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 근처 콩나물국밥집에 들렀다. 큰길에서 좁은 골목으로 몇 걸음 들어와 있는데도 근방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여느 맛집처럼 음식 메뉴는 하나다. 차림표에는 콩나물국밥과 모주 가격만 적혀 있다.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왔다. 시원한 국물을 한술 뜨고 아삭한 콩나물을 건져 먹다가 어머니가 해주던 김치 콩나물국이 생각났다.
채소 구하기가 어려운 겨울이 오면 어머니는 안방 윗목에서 콩나물을 길렀다. 실한 노란 콩을 물에 불린 후 시루 바닥에 얇은 천을 깔고 그 위에 불린 콩을 얹는다. 시렁처럼 길쭉하고, 두 갈래로 갈라진 쳇다리를 빨간 대야에 걸치고 그 위에 콩이 든 시루를 올린다. 햇빛이 한 줌도 못 들어가게 검은 천으로 시루를 덮는다. 콩나물은 따로 건사를 하지 않아도 산골 아이들처럼 쑥쑥 자랐다. 그저 틈나는 대로 바가지로 물만 부어 주면 된다. 바가지 물을 먹은 콩나물시루에서는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먹을 게 많지 않은 산골에서 콩나물은 요긴했다. 콩나물무침, 콩나물국이 수시로 상에 올랐다.
어머니는 콩나물국에 묵은지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시큼하고 얼큰하게 끓였다. 술을 즐기던 아버지를 위한 맞춤 해장국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는데도 어머니의 콩나물국 레시피는 변함이 없었다. 콩나물밥을 만들어 참기름과 양념간장이나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기도 했다. 찬밥이 남았을 때는 신 김치와 콩나물, 고추장을 넣어 칼칼한 갱시기를 만들어 먹었다. 찬이 따로 없어도 한 끼로 충분했다. 콩나물은 비타민 천국이다. 콩이 발아하여 콩나물이 되면서 비타민 함유량이 크게 는다고 한다. 그러니 콩나물은 겨울철 산골 사람들에게 유용한 먹거리였다.
콩나물은 깨끗한 물을 좋아한다. 어스름 저녁이 되면, 장터에 일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매일 물을 줬다.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먹고 콩나물은 쑥쑥 자랐다. 매서운 겨울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손에 흘린 우물물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어머니는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태고자 장터 슈퍼에 콩나물을 팔기로 했다. 콩나물시루가 윗목에 더 들어서고 물 갈아 주는 시간이 길어졌다.
알맞게 자란 콩나물을 일주일에 한 번씩 장터 슈퍼에 가져다줘야 했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 내가 배달도 맡아야 했다. 우리 집엔 자전거가 없어 옆집에서 빌렸다. 하늘색 체육복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얼굴을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배달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자전거로 하는 콩나물 배달이 요즘의 새벽 배송보다 빨랐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났다. 전날 내린 눈이 밤새 얼어 길이 미끄러웠다. 그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빠르게 달리다 지서 앞에서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콩나물시루가 깨지고 콩나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까만 신작로 위에 노란 콩나물 꽃이 피었다. 무릎이 까져 피가 나는데 아픈 줄 몰랐다. 이른 아침이라 보는 이가 없어도 몹시 창피했다. 콩나물을 쓸어 담는 손 위로 콩알만 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철없는 마음에 가난만 물려주고 먼 길 떠난 아버지가 미웠다.
동네 사람들도 이따금 콩나물 사러 우리 집에 왔다.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에 150원. 내 용돈이 되기도 했기에 반갑게 맞았다. 어느 날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 반가운 손님이 오려는지, 우물가 감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아침부터 요란스레 울어 댄다. 누런 한지문의 문풍지 사이로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았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 긴 머리, 여리여리하게 생긴 뒷집 소녀였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소녀는 도시로 유학을 갔다. 소녀는 방학이 되어도 좀체 볼 수가 없었다. 행여나 소녀가 집에 왔을까, 뒷집 골목을 지나다 헛기침을 하고 흙담 구멍으로 몰래 살펴보기도 했다. 은근 보고 싶었던 그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소녀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당에 쌓인 눈을 미리 쓸어 놓았다면 소녀는 편하게 내게 올 수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생기면서 침이 마른다. 용돈을 벌어야 하나, 아무도 없는 양 숨죽여 있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점점 다가오는 소녀의 발걸음 소리에 가슴이 더욱 쿵쿵거렸다.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나도 모르게 소녀 앞에 서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소곳이 서 있는 소녀 뒤로 마당에 쌓인 하얀 눈이 눈부셨다. 소녀는 말없이 바가지를 내밀었다. 일꾼 밥처럼 고봉으로 콩나물을 담아 건네주었다. 다른 이보다 곱절이나 많았다. 빨간 콩나물 바가지를 들고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한동안 소녀의 수줍은 웃음을 떠올리면서 행여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으로 혼자 얼굴을 붉히곤 했다. 콩나물에 대한 기억 중 소녀의 추억 한 조각이 섞여 있다는 것은 나에겐 다행한 일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콩나물 키우기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려울 때마다 콩나물에 물 주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아래로 다 흘러버리는데도 어느새 콩나물은 쑥쑥 자랐다. 내가 하는 일이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크게 조바심치지 않는다. 세상사가 콩나물 키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소박하고 아름다운 글입니다.
수필수업을 받을 때 선생님이 그러셨지요.
제자들이 늘 제자리 같아도 알게 모르게 콩나물처럼 자란다고....
저는 콩나물이 끓는 냄새부터 좋아요.
콩나물 김칫국, 비빔밥, 모두 질리지 않는 소울푸드랍니다.
소녀의 기억이 이 글에 또 은근한 양념으로 더 맛갈스럽게 해줍니다.
과한 칭찬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읽어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등단글 자연스럽게 올리도록 요청해주시고 답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당에 쌓인 눈을 미리 쓸어 놓았다면 소녀는 편하게 내게 올 수 있었을 텐데' 절절한 마음이 가슴에 꼭 박힙니다.
이 문장을 포함한 문단 전체가 조마조마, 두근두근 압권이에요.
등단동기이신 이래춘 선생님 초회작품도 이리 감동적이고 재미있네요.^^
아이고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