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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 ***
- 상상력의 끝없는 욕망, 무한한 시간 -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에 대한 상상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시간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단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5시이며 1시간 후 퇴근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우리의 기준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것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개념으로 굳어 있다. 왜 군대에서도 얘기하지 않는가.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은, 어쩌면 단지 시계에 적힌 숫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의 실체는 시계의 숫자를 넘어서 훨씬 더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상상적이다. 사실 시간이란 것은 우주가 생긴 이래 계속 흐르고 있었으며, 시계의 숫자가 만들어낸 그 시간은 그 오랜 시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은 시계라는 기계로 측정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분절된 형태로 규정될 수 없는 대상이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상대성 이론을 내놓으면서 기존의 근대적 시간의 패러다임을 해체한 이후 우리는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주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시간의 상대성을 쉽게 풀이했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얹는다고 해보자. 단 몇 초만 얹고 있어도 그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연인과 같이 있을 때에는, 몇 시간이라는 시간조차도 너무나 짧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이 상대성 이론의 실질적인 내용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농담과도 같은 비유이지만,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은 그것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상상이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미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화에는 이상하게도 시간의 신으로 두 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크로노스(Chronos)'이고, 또 한 명은 기회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왜 시간이라는 같은 대상에 신은 두 명이 있는 것일까? 이는 그들이 시간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1. 크로노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신 중 한 명으로, 사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총 두 명 이 있었다. 하나는 시간의 신인 흐로노스(Chrons)이며, 하나는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Kronos)이다. 음유시인들의 전승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태초에는 오로지 흐로노스, 즉 시간의 신만 존재했다. 여기서 시간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불로불사의 힘을 지닌 것이었다. 흐로노스는 맑은 공기 아이테르와 어두운 심연 카스마를 낳았으며, 또한 우주의 알을 낳았는데 여기서 태어난 것이 빛의 신 파네스로 그는 오르페우스 신앙에서의 우주신 프로토고노스와 동일시된다.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시간으로부터 공기와 어둠, 우주가 태어났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은 그만큼 시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한 명의 크로노스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한 신으로,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크로노스와 그의 부인 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는 농경을 상징하는 신으로 낫을 들고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가이아의 명에 따라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았다. 이때 가이아는 크로노스 또한 아버지 우라노스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 예언했고, 여기서 크로노스의 끔찍한 습성이 발생한다. 그는 이 예언이 실행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이들을 낳자마자 잡아먹었다고 하는데, 이런 끔찍한 크로노스의 모습은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라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자식들 중 제우스는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배를 갈라 형제들을 꺼내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후 전승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흐로노스와 크로노스는 별개의 신이었지만, 전승 과정에서 이름이 비슷한 두 신을 사람들이 혼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두 신의 이름이 라틴어상의 발음에서 거의 같았기 때문에, 결국 이 두 신은 별개의 다른 신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구에서 두 번째 크로노스의 행위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게 되었다.
먼저 우주의 탄생에서, 시간 자체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신들의 왕이 되면서 세상이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만물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안게 되었고, 시간에 따라 생기고 또 없어지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크로노스의 끔찍한 습성은 '시간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라는 의미로 새롭게 해석되었으며, 올림포스의 신들은 시간을 이겨 불생불멸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승 과정에서 본래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세계 자체였던 시간은 신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지만, 크로노스는 여전히 태초의 시간의 신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은 여전히 세계의 지배적 원리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2. 카이로스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자 기회의 신이 라고도 불리는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인데, 그는 무척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그의 머리를 보면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양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때로 그는 날개가 달린 공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카이로스 동상 앞의 에피그램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저울을 틀고 있는 이유는
기회가 앞에 있을 때는 저울을 꺼내 정확히 판단하라는 의미이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인용문
상대적 시간의 신 카이로스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즉 기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머리를 무성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알아본 사람은 금방 움켜잡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고 나면 다신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즉 기회는 놓치면 좀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발에 날개를 달고 있으니 잡으려야 잡을 수 없다. '이때가 기회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평소와는 달리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놓쳐버린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회가 앞에 있을 때는 정확히 판단해야 하며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칼과 같이 빠르게 결단해야 한다. 카이로스의 모습은 이런 시간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크로노스는 절대적인 시간의 신이다. 즉 그는 우리와 무관한 시간, 달력에 맞춰 넘어가고 시계의 침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지배한다. 이 절대적인 시간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흘러가 우리를 늙게 하고 끝내 죽게 하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다. 이 시간은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게으른 사람에게 1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1분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대한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카이로스의 시간은 기회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이므로 같은 양의 물리적 시간이라도 사용함에 따라 두 배 혹은 세 배까지도 늘릴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 순간을 놓쳐버린다면 찰나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발전 또한 이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시간을 쪼개어 물질화시키고 절대화하면서 발전해온 것이 아닌가. 상상하는 인간은 절대적 시간을 거슬러 시간을 임의로 해체 구성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 상상력을 펼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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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위의 구조 ***
1. 행위의 논리적 구조
인간의 행동과 행위는 구별해야 한다.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 같은 모양으로 달리는 두 사람이 있을 때 양자의 행동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달리는 사람은 도둑이요, 뒤에 달리는 사람은 경관일 때 전자는 도망행위이고 후자는 추적행위이다. 그 차이는 직업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도망행위는 현직경관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고 추적하는 행위는 일반 시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을 다른 행위로 만드는 것은 주체의 내적 의도이다.
자각된 내적 의도는 사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고가 행위의 내적 기둥이라면 행위에는 논리적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고가 논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논리구조의 전형은 삼단논법이다. 따라서 행위의 논리구조로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살펴보면 그 고전적 전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것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전제:내게는 A가 바람직하다(목적 A가 내게 의식되어 있음).
소전제:ⓛ 그런데 p, q, r, s가 내게 A를 실현시켜 줄 것이다(수단 열거). ② r는 이들 중 가장 쉽고 가장 아름답게 A를 실현시킬 것이다(수단 선택).
결론:때문에 r에서 A로의 경로를 고른다(행위의 현실태).
이 경우 목적은 의사가 병자를 치료하려 한다든가 정치가는 선정(善政)을 하려는 경우라면 자명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은 수단선택의 소전제이다.
이 경우에 금전과 같은 형이하학적 사물을 목적으로 세우든, 신과의 일치라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을 목적으로 세우든 그것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기의 능력을 수단을 선택하는 자리에서 반성하면 된다. 그리고 행위의 윤리성은 목적 실현의 용이성이라는 기술적 효과보다도 효과가 있어야만 되지만, 그보다도 수단이 덕에 합치하는가 여부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는 이런 고전적 구조의 행위가 오늘날에도 사생활의 일상성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를 근세로부터도 나눌 때의 특수성은, 현대사회가 근세까지의 도구적 관련성을 더욱 확대하고 자기를 기술관계로 제시하는 점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일찍이 수단으로 개발해 온 기술의 거대한 관련성 가운데 위치 지워진 개체에 지나지 않으며, 기계의 신호나 운행대로 관계 속을 왕복하는 객체로 되고 있다. 이 상황 속에서 행위의 논리적 구조는 어떻게 될까? 행위의 대전제로 자명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수중에 넣고 있는 강력한 기술로서의 수단이다. 거기서 새로운 형식의 삼단논법이 다음과 같이 기능하기 시작했다.
대전제:수단 P가 우리의 것이다.
소전제:그런데 P는 a, b, c, d를 목적으로 실현시킨다.
a가 이들 중 가장 효율이 좋고 가장 아름답게 기능한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결론:때문에 P에서 a로 가는 길을 고른다(행위의 현실태).
고전적 논리구조에 비하면 전제가 역전된 것으로 보이는 완전히 새로운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곧 대전제에는 목적이 아니라 거대한 수단, 예를 들면 전력이나 원자력, 거대자본 따위가 나 개인이 아닌 우리의 공유물로서 우리의 수중에 있다. 수단이 자명한 사회적 사실로 있고 게다가 이 수단으로 가능한 목적을 추출해 그 가운데서 목적을 고른다는 데 새로움이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전제가 되는 수단은 물리적 또는 경제적 힘이고 탐색되는 목적은 그 힘에 포함된다. 또 이처럼 행위의 논리구조 가운데서 초월적인 것이 배제된다는 점, 그리고 대전제의 경우에서나 소전제의 경우에서나 '나'라는 1인칭 단수 대신에 1인칭 복수인 '우리'가 이야기되고 있는 점은 행위의 논리구조 가운데서 개인의 인격적 책임이 배제되고 위원회로 상징되는 공동책임의 이름으로 사실상 인격책임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적 관리체제의 법적 규제력으로 인간의 내면이 압축되어 행위의 세계로부터 초월과 책임이 박탈된다는 것을 뜻한다.
윤리학의 위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행위의 목적을 수단적 기술로 받드는 한 인간의 존엄성도 사라진다. 목적정립의 자유를 둘러싸고 초월과 책임의 회복이 가능한가 여부에 현대윤리학의 한 과제가 있다.
2. 행위의 존재론적 구조
행위가 내적 지향으로서 정신의 작용을 전제로 하는 이상, 정신의 작용영역에 주목하여 행위의 전체구조를 밝힌다면 초월 가능성의 유무가 명백하게 될 것이다.
대상과 상관적으로 생각된 정신의 작용영역은 상식적으로 안정된 일상세계를 첫번째 장으로 하고 개념 또는 기호에 따른 대상론적인 과학적 세계를 제2의 장으로 한다. 또 자기가 그 대상에 몰입·헌신하여 현상하는 사랑의 세계를 제3의 장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행위의 세계를 제4의 장으로 한다. 그런데 이 제4의 장인 행위의 세계는 병존하는 존재자가 양자택일의 대상으로서 모순으로 나타나는 이질적인 장이다.
자아는 다가오는 모순을 투시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떤다. 자아는 어떤 수단을 찾아 일상세계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자아를 이 불안의 장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를 제4의 장에서 제1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실존적인 힘으로서, 정착자의 장으로서 제1의 장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초월적인 탈출이야말로 행위이므로 끌어올리는 힘 자체는 윤리의 보편적 입법과 탈출 가능한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2가지 이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제2의 보편자의 장에 있어야 한다.
게다가 초월의 수단인 힘은 자아의 인격 모든 것을 문제삼는 자아의 상징이다. 때문에 그 힘은 자기의 전인격을 바쳐도 좋은 것이며 제3의 장에 있어야 한다.
행위적 실존으로서 자아가 모순과 불안의 행위를 겪는 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의존하는 수단은 제4의 장을 넘는 곳에서 구할 수 있고 우선은 제1의 장에 있어야 했다. 동시에 제3, 4의 장에 각각 있어야 했다. 그러면 이 힘은 각기 다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3개의 힘은 똑같은 힘의 속성을 지녔는가. 그 힘을 추구하는 경위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것들은 결코 각각 별개의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개별적인 힘으로서 요구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정리한다면 행위적 실존의 초과를 위한 힘이란 실재, 보편적 가치, 헌신의 대상이라는 3가지의 통일적 존재로, 앞에서 든 어떤 한정된 장소에도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 생의 모든 내재적 국면을 넘는 초월자라는 것이 된다. 때문에 우리는 행위의 여건, 그 행위가 실존적 심연에 깊게 뿌리 박은 것일수록 그만큼 강하게, 의식하든 하지 않든 세계초월자와 긴장관계에 서야 한다.
마치 그것을 상징하듯 행위의 한 장면으로서 양자택일의 결단은 항상 그 모순의 암흑에서 초월해야 한다. 따라서 논리구조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는 부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초월도 행위의 존재론적 구조를 성찰할 때는 별도의 형태로 확실히 긍정된다. 어떤 행위이든 결단을 수반하는 한 초월이다. 그리고 이 작은 초월과 궁극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이상에서 논한 초월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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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학(ethics , 倫理學) ***
윤리라는 말은 일찍이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에서 사용한 말로 여기서는 인간이 한 동아리로 서로 의존해 지켜야 할 질서를 뜻했다.
서양에서 ethics의 어원인 라틴어 여성명사 ethica는 락탄티우스 피르미아누스(250경~330경)가 썼다. 이 어형은 라틴어로서는 비교적 새롭고 주로 중세 이후에 나타나는데 고전 라틴어에서는 마르쿠스 피비우스 콴티리아누스(35경~100경) 등에게서 'ethice'라는 여성명사로 쓰였다. 이 말은 그리스어 'ēthikē'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어는 학문의 명칭을 붙일 때 '학'(epistēmē, theōria)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그 말의 관사와 형용사만으로 말하는 관행이 있어, 윤리학(hē ēthikē theōria)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라 'hē ēthikē'(윤리학)라고 부르는 방식이 성립한 것을 라틴어로 만든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하나의 독립된 학명으로서 'hē ēthikē'라는 말을 자기 저작 속에 쓰지 않았다. 윤리학서로 전해진 3가지 저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Ēthika Nikomacheia'라고 불렸다. 이 'ēthika'는 'to ethikon'(윤리적인 것)의 복수형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 - 전 10권으로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 저서로 꼽힌다. - |
얼핏 보아 하찮아 보이는 미세한 언어적 사실이 에토스의 학문인 서양윤리학의 특색을 암시한다. 분명히 규범을 추구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에토스적인 것, 곧 개별적 관습의 집적이라는 사실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또 개개의 성격의 학문으로서 관습 가운데 형성되는 개인의 성격이나 덕목의 연구로 나타나야 한다.
사실 이와 같은 것으로서의 '에티케', 즉 '에토스학'으로서의 서양윤리학은 그 원초적 형태를 보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는 개인도덕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것은 폴리스(polis)라는 공적인 것에 관련된 폴리티케(politikē)로서의 정치학 내지 사회학의 전단계를 이루는 일부문에 지나지 않았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이런 전통을 지닌 'ethics'를 윤리학이라고 번역한 일본 및 동양의 일반적인 생각은 같은 인간 행위에 관한 학문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습속의 사실학 또는 개인의 결단을 좌우하는 성격의 사실학으로 보기보다는, 우선 윤리라는 말이 보여주듯 공존의 질서 수립을 위한 규범학의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동양에서의 윤리학은 성인의 가르침으로 연결되는 전체성을 가졌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학이나 종교 교의학과의 차이를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1. 동양과 서양의 윤리사상 비교
1) 서양
인간존재라는 사실은 이성과 의지를 갖춘 개인적 주체로서의 인격(persona)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서양 윤리사상이 인류에게 기여한 가장 큰 공적 중의 하나는 이 개인적 인격개념의 형성이다. 그리스도교의 전개로 이 개인적 인격 개념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개념은 처음부터 자명했던 사실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나의 단어로까지 되지 못한 미지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는 델피 신탁을 철학의 원점으로 삼은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행위의 진정한 원인은 관절이나 근육의 운동처럼 외적이고 자연적인 사실이나 현상이 아니라,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내적인 이성(플라톤의 〈파이돈〉)이라는 점에서 인격이 윤리학의 중심에 서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페르소나(persona)의 어원은 아마 에트루리아어의 'phersu'(면 또는 얼굴)일 것이다.
어원이야 어떻든 이미 고대 로마에서 '페르소나'는 연극용어로서 가면을 뜻했다. 또 가면을 쓰는 배우라는 뜻으로 쓰기도 했고 어떤 역할을 하는 인물도 의미했다. 무대에서 가면을 쓰는 배우에게는 가면의 뒤에서 그 가면의 의미를 이해하는 개인적 인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인격으로서의 배우에게는 대본을 준비한 작가와 무대에서 자기와 함께 공연하는 다른 배우에게 응답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 곧 개체로서의 인격과 응답할 책임이 있다.
윤리가 문제되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결단의 주체로서의 인격과 더불어 당연히 요구되어야 할 것은 결단에 따르는 책임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세네카(BC 4경~AD 65) 등을 통해 책임 있는 행위를 볼 수 있기는 하나, 개념으로서의 '책임'에 해당하는 단어는 서양 고대와 중세를 통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히 그 명사형뿐만 아니라 형용사 어형조차 중세 라틴어에서는 볼 수 없다. 14세기에 나타난 'responsabilis'라는 라틴어 형용사는 프랑스어 'responsable'에서 역수입한 결과에 불과하며 본래는 음악용어에서 출발해 윤리적으로는 '보증'과 관계되어 쓰였을 뿐이다.
1787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responsabilité '라는 명사가 만들어졌으며 그 직후 영어로도 'responsability'가 쓰였다.
그 의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용례에 비춰봐도 'accountability'(설명 또는 변명의 가능성)와 같다. 다른 인격에 대응하는 자기책임이라는 개념이 덕목의 하나로 자각된 것은 19세기 후반을 지나서, 계약사회의 관념이 정착하고 새로운 관계의 도덕이 정착되고나서부터이다. 그 상징은 철학사전에 있다. 20세기 초엽의 사전에는 'responsabilité'와 'Verantwortung'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말들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이처럼 윤리사상의 전개는 서양에서는 행위의 개별주체인 인격에 착안하여 인격 개념이 확립된 후 약 2,000 년 정도 지나, 그로부터 연역되는 덕(德)으로서 책임이 도출되었음을 말해준다. 오늘날에는 'Respondeo ergo sum'(책임 있게 응답한다. 그래서 내가 있다)이라고 해서, 책임과 실존을 자각적으로 동일시하는 점에서 실존주의의 특색을 인정하는 철학자도 있을 정도이다.
2) 동양
동양에서는 서양에 반해 인간의 자기반성에 관해 가장 숭앙된 개념이 '인'(仁)이었다.
글자 모양이 보여주듯이 두 사람, 즉 복수의 인간관계에서 이상적인 상태로서의 사랑의 관계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상태를 형성하는 계기로서 개개의 인격이 문제가 되기에 앞서 이상적 관계가 추구되었다. '관계가 계기를 규정한다'는 일종의 장(場)의 이론이 인륜의 기초가 된다. 인·의(義)·예(禮)·지(智)·신(信)이라는 잘 알려진 주요덕목은 4번째 '지'를 제외하면 어느 것이나 대인관계 그 자체이다.
'인'과 함께 중시된 '의'는 글자꼴이 보여주듯 자기(我)가 양(羊)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형상인데, 양이란 〈논어〉에서 명백히 나타나듯이 제물로 쓰는 짐승의 상징이며 자기가 속하는 공동체의 희생을 대표하는, 책임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따라서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책임'에 해당한다.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인간사회에 대한 명예는 소실된다.
거기에는 이미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동물이 호흡하고 있는 셈으로 곧 인생의 의미가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역사에서는 때때로 책임을 다하지 못 했다는 것을 이유로 자살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살은 인간의 내적 존엄과 외적 명예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데 혼동의 이유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일면에만 치우친 대인적 존재로서의 인간파악뿐 인간의 기본적 존재로서의 개인적 인격이라는 의식이 적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 곧 인격의 개념에 해당할 만한 자기 주체로서의 양지(良知)는 16세기의 왕양명, 이탁오에 이르러 처음으로 발견된다.
서양과 동양 윤리사상의 사적 전개는 전자의 경우 인격에서 책임으로, 후자는 책임에서 인격으로 서로 반대되는 현상의 동시적 전개라고 할 만한 양상을 드러낸다.
2. 서양윤리학설사
1) 〈구약성서〉의 윤리사상
신이 낙원을 창조하고 사람을 거기에 두었을 때 "낙원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돋아나게 하셨다"(창세 2:9)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선악을 빼고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야훼는 사람의 조상에게 일체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했다. '안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악을 스스로 결정해서는 안 되고, 신이 정한 선악을 존수해야 한다는 점이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이자 유대교 법률의 기본사상이었다.
〈신명기〉 개혁 이후 유대교의 교단적 성격이 강해졌고 종교적 유토피아 사상 가운데 민족에게 고유한 윤리가 그대로 신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신과 세상의 계약(창세 13:14~17)이라는 일반성은 사라지고 신과 유대인과의 계약이라는 민족종교적 윤리사상의 한계가 생겨난다.
2) 고대 그리스
그리스의 윤리사상은 철저히 인간적이며 범인류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전장의 윤리, 헤시오도스의 평화의 윤리를 적은 〈일리아스〉나 〈일과 나날〉을 배경으로 비극시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살려 최초의 본격적인 윤리학설을 내놓은 사람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박력이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그들의 특색은 '덕은 지(知)이다'라는 명제로 결정된다. 곧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아니면 덕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덕이 전달 가능한 기술지(技術知)라는 뜻에서의 지식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메논〉)는 점이다.
하지만 덕이 anamnēsis의 지(知)라는 것은 긍정한다(〈메논〉). 덕이란 이데아에 사색적으로 도달하는 형이상학적 지식이라고 보아, 형이상학과 일치한 윤리학을 처음으로 확립했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가르칠 수 없는 그런 지식을 자기 자신도 찾고 남에게 권하려고 '혼의 배려'(epimeleia tēs psychēs:〈파이돈〉)가 필요하다. 곧 이념적인 덕의 내적 이해를 위해 자타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며 가시적 사물의 지식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이념의 이해를 통해 선의 이데아라는 최고의 존재에까지 정신이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플라톤의 윤리사상은 개인윤리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윤리로서의 국가학 또는 정치학에 귀결한다.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의 정욕으로 나우어지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도 이성에 해당하는 지배계급, 의지에 해당하는 방위계급, 정욕에 해당하는 직능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각자에 해당하는 덕이 지혜·용기·절제이다(〈국가〉).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 가장 중대한 국가적 사업은 교육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윤리학설이란 개인윤리와 동시대에 대한 사회윤리로서의 정치학,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윤리학으로서의 교육학이라는 3가지를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덕이론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다.
덕에는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적 덕'과 습관으로 성립하는 '습득적 덕'이라는 2종류가 있다. 후자는 모두 '윤리적 덕'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들은 모두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본성을 배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본성 위에서 그같은 덕을 수용할 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덕은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이같은 덕은 초과와 부족으로 상실되고 중용으로 유지된다.
그는 덕에서 지성적인 것과 습득적인 것을 나눈 것처럼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덕행은 별개라는 것을 플라톤의 정치적 실패로 분명히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스승의 '덕은 지(知)이다'라는 명제에 이견을 내놓고 이론이성에서 실천이성을 분립시켰다. 그리고는 후자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선택으로써의 행위에 관한 계획적 능력이며 개별적인 사안에 관계하는 덕이라고 했다.
3) 〈신약성서〉의 윤리사상
〈신약성서〉의 윤리사상은 그리스 사상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플리타네온의 향연(원로들의 집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 것,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랑스러운 마음이야말로 선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라고 말한 것과 같은 사상은 〈12사도의 가르침〉에 나오는 "너 자신을 높이지 말라"는 이야기나 〈사도행전〉·〈에페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자기를 걸인처럼 낮추는 생각, 곧 겸손이라는 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신조어이다.
곧 여기에 인간의 윤리적 태도로서 자기를 정당하게 자랑하기보다는 신 앞에 죄인으로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야말로 새로운 가르침으로 주장되었다. 이 서로 대립하는 사상이 나중에 그리스도교 윤리학으로 통합되는 이유는 ① 양자 모두 인간의 행위가 내적인 의지에 의존하고, ②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할 관계라는 점, ③ 서로 돕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3가지 공통점을 갖고 권익이나 이욕, 정욕과 같은 세속의 원리에 지배되는 종래의 세계관에 도전하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윤리학설
여기서는 특히 스토아 학파의 윤리사상이 중요하다.
이 학파의 창립자는 그리스의 제논인데 로마에 가장 영향을 준 학자는 파나이티오스(BC 185~110)였다. 이 학파는 자연법을 존중하고 인간이 의지로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합치시키는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했다. 자연적인 생명에는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이상이므로 즐겁고 괴로움에 따라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곧 아파테이아(apatheia)이고 이 부동심 외의 것은 아디아포라(adiaphora: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부도 명예도 사치도 물리칠 것을 권했다. 이 생각을 이어받은 로마인이 키케로다. 그는 저서 〈의무에 관하여〉에서 스토아의 사상을 소개하며 "정의의 근저는 말과 약속에 대한 충실성, 거짓 없음 곧 진실성이다"라고 썼다. 키케로는 또 소크라테스보다도 로마인 카토(BC 234~194)가 위대한 것은 후자가 단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라엘리우스:우정에 관하여〉). 이로써 로마인이 도덕면에서 그리스인보다 위대하다고 선언했다.
이 사실은 "자연의 이치가 전인류 사이에 정한 것은 모든 국민이 똑같이 지키고 모든 민족이 지키는 법으로서 만민법이라고 부른다"(가이우스[2세기])고 쓴 로마법의 계약과 자유를 존중하고 출생에 따른 차별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자 한 데서도 나타난다.
4) 그리스도교 윤리학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전형은 중세 윤리학이다.
이 시대는 교부시대와 스콜라 철학의 시대로 나뉜다. 여기서는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해 서술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제는 자유의지와 은총의 관계이다. 저서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해서〉에서 "신은 정의이므로 악에 대해 악으로 갚는데, 이것이 벌이다. 다음으로 신은 선하므로 악에 대해 선을 베푸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불의에 대한 은총이다.
또 신은 선이고 정의이므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갚는데 이것이야말로 은총에 대한 은총이다"라고 생각함으로써 윤리신학의 기초를 닦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인정된 자유의지가 이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오히려 철학적으로 추구했다. 이성은 필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 결정밖에 못 하지만 개개의 행위에 대한 이성의 필연적 일의적인 단정은 있을 수 없고 상반하는 길의 어느 것이라도 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을 전제로 했을 때 인간에게는 자유결정이 있어야 한다(〈신학대전〉)고 했고 윤리적 결단을 인식론적으로 증명했다. 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 덕론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적 덕론을 체계화 했고 정의·절제 등의 주요덕목을 인간적 윤리덕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신에 대한 덕으로서 신앙·희망·사랑의 3가지를 들고 이들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한 도덕생활에 기쁨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 근세 합리주의의 윤리학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시대에 새로운 윤리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르네상스의 특색은 예술이나 과학, 인문주의에 있고 종교개혁시대의 특색은 종교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근세 윤리학시대를 초래한 형이상학자에 관해 논한다.
의심할 여지 없는 명제를 기초로 형이상학을 수립한 르네 데카르트는 완전히 기초지워진 윤리학을 체계화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는 잠정적 도덕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방법서설〉). 어느 의미에서 그의 비원(悲願)을 실현한 것은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신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결정론적 범신론을 제창했으므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되는데 그는 자기보존의 충동으로서의 코나투스의 완전한 전개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의 지적인 자기애로 연결되는 것이다.
근대 공리주의
자기애를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애로 환원해 일체를 이해로 찾음으로써 공리주의의 원조가 된 사람은 〈정신론 De I'esprit〉을 쓴 엘베시우스이다.
이 계열에 서는 사람으로서 제러미 벤담이 가장 특색있다. 그는 공리주의야말로 행위의 경향성이라고 보고(〈도덕 및 입법의 제 윤리 서설〉) 그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제창했고 윤리학·사회학·정치학의 연결을 더욱 구체화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초기 오귀스트 콩트의 말처럼 실증과학인 사회학을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자연상태에는 도덕성이 빠져 있다고 보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5) 관념론의 윤리학
시대적으로는 이들에 앞서면서도 이마누엘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에 대한 그의 존경심 때문에 오히려 현대에 연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명령이란 목적달성을 위한 상대적 수단에 관한 가언적 명법(命法)이 아니라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률로 될 수 있는 것처럼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이어야 한다(〈실천이성비판〉). 따라서 주관적·개별적인 행위의 준칙과 인류 일반에 타당한 객관적 보편적 명법의 통합을 지향한 G.W.F. 헤겔은 칸트가 자유의 개인적 실현에 머무른 데 비해 〈법철학요강〉에서 도덕성 위에 인륜의 단계를 세우고 그 최고 실현형태로서 국가를 상정했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며 민족정신은 각 민족의 자유에 관한 의식이므로 세계사는 탁월한 민족을 세계정신의 담당자로 삼아 변증법적으로 진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사를 자유의식의 전개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인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헤겔 자신이 어떻게 말하든 여기에는 완결 여부는 차치하고 역사적 필연의 사상이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헤겔 변증법이 프로이센 국가로 완결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고(〈포이어바흐와 고전철학의 종결〉) 무한발전설을 택하지만, 역사의 논리를 믿는 한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에서도 개인의 자유는 역사적 필연을 향한 선구적 찬동과 같다.
따라서 아담 샤프는 "개인의 자유란 사회에서 개인의 제권리를 말한다"(〈인간의 철학〉)고 써야 했고 윤리학의 기본문제로서의 인격의 자유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권리로 치환된다. 바로 여기서 거대한 산업구조로 모습을 드러낸 현대가 문제시되기에 이른다.
6) 인격의 자유
이같은 사정을 예고한 사람이 F.W.J. 셸링이었다.
그는 자연과 정신이 대립하는 시대는 가고 "이제 더 높은 또는 오히려 진정한 대립이, 즉 필연과 자유의 대립이 나타나야 할 시대이다"(〈인간적 자유의 본질〉서문)라고 말했다. "그 자체로는 자유이고 형식적으로는 필연이다", "절대적 필연성만이 절대적 자유이다"로부터 동일성의 결여가 인간에게 악의 가능성을 만든다고 제시했다. 그렇다면 선은 그 화합인 절대자에게만 완전하다. 따라서 인격의 자유인 이념으로서의 선을 동경하는 윤리학은 종교로 보완되어야 하고 셸링의 체계는 변신론을 찾게 된다.
그같은 태도를 심하게 공격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그런 신은 인간의 작위이며 광태였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하고 "선과 악 모든 것의 이름은 비유이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너의 의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로서 만물에 명령해야 한다고 바랄 때 여기에 네 도덕의 근원이 존재한다. 이 새로운 도덕 그것이 힘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국가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운동도 있었지만 니체 본래의 주제는 선악의 근본적 반성에 있다.
마르틴 부버는 외적인 힘의 필연이 관리사회의 언어로서 '나와 그것'을 축으로 성립했고 인격의 자유는 거기에 없으며 '나와너'의 관계에서 "나는 인격으로서 발견하고 자기를 주체성으로 의식한다"(〈나와 너〉)로부터 여기서 도덕의 기본인 "인격의 정신적 실체는 성숙해간다"(〈나와 너〉)고 생각했다. 이같은 "인격의 우위와 승리가 정신의 정점에 없다면 지구상에서 진보를 바랄 수 없다"(〈현상으로서의 인간〉)고 생각한 P.T. 샤르댕은 진화의 오메가로서 신에 수렴되는 방향으로 전체와 인격을 행위에 따라 통합하는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평가했다.
7) 20세기의 윤리학
윤리학은 앞서 말한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영향력이 없는 작은 선을 이루라고 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규모의 규범적 권고에조차 절망하여 습속의 사실학으로서 과거나 변경의 행동유형이나 윤리의식에 관한 정보작성에 힘쓰게 될 것인가? "이 사태는 그 흐름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 이 난관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일까? 나는 헛수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숙명을 믿지 않는다.
충분히 긴장된 의지는 만약 적시에 행동한다면 어떤 장애라도 물리칠 수 있다"(〈도덕과 종교의 2가지 원천〉)고 말한 베르그송은 전쟁이나 거대산업의 위험에 대해 '기계학이 부른 신비학'에 의해 더욱 강화된 정신이 맞설 것을 예언하고 윤리학의 새로운 사명을 암시했다. 그러나 학문에 관한 그런 희망이나 의무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의 방법적 전제는 '생의 도약'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아프리오리즘인데 충분히 철학적인 것일까?
현대 윤리학 가운데 특기할 것은 방법론적 자각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윤리학을 학문적으로 기초짓고자 할 때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이 학문이 실천에 관계되기 때문에 구체적 개별자에 끌려 논리적 일반성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논리와 윤리의 이같은 대립을 존재와 가치의 문제로 환원해서 방법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사람들이 신칸트파이다.
특히 마르부르크학파인 헤르만 코헨의 〈순수의지의 윤리학〉은 수학적 방법을 따라 과학적 자연을 생산하는 순수사유와 비유해서 순수의지는 법률적 방법으로 행위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개인적 인격에서 시작해서 법인·국가·국제연맹 또는 국제연합이라는 원심적 계열에서 자각과 사회적 통제의 일치에 관한 이상실현의 정도를 단계지웠다. 후설의 현상학이 형상적 환원 방법에 따라 보여준 본질 직관의 성과는 미학의 영역에서도 가치직관에 적용됐는데, 윤리학에서도 막스 셸러는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윤리학〉에서, 또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윤리학〉에서 각각 현상학적 방법을 써서 윤리적 가치로서의 선이 가치 일반보다도 높다는 점을 주장하고 그같은 가치실현에 작용하는 주체(셸러) 또는 기초가치(하르트만)로서의 인격을 중시한다.
그러나 선은 좀더 자세히 규정되어야 한다.
이같은 요구에 대해 특기할만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부를 만한 미래의 윤리학에 대한 서론"(〈윤리학 원론〉서문)을 시도한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고찰이다. 그는 종래의 윤리학과 달리 "선은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고 윤리학의 기본원리에 관해, 그것이 선이라는 판단은 직관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윤리적 명제가 '증명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 직관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바른 직관을 행하는 방법은 선인가 아닌가를 조사하고 싶은 대상을 다른 사상관련에서 절대적으로 떼어놓는 것으로써 해당 대상을 유기적 전체 속에서 부여된 의미로부터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메타 윤리학에서 C.L. 스티븐슨은 윤리를 명령법의 논리로 본다.
그러나 내용은 묻지 않는다. 이 선의 무내용성은 다른 형태로 20세기 윤리사상의 한 지도적 조류가 되어 있는 실존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양심은 내용없는 부름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그 무내용성은 부담이라는 불안을 매개로 죽음에의 선구적 결의성을 가져온다(〈존재와 시간〉). 때문에 그런 부름이야말로 실존의 윤리적 자각 자체이다. 이것들은 결국 가치의 다양성을 따라 분열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선의 구체적인 지표가 보편적 차원에서는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존의 보편적 일원화를 거부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존재와는 따로〉(1978)에서 윤리적 주체를 절대적 개체인 무한자의 보증이라고 본다.
8) 덕의 단계
덕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는 것은 덕이 없는 생활로 인간이 지칠 줄 모르고 자기를 확장함으로써 상호부정에 빠지는 일이 예상되는 것만으로도 명백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실은 이미 덕과는 무관하지 않다. 거기에 인간이 있는 이상 인간적 판단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항상 상대적이지만 선악의 경계를 헤매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본능적으로 직선적인 확실한 행동을 하는 데 안주하는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만약 어떤 생물적 효과를 덕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적 덕은 결단에 주저함이 생긴다는 탈본능적인 국면 위에 성립해야 한다. 그래서 단순한 무력이나 건강이나 생식력 등은 설사 그게 인간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들에 관해 비로소 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들의 효력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목적성과 관계지워진 경우이다. 따라서 인간사색의 원점은 덕의 발생론적 시각에서 보면 실로 목적정립의 자유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행위의 논리구조에서는 부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목적정립도, 윤리학은 덕론에서 다시 긍정할 수밖에 없다.
목적성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덕론을 구성해보면 종래와는 다른 덕의 계층론이 전개된다. 그것은 인간생존의 기본적 사실로서 윤리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 성(性)의 목적론적 해석에서 시작한다. 키케로가 〈의무에 관하여〉에서 "남성적인 아름다움과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듯이 덕에도 성적 형용사를 붙일 수가 있다.
생명적 덕에는 남성적인 덕으로서의 용기와 여성적인 덕으로서의 우아함 등이 있다. 마치 부모나 그에 상응하는 남녀가 서로 도와 아이를 키우듯이 현실적인 성별과는 따로 남녀 어느 쪽의 내부에서도 남성적 덕과 여성적 덕은 서로 도와 인간을 완성시키며 별도의 덕을 형성한다. 곧 생명적 덕의 상호보완성으로, 영적인 덕으로서의 신앙·희망·사랑·성실·숭고함과 같은 초월적인 덕이 육성된다. 인간에게 성의 존재의의는 단지 종족 보존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같은 영적 덕의 실현을 위하여 생명적 덕이 상호보완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덕의 목적론적 질서가 투영된 것이다.
9) 과제와 사명
윤리학은 인간관계의 학문이며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개인이 형성해가는 에토스학이다. 또 인간관계와 성격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필요한 가치로서 선을 중심으로 한 덕을 성찰하는 학문이므로 인간이 생존하는 한 가장 중요한 학문의 하나로 항상 자기 과제와 사명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각각이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시대와 함께 변하는 면도 있다.
특히 '행위의 구조'에서 암시되었듯이 자연을 대신해서 기술이 제2의 환경이 되자마자 도구가 아닌 기계기술이 인간관계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다음 3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새로운 환경에서는 그에 맞는 윤리규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기술적 환경에서는 무능한 성실성이 치명적이며 용서받기 어렵다. 대신 유능한 반응이 귀중해지는 정도가 강해지고 개인적 수준의 도덕과 환경 차원의 도덕 사이에 기본적 차이가 문제가 되며 "전통적인 윤리학과는 규모나 문제가 다른 생권 윤리학이 성립해야 한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자원이나 생산의 한계에서 오는 생존의 곤란성은 이제 정치적 배려의 영역을 넘어섰으므로 생물학적 사실을 참고로 인간의 자기억제를 생각해야 한다. "위기의 세계에서 신속한 교정행동이 필요하다"는 신조로 결정된 V.R. 포터의 〈생명윤리학 Bioethics〉(1971) 제안도 나왔다.
둘째, 기술이 행위의 규모를 크게 한 결과 대면의 윤리가 상실된다는 문제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측은지정(惻隱之情)이 인(仁)의 단(端)이라는 심정에 기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를 양성할 수 있는 동적인 도덕구성을 생각해야 한다. 이 상황은 한편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확대가능성을 감추면서 도시생활에서 나타나듯 이웃이라는 규정을 거부할 가능성도 포함한다.
이로부터 사랑의 정신적 대상이 상실될 위험성이 있고 그 무의식적 대상으로서 자기목적적인 성애의 허용범위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구제한이 필요한데 성애가 요구될 때 종래의 성도덕관념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일어나지만 그것은 도덕 일반의 경시로 연결되기 때문에,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시각에서 성이나 결혼의 윤리를 새로이 논해야 한다.
셋째,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윤리학이 미래에도 계속 고찰해 나가야 할 과제는 개인의 자유와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일찍이 필연과 자유의 대립이 윤리학의 과제였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개개 사회를 넘어 인류의 운명이 윤리학의 사명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존 퍼스모아(1914 태어남)는 그의 저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1974)에서 인간에게 자연과의 공생에 대한 각오를 요구한다.
이는 윤리학의 자기확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면윤리의 상실도 보이지 않는 상대를 존중하라고 가르쳐야 할 국면이고, 나아가서는 초월을 지향하는 훈련의 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축은 보이지 않는 선이나 미의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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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신학(moral theology , 倫理神學) ***
그리스도교 계시에 비추어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원칙들을 파악하고 설명한다. 윤리신학은 윤리철학과 구분된다. 윤리학의 철학적 규율은 이성의 권위에 의존하며, 도덕적 결함에 대해서 이성의 처벌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윤리신학은 계시의 권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 근거한 계시의 권위에 호소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사용되었던 구체적인 도덕 규율은 시대, 지역, 그리스도교가 고백해왔던 여러 가지 신앙고백 전승에 따라 다르다. 로마 가톨릭 전승은 계시의 윤리적 권위를 다룰 때 교회제도의 중재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운다. 개신교 교회들은 종종 개인이 하느님 앞에서 지고 있는 직접적 혹은 즉각적인 윤리적 책임을 크게 강조해왔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도 각 개인의 도덕적 안정을 위한 영적인 지도자의 영향력이 중요한 면을 이루어왔다.
윤리신학은 때로 어떤 생각·일·행위가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것이 되고 인간들에게 영적인 해를 끼치는 것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즉 죄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그 영역을 제한했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은 개인이 좀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 금욕주의와 신비주의 신학의 소극적인 부속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윤리적 가르침을 복음서의 메시지에 나타나는 종교 인간학과 구분하지 않는 것이 〈신약성서〉의 정신과 초기 신학의 정신에 더욱 충실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이러한 접근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사람의 신격화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동방 그리스도교와 의인이 갖는 윤리적 능력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개신교에 반영되어 왔다. 중세와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가톨릭 윤리신학은 윤리적 가르침을 교의 신학과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윤리적 가르침이 하느님의 계시와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는 어떠한 윤리 체계를 특징짓는 특별한 '최고선'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제와 상관이 있다. 최고선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일련의 규율들 혹은 율법들에 순종하는 것, 즉 다소 인위적으로 선이라고 분류된 것을 준수하는 것이 곧 도덕적 행동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계시의 관점에서는 규율이나 율법을 어긴 것을 죄로 보지 않고,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성향이 왜곡되어 있는 것을 죄로 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대처하는 몸에 밴 능력을 선으로 본다.
윤리신학에 대한 접근은 논리적 사유작용에 의존하는 데 따라,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도덕 원칙들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수세기를 걸쳐오면서 매우 다양해졌다. 그러한 일반적 원칙들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최근의 경향을 가리켜 상황윤리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윤리신학은 현대의 과학이 빚어낸 문제들, 가령 고도의 전쟁무기를 쓰는 것과 관계되는 도덕적인 문제들, 대규모 협력단체에서 개인의 책임, 사회정의의 요청, 유전공학의 발전 같은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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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virtue , 德) **
인간의 보편적 자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고대 이방 세계에서 가르쳤던 4가지의 '자연적 덕'과 그리스도교에서 정한 것으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로 생기는 3가지 '신학적 덕'이 있다. 일반적으로 덕은 "생활과 행동을 윤리의 원칙에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왔으므로 이 7가지 덕은 이러한 윤리의 원칙을 따를 때 취하는 태도와 성향을 뜻한다. 이것을 전통적으로 7가지로 생각하는 것은 정반대되는 7가지 중대한 죄와 함께 7이라는 숫자가 인간행동의 전영역을 포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의 덕은 4가지 으뜸의 덕이라고도 하는데('으뜸의'라는 뜻의 'cardinal'은 '~에 달려 있다'라는 뜻의 라틴어 'cardo'에서 나왔음), 이는 이보다 덜 중요한 태도들이 이 기본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기본덕은 신중·절제·용기·정의이다. 이 덕목은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로마 후기와 중세 그리스도교 도덕주의자들은 이 덕목이 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그들이 지향했던 가장 고상한 미덕을 간략하게 요약해놓았다고 여기고 받아들였다.
이 4가지에 그리스도교는 믿음·소망· 사랑이라는 3가지의 신학적인 덕을 덧붙였다. 이 덕목은 사도 바울로에게서 직접 이어받은 것으로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덕으로 이 3가지를 특별히 제시했고, 그중에서도 사랑을 으뜸으로 꼽았다("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3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학적인 덕은 자연인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는 것이며, 이를 믿는 자들이 행하는 것이다. 사랑이나 자비가 이교철학의 덕목록에는 빠져 있지만,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이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또 의무가 서로 상충되는 경우에 이 기준이 다른 어떤 요구보다 우선권을 갖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상황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동의 선험적인 규범에 의존하는 것에 반대해왔으며, 행동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그 나름의 독특한 환경에 비추어서 결정해야만 하고, 사랑만이 유일한 행동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사랑만이 유일한 덕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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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률(Golden Rule , 黃金律) ***
*요약 : 〈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7장 12절에 나오는 교훈.
그 내용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행위 규범은 그리스도교도가 이웃에게 해야 할 도리를 요약한 것으로, 기본적인 윤리 원칙을 말하고 있다.
이 황금률이 2세기 문서인 〈디다케 Didachē〉·〈아리스티데스의 변명 Apology of Aristides〉에는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금지 형태로 나오는데, 이것들은 초기 교리문답서의 일부가 되었다.
황금률은 〈구약성서〉 〈신명기〉에 나오는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지 명령의 형식으로 된 이 교훈은 외경 〈토비트〉 4장 15절, 위대한 유대인 학자 힐렐(BC 1세기)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 1세기~AD 1세기)의 저서, 공자(BC 6~5세기)의 〈논어〉에서도 각각 볼 수 있다.
그외에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세네카 등의 저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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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성경에서는 죽음을 두 가지 개념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생물학적으로 인간 존재의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서의 죽음과 영적이나 윤리적인 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서의 죽음이다.
구약 성경에서 보면 죽음은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고3) 하느님만이 영원불멸하신 분이시다. 구약 성경에서는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 때문이지 하느님께서 죽음을 만드신 것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영혼이나 생명의 본질이 이탈한 상태를 말한다.
죽음의 상태가 지닌 특징은 일차적으로 쓰라림과 고통과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망각의 지하 세계나 먼지 속 또는 음산한 침묵과 어둠의 빈 공간에 머문다고 여겨졌다.9) 하느님의 권능은 죽음의 세계에까지도 미치고 있지만 죽은 이들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는 죄와 죽음을 연관시켜 주고 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으로, 영혼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장수를 누리고 나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를 원했다. 오래 사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죽음은 한편으로는 시련이 끝나고 새롭고 더 좋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공동체와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죽음의 힘을 이기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은 다음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도 갖고 있다.
신약에서는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인간이 죄스런 운명을 지니게 된 것도 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적인 죽음은 죄로 인해 윤리적으로 뒤틀린 상태를 말하며 하느님과 친교가 없는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것이 악마로 소개되기도 한다.
죽음은 특히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생명의 주님이시다. 죽음으로부터 일구어 낸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으로서 죽음을 맛보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모든 권세를 무력화시키시고 죽음을 패배의 나락으로 몰아넣으셨다. 그리고 죽음을 불멸성과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와 결합한 이들은 죄와 영적인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믿는 이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인간이 더 이상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음을 겪지 않을 것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죽음이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완전히 끝이 아니며 그것은 영원한 참생명에로 나아가는 문인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이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하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는 한, 그들은 하느님을 거역하도록 만든 죽음의 지배를 물리치고 진리의 길을 걸을 수가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간 상태를 지칭하는 두 번째 죽음도 그리스도께 충실한 이들에게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는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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