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 랭귀지 / 김동진 평론가
-김선미, 『인왕』 파란, 2023.1.
한 존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자신의 성격을 유형화하고 규정할 수 있는 MBTI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대유행한 것을 보면 존재의 본질을 묻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코드로써 MBTI가 유행했다는 면에서,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고 표현하는 일이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을 알기 위한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물자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상의 본질을 관측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 대상의 본질이 맞는지 검즐할 수단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계속 같은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블라우스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사랑? 지혜나 자비 자유 설마 그런 거
청계천에서?
청계천에서
똑같은 옷이 옆집에도 그 옆집에도 또 그 그 그 옆집에도 앞집의 옆집에도 걸려 있을 텐데
영혼이 다다다다닫ㄹ 걸려 있을 텐데
오늘 중고 거래 플랫홈에서 성직자의 뼛조각이 천만 원에 판매한다는 기사가 떴다더니
-「어제 산 블라우스」 부분
실패가 예정된 시도를 욕망하고 있다는 인간의 특성이 자본주의와 맞물렸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 「어제 산 블라우스」에서 관측된다. 시인은 옷을 “영혼”으로 받아 낸다.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표현하 수 있는 주요한 수단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특정한 스타일이 가진 이미지를 입음으로써, 누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 정의한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옷가게에서 파는 옷을 사 입은 이상, “똑같은 옷이 옆집에도 그 옆집에도 또 그 그 그 옆집에도 앞집의 옆집에도 걸려 있을”수 밖에 없다. 한정판 운동화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추첨에 응모하고, 그것을 되파는 일이 하나의 재테크처럼 취급되는 것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립 가능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패션이 시장 속에서 작동하는 이상, 결국 옷으로 자신의 청체성을 규정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의 소비는 완벽히 고유하고 유일한 상품이 등장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상품에 예속되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 “성직자의 뼛조각”이 “중고 거래 플랫폼”에 등장하는 사건은, 무엇이든 일정한 금액에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 자본주의의 중심인 서울에 위치한 ‘청계천’이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분증과 지갑과 우산을 모두 놓고“ 나오면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가방을 바꿔 들고 나왔어」)
손 선풍기를 들고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들고 다니는 자체의 무게나 움직임이 불편해
나는 들고 다니지 않는다
목걸이용 신제품이 나왔으나
손은 자유로웠으나
그래도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바람이 싫은 건 아니다
-「국가수사본부 부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상품에 예속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수사본부」의 화자가 손 선풍기를 쓰지 않는 이유가 눈에 띈다. 그는 손 선풍기의 “무게나 움직임이 불편해”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점이 개선된 이후에도 화자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선택한 정체성의 규정 방법일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더 독특하고 고유한 것을 가지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현대 자본주의의 방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태도다. 샹품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타자와 구별되고, 거기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하려는 것이다.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덜어 냄으로 변별 자질을 확보하는 역설적 방식은,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해 낸다. 소유로 이어지는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시각은 곧 ‘토르소’라는 독특한 이미지로 귀결된다.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토르소
울끈불끈한 근육과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몸을 살짝 튼
어깨 위는 없다 목도 없고 얼굴도
팔도 없는, 바티칸
식스팩의 남자
무릎 아래 발가락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늘어진 성기와 고환과
구멍 몇 개 뚫려 있는 몸
그것이 남자로 보여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서 있다
누구는 만들어지기 전이라 했고
누구는 다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누구는 올 것이라 했고 누구는 이미 왔다고
피 터지게 싸운다는데
「월요일 3-1」부분
화자는 “울끈불끈한 근육과 갈비뼈가 드러나 있”는 토르소를 본다. 오로지 “살짝 튼” 몸통만 있는 토르소지만, 화자는 그곳에서 “남자”를 본다. 다른 사람들은 팔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인지 “다 만들어 진 것”인지 싸우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토르소는 팔다리와 머리가 없어야만 토르소로 존재할 수 있다. 오히려 오체를 제거함으로써 ‘몸통’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마치 손 선풍기를 가지지 않음으로써 타자와 구별되며 자신을 확보했던 「국가수사본부」의 화자처럼, 부가적인 것들이 제거된 상태가 토르소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는 토르소 존재의 본질이라는 측면까지 포괄하는 이미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대상이 고유한 존재자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일 다른 존재자와 어떤 방식으로 구별되는지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본질은 대상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토르소는 조각이지만, 오체가 없다는 차이에서 그 본질을 얻는다.
구멍을 담는다 모든 신들이 거처하는 곳 또는 누군가의 무덤이기도 한 그곳에서 눈에 휴대폰에 가슴에
사람들은 천정에 구멍을 내고 하늘을 닮고 싶어 했지
그게 사랑하는 길이라 믿었네 별들이 반짝이는 걸 믿었네 봄여름가을겨울 믿었네
떠나왔던 곳으로 떠나갈 곳으로
구멍을 나르는 사람들
걷거나 뛰면서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도
깊은 잠 속으로
문장 속 행간으로도
믿음이 무덤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버려진 무 밭에 와서야 알았다 한 뼘씩 웃자라 구멍 숭숭 바람 든
「Dom」부분
오체가 없는 것이 곧 토르소의 본질을 규정하는 차이라는 점에서, 시집을 관통하는 또 다른 이미지인 ‘구멍’이 의미를 얻는다. 구멍은 빈 공간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 구멍은 존재할 수 없다. 구멍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다른 대사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멍을 담는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눈’과 ‘휴대폰’, ‘가슴’에는 구멍이 들어오기 전부터 무언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천장에 구멍을 내고하늘을 닮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만이 보일뿐, 하늘을 보는 구멍이 존재하게 하는 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곧 구멍 너머 하늘을 선망하는 일을 “사랑하는 길이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무덤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구멍의 존재 조건이 아니라 구멍 너머의 다른 대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할 수 없다.
동시에 구멍이라는 ‘공간의 없음’이. 그것이 기거하는 다른 ‘무언가의 있음’을 드러낸다. “버려진 무”의 몸뚱이에 뚫린 ㅣ고멍이 무의 몸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하게 상기 시킨다. 이때 구멍이 날라지는 장소, 즉 “문장 속 행간”이 눈에 띈다. 행간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뚫린 하나의 구멍이기 때문이다. 발화자가 미처 언어로 담아내지 못한 잉여의 의미, ㅣ언어의 한계와 초월이 존재하는 곳, 시간 성립되는 곳이 바로 행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시인의 말은 (「인왕1」), 존재자와 시의 존재 조건을 꿰뚫는 말이 된다. 시인의 언어는 토르소와 비슷하다. 오체를 잘라 버리고 몸통만 보여주는 토르소처럼, 시인은 행간 속의 의미에 집중하도록 우리에게 구멍을 대면시킨다. 언어의 의미는 변별 자질로부터 발생한다. 언어로 이루어진 싣, 그리고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생기는 새로운 물건들 언어들 놀이들”에 시인이 보여 주는 언어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는 끝없는 사투 속에서 시인의 토르소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그 의미는 사라마다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그 다름이 바로 시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차이가 될 것이다. 「인왕」은 행간 속에 잉여의 의미를 탈거시킴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오체가 잘려 나간 언어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보든 그것이 결국 우리를 드러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선미 시인의 언어는 잘린 말이고 구멍 난 말이다. 누구에게나 고유하게 느껴질, 토르소의 언어다.
김동진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2023년 (파란)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