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중략---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 김지하①, 「산정리 일기」 부분.
김지하(본명 김영일, 1941)는 목포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요, 이 땅의 반독재 투쟁의 대명사이며, 자본의 폭력과 파멸의 아수라장인 금세기 말 반생명에 맞선 생명사상가이다.
목포시 대안동 18번지 부둣가에서 영세상인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13세)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했다. 서울대 미학과 3학년에 다니던 1961년 남북학생회담 남쪽 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명수배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해남을 거쳐 다시 목포로 도피하여 항만 인부생활을 하며 20대 초반의 피 끓는 젊음을 고향땅에서 숨어 지낸다.
이 때 그가 날마다 술에 취해 들락거리던 오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김현과 최하림이다. 그가 『목포문학』 2호(1963)에 처음으로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발표한 때도 이 시기이며, 제1시집 『황토』에 실린 「산정리 일기」, 「비녀산」, 「성자동 언덕의 눈」, 「용당리에서」 등 대부분의 시가 이 때의 체험을 모티프로 쓰여진다.
1973년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의 외동딸과 결혼한 그는 1974년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지명수배된 뒤 흑산도 예리관광여관에서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목포를 지나간다. 그때의 기억을 쓴 산문 「고행-1974」에서 그는 목포를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얽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니까 그가 목포와 맺었던 인연은 총 15년 정도인 셈이다. 이후 그는 오랜 민주화 투쟁 속에서 투옥, 재투옥을 거듭, 8년여를 감옥에서 보낸 뒤 지금은 경기도 일산에서 적요로운 이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김지하는 1969년 김현의 소개로 『시인』지를 통해 처음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이후 그는 첫 시집 『황토』(1970), 『검은 산 하얀 방』(1986), 『애린 1·2』(1986), 『이 가문날에 비구름』(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등 6권의 시집과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김지하 시전집』(1993) 그리고 판소리의 창조적인 면과 현대적 계승을 탁월하게 보여준 담시집 『오적』(1993, 발표는 1970)과 대설 『남(南)』(전 5권, 1994)을 펴냈다.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정작 국내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75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같은 해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의에서 주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부분 인용한 시는 첫 시집 『황토』에 실린 것으로 그가 지명수배되어 목포에서 노동을 하며 숨어 지낼 무렵인 1961년에 쓰여진 것이다.
이 시집은 필자가 대학 1학년 때인 80년대 초반까지 금서로 묶여 타이프로 타자한 것을 몰래 복사하여 돌려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분단 이래 이른바 순수주의에 함몰되어 온 이땅의 시단에 정치적 상상력을 기폭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이 시집은 민중의 한스런 삶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비관적인 현실인식과 부정정신이 관류하고 있다.
시 제목의 '산정리'는 지금의 산정동 일대를 가리킨다. "남포소리"가 터지는 그곳은 당시 그가 노동을 하던 현장이다. 그는 4·19와 5·16 직후인 그 무렵 고향에 숨어 들어 매일 밤을 노동자들과 함께 "소주"와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샌다.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선 이땅의 암울한 상황을 멀리 하고 땅 끝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참담한 의식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비관과 절망이다.
그도 당시 고향 목포를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 무기력한 둠벙 속에서 청춘의 독주를 마시며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를 고향에 묶는 것이 무엇일 것인가. 그야 당연히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일 터이다. 그러나, 그는 곧 "박차고 일어"서서(「비녀산」) 그 칼날과 정면으로 맞선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중 략---
저 솟고 싶은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 하고 목질기기 동탁배꼽 같/천하흉폭 오적의 소굴이렸다.
- 김지하②, 「오적」 시작 부분(본문의 한자는 한글로 고쳤음).
첫 시집 『황토』가 척박한 이땅의 현실과 억압에 대한 울분과 저항의식을 드러내는데 초점이 놓여졌다면, 「오적」(1970)을 비롯 「앵적가」(1971)·「비어」(1972)·「오행」(1974) 등 일련의 담시(단편서사시. 민담에서 '담'자를 차용하여 세상에 떠도는 구비전승 이야기들을 노래체의 율문으로 기록한 문학 양식)들은 정치적 억압 및 경제적 질곡과 맞서 싸우는 문학적 응전양식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들 담시들은 대체로 그의 고통스런 70년대 전반의 영어체험과 날카롭게 대응되는 가장 치열한 정치시들이다.
특히 부분 인용한 「오적」은 유신독재정권의 폭력에 맞서 70년대 벽두에 터진 강력한 폭탄이었다. 이 작품이 『사상계』 5월호에 발표되자,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고 잡지는 등록을 취소 당한다. 또한 이 사건은 국회로까지 비화되어 '김지하'란 이름이 일약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이농으로 인해 가진 거라곤 몸 하나밖에 없이 도시빈민으로 흘러들어온 갯땅쇠 꾀수를 당대의 권력형 부패특권층인 오적, 즉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과 맞서 세움으로써 졸속한 근대화에 따른 독재권력의 폭력성과 비리를 고발하고 질식돼 가는 민중생존권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이 「오적」의 줄거리이다.
「오적」의 구성은 일반적인 서사시의 유형처럼 서사, 본화, 결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인용한 시는 그 서사 부분이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로 시작되는 이 서사 부분은 "북을 치되 잡스러이 치지 말고 똑 이렇게 치럈다"로 시작하는 저 판소리소설의 서두 양식을 그대로 빌려 쓴 것으로, 분단 이래 오랜 동안 지속돼 왔던 한국문학의 순수편향성 내지 문학지상주의를 통타함으로써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의 길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음을 본다.
또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라는 서사는 결사의 "이때 또한 오적도 6공으로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이런 행적이 만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에 회자하여/날 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길이 전해오겄다"와 맞물리면서 이 시에 담긴 이야기를 김지하 자신의 주관에 머물지 않는 객관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렇듯 「오적」은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단일 사건이 극적으로 전개되고, 비애와 골계가 공존하되 그 내용은 비장하면서 표현이 골계스럽다는 점에서 우리의 서사민요와 판소리를 그대로 닮았다. 게다가 익살 넘치는 관용구 및 속담·한문구·고사에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 거침없이 흘러가는 문체는 읽는 이의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버린다.
우리는 담시 「오적」에서 문학이 문학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옴으로써 실천의 영역 또는 정치적인 응전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본다. 김지하에 의해 그 돌파구가 열린 소위 실천으로서의 문학은 이후 70·80년대의 거친 광야에 들불처럼 번지면서 수많은 민중시인들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문학이 언제까지나 무기일 수만은 없다.
이를테면, 매미가 사시사철 울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모름지기 과거에만 집착하는 시는 썩는다. 이것이 변질이 아닌 변화가 필요한 까닭이다. 새로운 천년을 앞둔 목포 시단은 과연 그 변화의 흐름을 읽고는 있는 것인가. 특히 젊은 시인들의 경우, 자신의 시세계를 아프게 갱신하고 있는가.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한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 김지하③, 「생명」 전문.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를 격렬한 저항의 몸짓으로 통과해온 김지하의 시는 그러나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새롭게 변모한다. 1986년에 발간된 연작시집 『애린 1·2』가 그 시초이다. 이 시집은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시집이 보여주었던 대결구조나 반역의 정신과는 달리 순환구조나 탐구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달리 말해 이 시집은 투쟁의 시·무기의 시로부터 통일의 시·사랑의 시로의 전환이자 서양적 세계관을 동양적 세계관으로 접수·고양시키는 구도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의 주제는 '생명사상'이다. 그가 '심우(尋牛)'의 과정을 통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는 다름 아닌 '민중'이고, 처음도 끝도 없이 나고 죽고 움직이는 근원적인 생명의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80년대 말에 발간된 『별밭을 우러르며』(1989)에 오면서 그의 시는 내면성, 철학성, 사상성이 더욱 깊어진다. 겨울과 밤이 상징하는 절망과 죽음을 넘어서서 새삶, 새생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과 기다림이 서정적인 문체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새생명에의 추구는 땅과 중생에만 그치지 않고 이젠 '별'로 상징되는 천상의 질서로까지 나아간다.
인용한 시는 위의 시집에 실린 것으로 그의 생명사상의 근간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80년대 중반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되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김지하를 둘러싸고 있었던 오해 한 가지가 생각난다.
돌이켜 보건대, 80년대 중반은 날마다 투신·분신 자살하는 일이 잦은 죽음의 시기였다. 그때 김지하는 모 신문에 쓴 칼럼에서 그러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고 일갈함으로써 많은 운동권 지식인들로부터 변절자로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명사상에서 우러나온 발언이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오해의 소치였다.
위의 시는 생명만이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며 지고지선의 가치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어미가/새끼를 껴안고 울"듯이 근원적이고 슬픈 것이면서도 인간이 절망 속에서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러므로 함부로 무시하거나 버려서는 안될 유일한 힘이요 희망인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김지하의 위상은 투사나 시인보다는 사상가 쪽으로 완전히 기운다. '생명운동'에 이어 '율려운동'을 내세운 그의 사상의 확대·심화는 상대적으로 시의 침체를 초래한 듯하다. 근래에 발간된 『중심의 괴로움』(1994)은 그 자신의 개인적 감회나 단순한 일상을 노래한 시가 많다. 물론 이 시집은 "삶과 자연과 우주가 심각한 앓음 속에서도 서로 상생의 깊고도 드넓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희망과 대긍정의 세계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오랜 투병과 침묵 끝에 발간된 이 시집은 그의 거칠 것 없던 문학적 상상력이 고갈되지는 않았는가 의심케 만드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제 그의 시도 나이 따라 늙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인간구원의 길을 모색키 위해 끊임없는 자기파괴와 자기극복의 과정 속 "중심의 괴로움"을 맛보고 있는 것인가.
첫댓글 감상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