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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최근에 나온 <한국사 인물 통찰>이라는 책을 말하는 것 같군요. 김종성이란 분이 쓴 건데 그 분 홈피는 여기입니다. http://www.kimjongsung.com/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아는 게 없어서 다른 분의 글을 소개합니다.
http://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3407150&articleid=269&menuid=&boardtype=&page=0
여기에 <만주원류고>를 번역한 ‘봉오선생’이란 분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출자에 대하여’라는 글을 퍼놓았는데 중간에 이성계의 출자에 관한 내용이 있네요. 재야역사학자로 유명한 박시인 교수가 이성계는 여진족이었다고 주장했었는데, 박 교수의 견해와 봉오 선생 자신의 견해를 섞어서 설명했습니다.
핵심만 간추리면
(1)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관리와 싸우고 백성 170여호를 데리고 강원도 삼척 등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당시 한반도 북부는 몽골군 침입으로 난리가 났지만 전주는 남부지역이라 비교적 안전했다. 따라서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란오는 마당에 어떻게 안전한 전주에서 거꾸로 북쪽으로 가냐? 더구나 겨우 20살 청년의 말을 믿고 그 많은 사람들이.삼척으로 갔다 경흥으로 갔다...
(2) 이안사 이전의 이씨 족보에 실린 장군, 대신 등이 사서에 안보인다. 즉 이성계 족보는 조선 건국 뒤 날조한 것이다
(3) 이씨(李氏)였다는 것도 신라 · 고려의 명문이었다는 근거가 안된다. 왜냐하면 여진족, 거란족에 이씨 성은 흔했다.
(4) 이성계가 태어났다는 함흥부는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나 이후 계속 여진족의 땅이었다. 물론 원나라 때는 몽골 땅
(5) 이성계의 조부인 탁조의 몽고 이름은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의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이성계 숙부의 이름은 역시 몽골식인 탑사불화(塔思不花)였다.
그 부분만 퍼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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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은 필자는 불현듯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서울대 박시인 교수가 썼던 《알타이문화사연구》라는 책의 내용이 떠 올랐다.
내용이 지루하겠지만 이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여진과 조선의 관계는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즉 목조(穆祖)가 두만강변에서 활약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이안사가 그곳에 살게 된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군이 상장군의 사위가 되어 이안사를 낳았는데 나이 20남짓 할 때까지 고향인 전주에 살다가 관리와 싸우고 백성 170여 호를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배 15척을 만들고 왜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에 몽고의 야굴(也屈)이 내침하여 산성에 피란해 있다가 전주에서 싸운 관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 170여 호를 거느리고 의주(宜州: 영흥)로 이주하여 쌍성 이북을 다스리고 있던 몽고군 장군 산길(散吉)에게 김보노(金甫奴) 등 백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고, 서로 사귀어 결코 잊지 않기로 약속하고 지냈다. 평안도인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이렇게 많이 귀속해 왔던 것이다. 이성(利城)으로 이주해 가자니 그곳 천호장이 군대를 가지고 막으므로 말로 귀순시켜 북으로 들어가서 경흥(慶興)에 도착하였다. 때는 몽고 헌종 4년, 고려 고종 41년(1254). 다음 해에 원이 그 곳에 천호장(千戶長)들을 두었는데 그는 다섯 천호장의 다루하치로서 여러 성을 돌며 일정한 곳이 없었다."
이 시대의 상황을 《고려사》에서 보면 1253년 4월 몽고 현종은 동생 송주(松柱)를 시켜 1만의 군대를 가지고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하여 고려 동계로 남하 공격하고, 아무간(阿毋侃) 홍복원(洪福源)을 시켜 고려의 북계를 침공하였으며, 8월에는 또 다시 동생 야굴을 시켜 순종하면 물러가고 거역하면 용서 않겠다고 선언하며 대거 내침하였다. 이 때는 고려 왕이 이미 강화도에 가 있는 동안이며, 몽고군 3천이 강원도 북부까지 진주해 있고, 그 기병 3백이 지금의 서울지방에서 불을 지르며 살상하고 있었다. 다음 해 정월에 몽고군의 일부가 철수하였으나 7월에는 또 몽고 장군 차라대(車羅大)가 침입하여 9월에 충주, 10월에 상주에 이르는 등 심한 전란으로 몽고에 잡혀 간 사람만도 206,800이 넘고, 살해된 사람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소진된 재산 피해가 이때처럼 심한 일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비교적 안전한 반도 남단부 전주의 주민 170여 호가 스므살 남직한 한 청년이 지방관리와 싸우고 거기서 피신할 때에 그를 따라서 강원도 삼척에 갔을 이치가 없고, 삼척에서 또 모두 함경도 덕원(德原)으로 그를 따라서 이주하였을 이치도 없으며, 이곳에는 1천여 호 4,5천의 주민이 그에게 모이고 그를 따라서 두만강변 경흥(慶興)으로 대이동을 하였을 수도 전혀 없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 시대의 이동의 방향과 정반되기 때문이다. 이 때에 화주(和州) 이북은 고려의 강토가 아니라 몽고군의 지배하에 여진이 살고 있었다. 그 반면 분명히 두만강변 여진인데 전주에서 왔다는 기록이 이가오하(李家吾下)에 관하여 《세종실록》 7년 12월조에도 있다. 그러므로 《실록》에 경흥지방을 가리켜 국가근기지지(國家根基之地)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안사는 이른바 여진 땅 깊은 그곳의 군주(軍主)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태조실록》 처음에 기록된 그의 세계는 어찌된 것이냐를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태조 원년(1392) 7월 17일 이안사 고손 이성계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 하시고 그 다음 날에 사대 조상을 높여 고조를 목왕(穆王), 증조를 익왕(翼王), 조부를 탁왕(度王), 부를 환왕(桓王)이라 칭하고, 2년(1393) 7월 16일에 국호가 조선(朝鮮)이라고 결정되자 신하들이 올린 안에 새로운 왕가의 계보는 신라 태종 김춘추의 10세손 군윤 김은의(金殷義) 사위에 유래하며, 그로부터 태조에까지 20여 대의 직계를 아모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아무개를 낳고라는 식으로 대신 · 장군 따위 지위명과 천상(天祥) · 광희(光禧) · 승삭(承朔) 등의 대단히 상서로운 이름들을 열거하고, "쌓음이 장구하니 발전함이 크고 심음이 견고하니 전승함이 멀다(積之者久, 故發之者大; 樹之者固固傳之者遠)"라 하여 나중에 나랏 글씨가 되었을 때는 지은 《용비어천가》의 원형이 될 글을 실었다. 신라 태종은 661년에 승하하였으니 이래 7백년의 세계를 수 많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을 리 만무하고, 이안사의 이전의 장군 · 대신 등이 사서에 보이지 않는 이름들인 것 등, 이것은 과연 신하들이 안(案) 즉 생각해 낸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성이 이씨(李氏)였다는 것도 신라 · 고려의 명문이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李) 성은 중국 거란 · 여진 · 고려 등 여러 나라에 흔한 성이었다. 알타이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본래 성이 중국 성과 달랐으나, 연표 272년의 흉노장군 이각(李恪), 고구려 정복전쟁 때 말갈 장군 이근행(李謹行), 발해 태조 때의 글안 장군 이진충(李盡忠), 그리고 이성계와 만나고 귀화한 여진 이오로티물 및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귀화 여진 이지란(李芝蘭) 등의 성도 모두 이씨였다. 이것은 모두 알타이어를 쓰는 사람들이 중국적 문화의 지역에서 그 곳의 성을 사용한 문화수용(文和受容:acculturation))의 예에 속한다.
그러므로 조선 왕가의 유래에 관한 사실은 《태조실록》·《용비어천가》 등에 의하면 두만강 하류에서 활약하던 여진의 군주(軍主)가 남하하여 고려말기에 화주지방에 이르러 고려를 위하여 많은 군공을 세우고 드디어 새 왕조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고려인은 여진을 이민족시하였으므로 원래 전주에 살다가 두만강가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남하한 것이라고 말하여 왕가의 유래를 높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가의 유래를 이번에는 정사에서 다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고려사》 에 의하면 1253~4년에 몽고가 경상도까지 침입한 것은 상술한 바 있으며, 1258년에는 화주에서 조휘(趙暉)가 반란하고 몽고에 귀속하여, 몽고는 그로 하여금 거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었다. 1274년과 1281년에는 몽고가 고려군도 동원하여 일본을 공격하였고, 그 뒤에 구비라이 때의 카이두(海都)의 반란이 있을 때는 카이두에 가담한 가단(哈丹)의 군대가 1290~1292년간에 침입하여 원주 · 충주 · 이천 · 연기 등지까지 유린하였다. 이때의 고려 충렬왕(忠烈王)은 원의 황실을 외척으로 가졌으며 원의 지배가 크게 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전주에서 수백 세대가 삼척 · 덕원을 경유하여 두만강까지 이주할 처지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때부터 《고려사》에 조선 왕가의 선조에 관한 언급이 있다. 《고려사》는 고려를 멸한 뒤 조선 태조 4년(1395)에 정도전(鄭道傳) 등 새 왕조의 공신들이 편찬한 것임을 기억하고 읽어 나간다. 1356년 태조의 부친 환조(桓祖)가 고려에 내조(來朝)하였으므로 쌍성 · 화주 지방의 반란민을 잘 다스려 달라고 공민왕이 말하였다. 내조(來朝)란 신민이 아닌 사람이 왔다는 말임이 주목된다. 1360년 양광도에 왜군가 침입하였으므로 환조를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하여 그의 지방장정들로서 군대를 조직하여 싸우게 하고, 환조에게 협조하라고 모든 관리(百官)에게 명령하였다. 이것은 환조가 본시 조정의 정식 군관인 서강병마사가 아니고, 그의 군대는 그의 사병(私兵)이었음을 시사한다. 1361년 4월에 환조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민왕은 동북면에 사람이 없게 되었고나(東北面無人矣)"라고 탄식하였다. 이것은 환조가 중앙에서 파견된 장군이 아니라 봉북지방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나친 감이 있는 칭찬이며,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의 공신들이 왕실의 선조를 높인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환조는 동북면 쌍성 부근에서 사병을 가지고 일어나서 몽고 · 여진 등이 흔히 침범하던 지금의 서울지방에 걸쳐서 활약하며 외적과 싸운 여진 땅 출신 장수였다.(박시인, 《알타이문화사연구》, 탐구당, 216~221쪽 참조)
위에서 일본학자 원전일구는 이성량의 선대의 이름에 쓰인 글자에 의해서 그들이 조선인이 아니라고 몽고 또는 여진이라고 하였다는데 그 이름들을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중국인들은 복성(複姓)이 아닌 한 의레껏 이름이 한 자 아니면 두 글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씨 성의 이름들 중 이철근혜(李哲根橞) · 이하패노(李厦覇努) · 이파도리(李把圖理)는 결코 중국식 이름이 아닌 여진 혹은 몽고족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들이다.
그중에서 이파도리가 더욱 그렇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지리산 일대에 준동하던 왜군을 인월이라는 데서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때 적장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태조실록》 권1 총서편에 나오는 아기발도(阿其拔都)였다. 아기(阿其)는 우리말로 아기니 소년이란 말이요, 발도(拔都)란 몽고말로 용사란 뜻이라고 한다. 청나라와 관련된 사료에 의하면 칭호가운데 파도로(巴圖魯)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파토로(把土魯) · 파토로(巴兎魯)도 쓰이는데 한문으로는 영웅(英雄) · 영용(英勇)의 뜻이라고 한다.
이제 아태조 이성계의 선대 이름자를 한번 보기로 하자. 《조선왕조실록 · 총서편》에 의하면 증조인 익조(翼祖)가 죽은 기사가 있다. 사망년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인지 모년에 죽었다고 했다. 그의 기사에 의하면, "모년 9월 11에 익조가 죽었다. 안변부의 서곡현 봉룡역 뒤골에 장사지냈으니 곧 지릉(智陵)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조부 탁조(度祖)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 이름은 춘(椿)이고 아이적 이름은 선래(先來)이고 몽고 이름로는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고 하였다. 황제의 지시로 아버지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부인 경비는 박씨다. 알동백호(斡東百戶)였고 문하부 시중을 추증한 박광(朴光)의 딸이다. 맏이는 자흥(子興)이니 몽고 이름으로 탑사불화(塔思不花)이고 둘째는 곧 우리 환조(桓祖)이다."라고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도 함흥부는 원래 고구려 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축출하고 3년에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郡)으로 일컬었고, 성을 쌓아 남계의 정호 1,948호를 옮겨 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땅을 여진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에게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 쌍성(雙城)에 속해 있던 것을 공민왕 5년(1356)에 우리 환조(桓朝)에게 명해 쌍성을 격파 옛 강토를 수복 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
이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 건치연혁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 지역은 윤관 등에 의해 겨우 3년 동안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가 지키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도로 여진에게 돌려 주고 말았으며 결국 몽고의 관할로 되었다가 공민왕 때 태조의 부친 이자춘에 의해 고려의 판도에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요나라 · 발해 · 금나라의 관할 지역으로 여진족들이 대대로 살고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성계의 선대는 그 지역에 대대로 살아왔던 연고로 원나라의 벼슬을 습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위에서도 확인하였듯이 이성계의 조부 탁조(度祖)는 몽고식 이름인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로 불렸으며, 이성계의 부친인 환조 이자춘(李子春)의 몽고식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으며, 기술한 바와 같이 숙부의 이름 또한 몽고식 이름인 탑사불화(塔思不花)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상으로 보아 박시인 교수가 이성계의 출자를 이상하게 보는 이유를 알 만하다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인 학자도 이성량의 선대의 이름자를 보고 몽고 또는 여진인으로 추단하게 된 소이연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첫댓글 자꾸 웃음이 나와서 ㅋㅋㅋ;;; 죄송합니다. 한참사에서 계속 입에 거품을 물고 이성계화교설을 운운하면서 한민족의 근본은 여진족과 일본인에 있다는 소리를 해대서요 ㅋㅋㅋ
《고려사》는 고려를 멸한 뒤 조선 태조 4년(1395)에 정도전(鄭道傳) 등 새 왕조의 공신들이 편찬한 것임을 기억하고 읽어 나간다. 1356년 태조의 부친 환조(桓祖)가 고려에 내조(來朝)하였으므로 쌍성 · 화주 지방의 반란민을 잘 다스려 달라고 공민왕이 말하였다. 내조(來朝)란 신민이 아닌 사람이 왔다는 말임이 주목된다.
다시한번 비교자료를 심도있게 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참조가 되었습니다 박시인교수에 대한 연구실적도 알려주시면 참고가 되겠네요
박시인 교수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 분 책은 <알타이 신화>란 책인데 알타이 민족의 범위를 한민족, 일본, 몽골, 여진 등 제 유목민족, 중국 신화의 동이계 인물 등을 포괄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1세대(?) 재야 사학자들의 내공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세대(?) 재야사학자들과는 질이 좀 다르다고 봅니다. 일단 한문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서 문헌을 상당히 꼼꼼하게 분석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것만 뽑아내서 나열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만 뽑아내서 보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