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
2002년 11월 21일 서울 대학로의 한 호프집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학가와 시위현장에서 많이 불린 ‘상록수’였다.
호프집에 모인 사람들은 좌석에서 모두 일어났다. 그리고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단에 앉은 가수의 어설픈 기타 연주와 간간이 엇나가는 박자는 자연스럽게 합창에 녹아들었다.
그 아마추어 가수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이날은 그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과의 간담회 자리였다.
노래는 문화예술인들의 환대에 대한 노 후보의 화답이었다.
20여일 뒤 노 후보의 ‘상록수’는 TV광고에 등장했다.
대통령 후보가 직접 통기타를 치면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노래를 담담하게 부르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상록수’는 ‘노무현’의 상징이 됐다.
‘상록수’ 탄생과정이나 노래가 겪은 질곡의 세월은 노 대통령 삶의 궤적을 닮았다.
가난 등 역경을 딛고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인권, 노동변호사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노무현.
1977년 음악활동을 금지당한 김민기가 공장에서 일할 때 동료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청년들에게 저항정신의 불을 지폈고, 금지곡이 됐다가 1987년 해제돼 빛을 본 것처럼
노 대통령도 이후 서민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가사 구절구절이 어두운 시대에도 변치 않는 신념을 지켰던 인간 노무현의 모습이다.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의 가사 그대로 푸르른 삶을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다. 그는 우리에게 가슴 뛰는 시간들의 기억을 많이 남겼다.
이제는 우리가 그와의 추억을 노래로 부르려고 한다. 지난 1000일간 멈추었던 가슴을 다시 뛰게 할 10곡의 노래로
‘노무현’을 추억하고자 한다.
노무현재단과 (주)사람커뮤니티가 공동으로 기획하는 공식 추모앨범 <脫傷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첫 노래로 ‘상록수’가 선택됐다.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노 대통령의 생과 함께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록수’를 부르며 대통령에 당선됐고,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에도 축하곡으로 불렸다.
2009년 5월 그가 봉하마을을 떠날 때도, 영결식에서도,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상록수’는 그와 함께했다.
2002년 자택에서 통기타를 치며 권양숙 여사와 정답게 ‘상록수’를 연습하는 모습이
서거 직후 방영돼 국민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상록수’가 전국에서 울려 퍼진다.
‘상록수’는 노무현의 노래에서 국민들의 노래가 되었다. 아픔과 추모의 노래가 아닌 다짐과 각오, 희망의 노래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을 격려하는 메시지가 되고 있다.
2012년 우리가 다시 ‘상록수’를 부르며 노무현의 꿈을 되돌아보는 이유이다.
“어릴 때 한참 연습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늘 행사를 위해 하루 열심히 준비했는데 잘 되려는지 모르겠다.
80년대 노래를 얼추 다 아는데, 노래를 배우지 않았다면 평범한 변호사나 판사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2012년 11월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그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예의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상록수’를 불렀다.
그리곤 “내가 하고 싶은 노래는 따로 있는데, (보좌진들이) 과격하게 보일까봐 자꾸 말린다”면서 <어머니>를 자청했다.
<어머니>와 '사람사는 세상'
그의 말대로 민중가요를 배우지 않았다면 노 후보는 이른바 ‘잘 나가는’ 변호사로 계속 살았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민중가요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1987년 6월 18일, 부산지역 민주화 시위가 절정을 이루었던 날에도 그는 <어머니>를 불렀다.
군병력이 투입된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엄중한 상황에서 누군가 <어머니>를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걸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들이 자랑스러웠다"고 당시를 회고하곤 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람사는 세상’이란 말을 좋아했다.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는 첫 구절 ‘사람사는 세상’을 꿈으로 삼았다.
노 대통령은 대중 앞에서 자주 노래를 불렀다. 한번 할라치면 참 수줍어했지만, 일단 시작하면 참으로 신명나게 불렀다.
봄볕이 따뜻했던 2008년 5월,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 앞에서 구수하게 <비에 젖은 주막> 을 부르기도 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결정된 4월 27일, 팬클럽 ‘노사모’가 주최한 행사에서는
참가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아침이슬> 과 <어머니>를 목청껏 불렸다. 앵콜이 빗발치자 <타는 목마름> 을 열창했다.
투박하지만 호소력 짙은 그의 노래에 박수가 쏟아졌다.
그해 가을 서울 여의도에서 그를 지지하는 ‘희망 포장마차’가 열렸을 때는
<작은 연인들> 을 불렀다.
2000년 총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을 때 그는 거리에서 <부산 갈매기> 을 목이 터지게 불렀다.
투박하지만 소박한 진심을 담은 그의 노래는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2002년 자택에서 통기타를 치며 권양숙 여사와 정겹게 <상록수> 를 연습하는 모습이 지금은 애잔하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노 대통령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엔 묘한 동감의 설득력이 있었다”고 평했다.
다시 부르는 노무현의 ‘희망’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노래가 전국에서 울려 퍼진다.
이젠 노무현의 꿈을 담은 노래, 그를 닮은 노래로 추억하고자 한다.
지난 1000일간 멈추었던 가슴을 다시 뛰게 할 10곡의 노래로 ‘노무현’을 간직하자 한다.
노무현재단과 (주)사람커뮤니티가 공동으로 기획하는 공식 추모앨범 <脫傷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 은 이렇게 시작됐다.
<노무현 레퀴엠> 은 그의 66번째 탄생일이 되는 9월 1일 선보일 예정이다.
‘음원 CD’, 메이킹 다큐와 그의 영상이 담긴 ‘동영상 DVD’, 그의 사진과 노래 소개 등이 담길 ‘스토리북’으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