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디큐어와 즉흥환상곡
이혜연
숨이 멎는 것 같았어. 내가 알던 네가 맞는지, 내 눈을 의심했어. 눈을 몇 번 깜박인 다음 크게 뜨고 다시 보았지. 맞네, 너인 것.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지? ‘환골탈태’라는 말, 이런 너를 두고 이름인가 봐.
너를 본 순간 열정적인 피아노 선율 한 가락이 전율처럼 내 몸을 훑고 지나갔어. 쇼팽의「즉흥환상곡 C#단조」서주부였지. 스타카토를 찍듯 힘 있고 명료한 음들이 건반 위를 구르듯 훑고 지나는 곡. 그렇게 내 가슴은 요동을 쳤지. 맥박이 빠르게 뛰고 숨이 차더니 온몸이 스멀거렸어. 그런 기분 참 오랜만이었어. 너의 느닷없는 요염함이 잠자고 있던 내 안의 욕망을 흔들어 깨운 거지. 왜 아니겠어? 너를 본 이 라면 누구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하늘 볼 날이 드문 우리. 그 만큼 주목 받기가 힘이 들지. 같은 종족에, 신체 끝을 보호한다는 같은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손톱은 처지가 달라. 하긴 하늘은 볼 수 있다지만 대접 받지 못하고 있는 그들도 많긴 해. 생김새를 뽐내보기도 전에 잘려나가거나 닳아지기도 하니 말이야. 하지만 그런 그들도 가끔은 호사를 누리기도 하지. 심경에 변화가 생기면 헤어스타일을 바꾸듯이 주인들은 그들에게 매니큐어라는 멋진 옷을 입혀주기도 하니까. 내 주인이 그래. 어쩌다 화장대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매니큐어병을 끌어내어 손톱에 칠을 하고는 우아한 손놀림을 해보곤 하지.
긴 손톱에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면 금상첨화, 매니큐어는 빛을 발하지. 시쳇말로 야시시하다고 하나. 아니 고혹적이기까지 해. 저런 손톱을 하고 어떻게 집안일을 하나 비아냥거리면서도 흘끔거리게 되니 말이야. 그런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유한마담들의 전유물 같았던 손톱 치장이 요즘에는 네일아트란 이름을 달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더라고. 색칠에 그치지 않고 꽃도 피고 나비도 나는, 별의별 무늬까지 그려 넣는 거야. 손톱 모양이 볼품없어도 걱정이 없어.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인조 손톱이 있으니까. 이제 패션의 일부가 되었단 말이지. 그런 만큼 흔해져서일까 눈에 익어서일까. 예전만큼 매혹적이지는 못하더라고.
하지만 우린 달라.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다르다고 해야겠지. 네 모습은 무척 도발적이야.
제 아무리 예쁜 신발 속에 담기면 뭘 해? 눈에 띌 수 없는 우리. 게다가 탄력 있는 스타킹에 조여져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신세 아니었어? 그런 우리가 환호작약할 때가 있지. 맨발에 샌들이 대세인 계절, 여름이야. 우리는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맘껏 숨을 쉬지. 그렇다고 우리가 주목을 받는 건 아니야. 오랜 세월 짓눌리고 찌들어 생김새가 영 볼품없어졌으니까. 게다가 길바닥의 흙먼지라도 뒤집어쓰게 되면 그 몰골이 어떻겠어. 숨어 지내는 편이 더 나았겠다 싶지.
그런 내 몰골 때문에 내 주인이 민망해진 적이 있었지. 벌써 사십여 년 전 일이네. 신부마사지를 받으러 명동에 갔을 때였어. 오월이었고, 무릎 위를 살짝 넘긴 짧은 치마에 샌들을 신었었지. 좀 이르다 싶었지만 청춘이었으니까 노출에 성급했겠지. 마사지용 침대에 누우니 마사지사 아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라고. 그러더니 내 주인을 보고 “관리 안 받으세요?” 하는 거야. 한심하다는 표정이었어. 언뜻 멸시의 눈빛조차 보이더라고. 왜 아니겠어. 그때만 해도 명동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미인들이 모이는 패션의 일 번지였으니까.
참 묘한 기분이었어, 전신마사지라는 것. 내가 아니라 내 주인이 그런 것 같았단 말이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마치 승은을 입기 전 몸단장을 받는 궁녀 같은 느낌이 들기라도 한 것일까. 신부가 꼭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나 거부감이 들었는지 온몸을 잔뜩 움츠리더군.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사지가 시작되자 온 몸의 감각이 들고 일어났던 모양이야. 아가씨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움찔움찔, 다리를 만질 때는 발가락을 꼬물거리기까지 하더라고. 덩달아 나까지 찌릿찌릿했지. 내 인물도 훤해졌어. 뜨거운 타월과 마사지로 노글노글 풀어놓더니 갈고 다듬고….
긴장했던 근육들이 흐늘흐늘해지면서 나른해졌던가 봐. 주인이 약하게 코를 골았어. 그 사이 마사지사가 화룡점정을 했지. 내게 와인 빛 옷을 입혀 놓은 거야. 처음 입어본 옷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 아니, 갑자기 성숙해진 느낌이 들면서 우쭐해지더라고. 요염을 떨어보고 싶어 안달이 나더란 말이지.
주인이 깨어났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눈치였어. 그저 처음 받아본 전신마사지가 어색하기만 하고 좀 전에 무의식적으로 보였던 신체 반응이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했던지 서둘러 옷을 챙겨 입더라고. 샌들을 신으려다가 비로소 변한 내 모습을 본 거야. 아연실색한 표정이었어. 어쩌겠어. 그대로 거리로 나설밖에.
그런데 별일도 다 있지. 우리 주인이 달라졌지 뭐야. 조신하던 걸음걸이가 과감해지더라고. 다리를 쭉쭉 뻗어 자신 있게 내딛는 거야. 엉덩이를 조금 흔들기도 했던가. 그 바람에 어깨 너머로 긴 머리가 찰랑거렸어. 안달이 나 있던 나도 마음껏 끼를 부려보았지. 와인 빛, 그 검붉은 색깔이 부린 조화였을까. 맥박이 빠르고 힘차게 뛰면서 온몸의 신경이 팽창하는 듯 쾌감이 일더군. 사람들의 시선? 모르겠어. 끌기도 했겠지. 지금으로 치자면 배꼽티를 입은 셈이라고 해야 할까. 미니스커트에 맨발 바람도 그러한대 페디큐어가 어디 그리 흔한 시절이었겠냐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주인이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것 같더란 말이지. 아니 그런 자신의 도발적인 모습에 스스로 취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얌전하다 소문 자자하던 우리 주인이 말이야.
그 후 어땠냐고? 쇼팽의「즉흥환상곡 C#단조 작품 66」들어보았어? 열정이 휩쓸고 간 뒤에 오는 안단테 칸타빌레를.
명동을 벗어나자 참 멋쩍어지더라고. 나나 주인이나. 활기차던 걸음이 쭈뼛쭈뼛, 얼기설기 얽어진 샌들 속에서 얼마나 감춰질 거라고 주인은 나를 숨기느라 발가락을 잔뜩 움츠리며 걷는 거야. 나도 주눅이 들밖에. 요염은 간 데 없어졌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신발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느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어. 방에 들어서자 주인은 다짜고짜 아세톤을 찾아 솜에 듬뿍 묻히는 거야.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았어. 나도 빤히 주인을 올려다보았지. 아주 잠시 동안이었어. 그리고 나는 옷을 벗었어.「명동 즉흥환상곡 작품1」, 십여 분간의 꿈이었어.
불쑥 불쑥, 그 때가 생각날 때가 있지. 너를 만난 오늘이 그래. 늘씬 날씬 각선미가 돋보이는 하이힐, 샌들의 물결 속에서 반짝이는 너를 발견한 순간, 내 가슴은 뜨거워졌어. 그리고 여지없이 그 선율이 폭풍처럼 내 몸을 훑고 가는 거야.
「작품2」는 없었냐고? 당연하지. 우리 주인은 엄친딸에서 요조숙녀로 그리고 현모양처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거 알아? 잉걸불, 그런 걸 늘 가슴에 담고 살고 있는 느낌.
이제 나는 하늘 볼 날이 거의 없어졌어. 그만큼 편안해졌다고 해야 하나. 볼 넉넉하고 푹신한 여포화 속에서 활개를 펴고 있으니까. 신발 이름이 기가 차지 않아? ‘여자이기를 포기한 신’.
오늘은 운이 좋았어. 내 주인이 수없는 망설임 끝에 샌들을 신었으니까. 꼭 맵시를 내야 할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비록 굽도 낮고, 볼품없는 모양이고, 내 몰골 또한 초라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덕분에 너를 만날 수 있었으니.
너, 너의 요염함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너는 새빨간 립스틱보다, 배꼽티보다, 초미니스커트보다 충분히 더 관능적이니까.
페디큐어, 너는 나의 영원한 즉흥환상곡이야.
첫댓글 그렇지요. 우리의 신체중에서 가장 혹사를 당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는 ... 선생님의 즉흥환상곡을 보고
형편없이 모지라진 내 발톱을 내려다봅니다. 한참 동안이나.
평소 선생님 글과 풍기는 뉘앙스가 많이 달라요. ㅎㅎㅎ
정말 즉흥환상곡입니다.
그런데 이 글 <문예바다>에 실렸더군요.
또 그런데,
<문예바다>라는 책자가 어떻게 저한테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처음엔 수록작품에 수필이 없는 것 같아 더 오리무중...
나중에 보니 몇 편의 수필 중 선생님 작품이 있어서 반가웠어요.
많이 다르지요? ㅎㅎㅎ
그런데 그것도 또 다른 나겠지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라는 노랫말처럼 나도 나를 모르겠거든요.
어쩌면 글쓰기는 숨은 나를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혹 이복희 선생님 <계간문예>에 글 실린 적 있으세요?
백시종 선생이 <계간문예>그만 두시고 <문예바다>를 창간하셨거든요.
저는 그런 적 없고 그분이 시인이라는 것 밖에는...
또 다른 숨어있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대할께요. ㅎㅎㅎ
어머니나~~~!!!
변신은 무죄라더니~~~^^
즉흥환상곡 리듬을 타신 이혜연 선생님의 마음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손톱보다야 발톱이 뚝심 세지요.^^♪♬
발랄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