 그분께서 전해 주신 비유 말씀들 역시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적재적소에서 비유의 형태로 가르침을 전해 주셨지만 그분이 비유의 형태를 처음으로 사용하신 분은 아니다. 비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예는 구약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비유 이야기들과 일련의 연관성을 갖고 있다
----------------------------------------------------------------------------------------------------------------------------------------
*** 예수의 말씀 ***
1. 하느님의 나라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처음 두 복음서들은 이것을 그의 설교의 요약으로 첫부분에 놓았고, 그의 선교의 중심이며 지배적인 주제로 규정했다(마태 4:17, 마르 1:15).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오가 선호했던 하느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곡한 표현)는 그의 '교리 체계'(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의 끝부분이 아니다. 기초가 되는 유대 단어(말쿠타)는 하느님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신약성서〉 본문들에 퍼져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공간적 의미('……에 들어간다')로도 쓰인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기대는 조상들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세상의 창조자, 주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믿음에 기초하여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믿음에 현재 세상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가 통치하여 사악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왕권은 단지 미래에 나타난다는 모순된 경험이 연합되었다. 많은 집단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묵시적 사변 속에 우주적 기대로 확장되었지만, 다윗적 메시아, 즉 민족의 정치적 대망의 형태를 지니기도 했다.
각 경우에 그것은 마지막 날과 연관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순수하게 종말론적, 즉 미래의 의미를 가지며, 현재 세상의 시대가 끝나고 극복되는, 외부로부터 이 세상에로 갑자기 침투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제들은 복음서 전승에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에 꼭 들어 있다.
예수는 결코 하늘나라를 개인적 인간 영혼의 순수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바꾸지 않았고,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를 세계 내적인 진화적 과정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목표로 보지 않았다. 그의 몇 비유들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예를 들어 씨앗과 추수, 누룩, 겨자씨의 비유). 그러한 경우에서 유기적 과정이라는 근대적 사고가 본문들에 잘못 도입되었다. 그러나 성서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움과 기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여기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10, 루가 11:2)라고 기도한다. 예수의 진복팔단과 재난 예언(루가 6:21~26)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와 애통하는 자는 아직 하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과 뜻이 악용되고, 그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고, 사람들은 파멸시키려는 시험에 의해 위협당하는 매우 곤궁한 상황을 전제한다.
예수의 설교에 따르면, 실현된 종말론(즉 "마지막 때가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영국 성서학자 C.H. 도드의 견해)이라기보다 '실현되는 과정 속에 있는' 종말론(독일 성서학자 요아힘 예레미아스의 견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 세계에 빛을 던지고 말씀과 행위를 통한 예수 자신의 사목에서 보여진다. 이 점에서 그의 말씀은 그 시대의 종말론과 다르다. 그는 민족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거나 장려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언한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하려는 열심당의 노력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율법의 경건한 준수(바리사이파, 쿰란 분파)로 환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현재 세계의 종말과 새 '에온' 혹은 시대의 여명(루가 12:56)을 자세히 묘사하려는 그 시대의 묵시적 공상가들의 환상적 시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묵시사상). 그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계속하지도 않았다.
* 묵시사상(apocalypticism , 默示思想) 급박하고 극적이며 파국적인 하느님의 역사 개입, 만인의 심판, 신실한 선민의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통치한다는 등에 초점을 맞춘다. BC 6세기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이란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묵시사상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종말론적 사상과 운동에서 더 풍성하게 발전했다. |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소개하거나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은 실제로는 하느님 자신이 세상을 해방하고 세상에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려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오고 있으나,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에 이미 현존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더이상 신성한 영역 안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위엄의 포로가 아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사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의 징조를 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예수의 행동에서 계시된 것처럼, 하느님은 아버지, 돕는 자, 해방자이며 지금 벌써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시대의 변화가 여기 있으며, 지금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시간이라고 외쳤다(이사 35:5, 마태 11:5). '여기 그리고 지금'은 예수의 말씀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특성은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죄짓고 버려진 자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자'의 선입견에 따르면 마지막 구원에서 가업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유가 어떻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행하는지에 대해 썼고, 그를 주님과 왕으로 보여준다(마태 18:23~, 20:1~, 루가 15).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이미지들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명백히 예수 전승의 가장 오래된 줄기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이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했고, 그럼으로써 하늘나라는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경건한 자들을 성나게 했다.
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 안에 예수가 회개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구원의 시간을 놓치지 말도록(루가 14:16~, 13:6~),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마태 13:44~), 어린아이처럼 영접하도록(마르 10:15), 자신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공로로 실현할 수 있다는 자만을 가지지 않도록(마태 13:24~, 마르 4:26~) 모두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또한 지혜롭게 깨어 있고(마태 24:45~, 마르 13:33~, 루가 16:1~, 12:35~) '자기의' 허구를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예수의 설교에서 회개는 필수적인 것, 선결조건,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의 명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움의 결과(마태 4:17)이고 자신을 그의 미래에로 개방하는 것, 뒤로의 운동이 아니라 앞으로의 운동이다. 이렇게 예수는 미래와 현재를 떨어질 수 없게 함께 묶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 이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지 묻는 묵시적인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을 묻는 사람은 그가 미래도 현재(즉 이미 밝아오는 구원으로서의 하느님의 미래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 안에 있는 자신의 현재)도 적절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구원의 때가 밝아오는 증거로서 '표적들'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마태 12:38~, 마르 8:11). 회개의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적이었듯(루가 11:29~) 예수 자신이 '표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표적은 의미 있는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지시이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메시아성'을 가르침의 주제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그의 말씀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론의 특징을 가진 요한의 '나는……이다'라는 어투가 공관복음 전승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예수가 결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적 예언자와 카리스마적인 기적행위자로서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 하느님의 뜻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은 그 자체가 활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힘과 도전의 장이 된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지 그 시간을 계산하는 노력을 예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도록 요구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련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계명들은 어디에서도 예언자적 말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수가 그것들을 하늘의 상급이나 마지막 심판 때의 저주와 연결시킬 때조차도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마태 24:24~, 루가 19:11~). 하느님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요구들을 '중간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와 시대의 변화를 동반하는 우주적 파국 가운데 놓여 있는 세계 상황에서 예외적인 율법들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그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논증을 소멸하는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현존하는 세계, 〈구약성서〉의 계명들, 창조,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경험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십계명).
* 십계명(Ten Commandments , 十誡命, 모세의 십계, 십계) <출애굽기>, <신명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계시하고, 이것을 2개의 돌판에 새겨서 주었다고 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 20장 2~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거의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한글 공동번역 성서).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십계명의 수는 교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 유대교에서는 서문("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을 첫 계명으로, 그리고 거짓 신들과 우상을 금하는 계명을 합쳐서 둘째 계명으로 본다.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는 처음 2개 계명을 하나로 보고, 마지막 계명 가운데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는 조항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못한다는 조항을 각각 한 계명으로 인정하여 10가지 계명을 유지했다. 루터도 이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스 정교회와 개신교는 서문과 거짓 신에 대한 금지를 첫 계명으로 보고, 우상의 형상을 만드는 것에 대한 금지를 둘째 계명으로 본다(로마 카톨릭교, 루터교, 동방정교회, 개신교, 개혁교회). 십계명의 연대를 추정하다 보면 십계명을 쓴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몇몇 학자들은 〈출애굽기〉·〈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이 모세와 시나이 산 계약(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짐)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BC 16~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십계명이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제작 연대를 아모스와 호세아 시대(BC 750) 이후로 추정하는데, 만약 십계명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율법과 제사 전승을 요약한 것이라면 이보다 더 후대에 해당하는 셈이다. 십계명은 고대 근동의 세계관과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도덕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야훼와 관계를 맺으면서 받아들인 조건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신명기〉에서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십계명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수정되었음을 시사한다. 십계명은 13세기까지는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으나 13세기부터는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집 속에 포함되었다. 개신교 교회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교훈집들이 생겼고 십계명은 신앙교육,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중요한 부분으로 교리문답서에 포함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공개된 혹은 숨겨진 근거가 되며,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율법 전통의 특성에 상응하여 그는 단일한 말씀과 개인적 명령에 연관된 해석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체계적인 '도덕적 가르침'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계명들을 구체적인 예로, 즉 동료에 대한 행동(살인과 분노, 간음과 이혼, 맹세들, 보복,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의식적 계명(안식일·기도·금식·모독에 관하여), 다른 예식 의무를 설명했다.
예수는 항상 이 계명들의 근원으로 나아갔고,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율법 안에서 밝혔다. 예수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근원이 아니며,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중재하는 절대적인 권위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더이상 거룩한 문자와 전통에 위장되지 않는 하느님의 실재와 또한 유사하게 위장되지 않은 사람의 실재 사이에 대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경건한 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과 바리사이파와 같이(루가 18:11~) 그것들을 계속 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을 더이상 속일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인간 자체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한 고전적 구절은 산상수훈(마태 5:21~48)과는 정반대이다.
* 산상수훈(산상설교, Sermon on the Mount , 山上說敎) 〈마태오의 복음서〉 5~7장에 나온다. 이것은 종래의 보복법과는 달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새로운 사랑의 법에 기초를 둔 제자직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가 제자들과 많은 청중에게 행한 설교이다. 산상설교에는 '8가지 복'(가톨릭에서는 '진복팔단'이라고도 함)과 주기도문을 비롯해 유명한 그리스도교 교훈과 격언이 많이 담겨 있다. |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한 법률적 행동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요사상은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이다. 제정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분노, 음탕한 눈, 법적 이혼, 보복, 원수를 배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이러한 극단적 요구들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요구들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해방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러한 요구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의 자연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이 포함된다. 둘째로, 그 요구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행했고 행하고 있고 행할 것과, 무제한적인 하느님의 가능성에 대해 거듭 지적한다. 믿음(마르 9:23~)·기도(마태 6:1~, 루가 11:1~)·염려(마태 6:25~)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예들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결단하기를 요청하는 곳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벌써 결정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가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동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에게 보여준(마태 18:23~)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있다.
예수는 그의 요구들이 수행 가능한지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한편 예수는 '상급'에 대한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이 물질적인 상은 아니고(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완성이다(마태 25:14~).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지불을 주장하고 청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루가 17:10).
가까이 있는 하느님은 더이상 인간을 전통적 범주로 등급을 매기거나 분류하지 않고, 긴급하고 중요한 도래로 이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는 그의 사랑의 계명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그것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욕받으면서도 실천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더 좋은 의'는 사랑이다(마태 5:20). 예수는 〈구약성서〉의 2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받아들였는데(레위 19:18, 신명 5),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모든 율법의 요약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의 특징은 일관되게 모든 다른 율법(안식일 계명)을 가장 중요한 기준(마르 2:27, 3:4)에 종속시켰다는 것, 이웃사랑을 원수사랑에로 확장하여 고양시켰다는 것(루가 6:27~), 계명을 추상적인 관념이나 일반적인 인류애가 아닌 항상 사건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덕철학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구분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단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확실히 예수는 세계와 민족의 새질서를 계획하지 않았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주인과 노예,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행을 위해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팔레스타인 유대 시골 상황, 즉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그의 말씀·비유·교훈은 얼마나 그가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평가했으며 , 얼마나 명백하게 그것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세계에서 하느님 본래의 뜻과 그의 밝아오는 나라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마태 6:24, 루가 16:9~).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된 시설을 사용해서도 안 되었고, 세상의 관습적 행동양식을 따라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산상수훈에 의해 다스려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보복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계명은 있는 그대로 법적으로 실행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사람을 안내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만 결정해야 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해 악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실천 불가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비평에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에 따라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표면적으로 정당한 기준을 속빈 관습이라고 폭로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권집단의 자기중심성에 대항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자(이방인·사마리아인·세리·창녀)와 함께한다.
그의 계명의 정당성과 긴급성이 묵시적 근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백성들에게 근접한 하느님 나라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선포는 예수 자신의 선교와 밀접하다(루가 11:32~). 그가 그의 선교 사실을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로써 표현했는지,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마태 9:36, 15:24). 전체적으로 그의 사목은 자신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 몇몇의 중요한 단어와 장면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백성 안에 비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한다(마태 8:11~).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조직하지 않았고(마태 10:5~), 보편적인 '교회'도 조직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백한(마태 16:17~) 것은 후기 교회의 산물이며, 그 상황과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의 방랑과 사목을 함께할 제자집단을 만들었다. 후기 전승은 소수의 제자집단만을 사도들과 동일시했다(Ⅰ 고린 15:5~).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한다.
만약 예수가 이 제자들을 스스로 임명했다면, 그는 그것으로 전(全)이스라엘에 그의 종말론적 주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19:28)·〈루가의 복음서〉(22:30)에 의하면(그것은 후기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음), 그는 그들에게 새 시대의 완전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재판하는 직임을 수여했다.
---------------------------------------------------------------------------------------------------------------------------------------
*** 아멘 ***
아멘은 히브리 용어로서 그 안에는 확실성과 진실함, 충실성과 확고함 그리고 신뢰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말을 시인하고 수용하고 보증하는 표현이며 ‘진실로’ 또는 ‘그렇게 되어라’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보면 아멘은 우선 예배를 거행할 때 바치던 영광의 찬미가 안에서 또는 가르침이나 기도의 내용을 확언하는 의미로 또는 회중의 응답으로 사용되었다. 또 누가 말한 것에 동의하거나 동조할 때 또는 어떤 말이나 맹세나 계약을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도 이 용어를 썼다. 그런가 하면 무게 있는 선언을 한 뒤 아멘으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아멘이라는 말로 시작하셨음을 전해 준다(원문은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인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번역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멘이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지금 전해 주고자 하시는 내용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받은 자의 자격으로 전해 주시는 당신 가르침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아멘은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한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이는 구약에서 하느님이 아멘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었던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영원히 진실하시고 신뢰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선언적으로 밝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들을 확증해 주시고 그것들이 실현될 것을 보증해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