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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로 그 대가를 받은 비지니스 "톱 6"
비지니스에서 선견지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항상 앞으로 예상되는 일을 예측, 그리고 결단. 이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라고한다고 하여, 역시 인간인 이상 그렇게 세상이 간단히 보이는 것 아니다.
그리고 결단에는 실패가 따르게 마련이다. 반대로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예상 외로 대성공이 되기도 한다. "CEO의 NO로, 결과적으로 이것은 실패였다." 라고 역사상 남을 "결단"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The Beatles를 거절
The Beatles on Ed Sullivan Show in 1964
책임자 : 영국 레코드 회사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의 마이크 스미스와 딕 로우(Mike Smith and Dick Rowe)는 신인발굴의 런던 지점 책임자였다.
배경 : 1961년12월31일, 마이크 스미스는 리퍼풀(Liverpool)까지 록 밴드 "Beatles"의 스태이지를 보러 왔었다. 그는 그 밴드는 충분한 재능이 있다고 느껴, 그들을 다음해 뉴욕의 오디션에 초대했다. 우선 그룹은 런던에 와서, 데카 레코드 회사의 스튜디오에서 15곡을 2시간에 걸쳐 연주해고, 리퍼플로 돌아가서 오디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럭저럭 몇 주간이나 지나버렸다.
결단 : 신인 발국 담당자 로우는, "Beatles"의 밴드 매니저에게 다른 인기 그룹인 "The Ahadows"와 음악이 비슷하여, 레코드 회사가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 유명하게 된 거절의 말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음악이 마음에 안든다. 4인조로 기타 같은 걸로 끝내고 있다."
충격 : 결과적으로 하는 수 없이 그들은 "EMI 레코드"와 계약하여, 기타 밴드를 폭발적으로 부활시켜,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그룹 밴드가 탄생했다. 계약 뒤로 2년 남짓하여 EMI 레코드는 고속 성장했다.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Beatles"를 거절한 데카 레코드는, 공전의 히트를 날린 비틀스의 레코드 판매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우습게도 EMI의 레코드 생산 하청업자로 전락했다.
ET를 거절
The Extra Terrestrial (1982)
책임자 : 죤 & 훠레스트 마즈(John and Forrest Mars)는 쵸코렛트 과자의 M&M`s으로 유명한 Mars Inc의 오너이다.
배경 : 1981년 유니버셜 스튜디오(Universal Studios)는 마즈사의 초청해 신작의 영화에 M&M`s을 이용해도 될지 의논했다. 당시는 이러한 상품이나 제품을 영화에 등장시켜 제작 비용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단 : Mars Inc의 형제 오너의 대답은 "NO"였다.
충격 : 이 영화가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의 E.T.였기 때문이었으나, 이 쵸코렛트 과자를 사용하는 장면은 "영화의 주요 포인트"이며, 소년 엘리오트가 E.T.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집으로 불러 데리고 오는 장면이다.
협력을 거절당한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쵸코렛트 회사 "허쉬"(Hershey’s)와 교섭하여, 신제품 리스즈 피스(Reese's Pieces)라는 쵸코렛트로 계약해 버렸다. 최초의 매상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E.T.가 히트를 날리면서, "E.T.가 마음에 든 과자"로서 폭발적인 매상을 올렸다.
겨우 2주간의 매상은 3배로 뛰었으며, 그 뒤로도 수 개월 매상은 폭발적이었다. 계약을 결단한 허쉬 사의 책임자 잭 두두(Jack Dowd)씨는 "사상 최고의 수요였다."라고 말했으며, "단번에 신제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통상 광고라면 약 2억 달러의 코스트는 필요했다."라고 한다.
전화 도입을 거절
책임자 : 1876년의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의 사장 윌리엄 오튼(William Orton)
배경 : 미국의 웨스턴 유니언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통신이었던 전보업무를 독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고 힘있는 기업이었다. 자본금 4,100만 달러를 필두로, 경제계의 영향력도 막강하여, 무서울게 없는 회사였다. 이때 보스톤의 부호 가디너 그리너 허바드(Gardiner Greene Hubbard)씨가 자기가 투자한 신발명의 제품특허를 사지 않겠냐고 타진해 왔다. 하버드씨는 10만 달러에 교섭하였으나, 오튼씨는 이것을 농담으로 일소해 버렸다.
1889 Western Union Telegram - Images & Artifacts From The Post Civil War Era
결단 : 오톤은 허버드씨를 경유하지 않고, 발명자인 벨(Bell)씨에게 직접 회답을 보냈다. "벨씨에게..."로 시작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신중히 검토한 결과, 상당히 흥미 깊은 신제품이기는 해도, 상업적 가치는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전기제품 같은 장난감을 우리 회사에서 어떻게 이용하라는 겁니까?"
충격 : 벨이란 이름으로, 그 발명품이라는 것이 전화였다는 것은 누구나가 짐작이 될 걸로 믿는다. 사실은 웨스턴 유니언에게 이 제품은 완벽한 것이었다. 발명자 벨(Alexander Graham Bell)씨는 협상에서, 이미 전보의 넥트워크는 전국에 뻗어져 있으므로, 전화는 전보의 라인을 이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웨스턴 유니언이 할 일이라고는 이미 뻗어 있는 라인에 전화를 설치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의 전화선의 네트워크가 수개월 정도에 완성될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톤씨의 이 결단으로 인해, 벨씨는 이 특허를 그대로 20년간이나 자신의 전화회사에 갖고 있게 되었다. 뒤로 벨씨는 회사의 이름을 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AT&T)으로 변경하여,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겨우 10만 달러에 팔리지도 않은 이 특허는 사상 가장 가치있는 특허였다.
우스운 일은, 벨씨를 거절하고부터 2년이 지나서 오튼씨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을 느끼고, 이 특허를 얻기 위해 전화의 네트워크 만들기에 수 백만 달러를 투입했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는 최종적으로 벨씨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과가 되어, 성공하여 이름을 남기기는 커녕, 미국 사상 최악의 결단을 내린 한 사람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참고로 웨스턴 유니언은 2006년 전신 서비스를 중지, 2007년에는 다른 서비스도 중지했다고 한다.
버드와이저에 대항
책임자 : 위스콘신주의 밀워키에 있는 쉴츠(Schlitz)사의 책임자 로버트(Robert Uihlein Jr.)씨
배경 : 1970년대 쉴츠(Schlitz) 맥주는 미국에서 버드와이저(Budweiser)에 이어 두번째의 매상에 달했다. 그래도 1957년까지는 1위였으므로, 로버트는 버드와이저의 메이커인 언하우저 버쉬(Anheuser-Busch) 사에 도전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것은 맥주에 사용하는 재료비를 절약하여 주조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해, 같은 양의 맥주를 보다 싸게, 보다 빠르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계획이었다.
결단 : 로버트씨는 지금까지 40일간 걸려 만들던 과정을 15일로까지 단축해, 몰트 대신 훨씬 싼 "콘 시럽"으로 대체했다. 더욱이 안정제까지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렸다.
충격 : 로버트씨의 생각대로, 싸고 이익이 오르는 맥주가 완성, 이것으로 이익도 올렸다. 그런데 이 맥주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이 싸구려의 원맥주 재료는 곧 캔 바닥에 침전하여, 마치 그것은 "콧물과 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 "콧물 같은 맥주"의 평판을 알면서도, 로버트씨는 한참 동안 회수하지 않아, 매상은 급강하하여, 결국 톱3에서 떨어져 나갔다. 쉴츠(Schlitz)는 드디어 1,000만병의 "콧물같은 맥주"를 회수하기로 했으나, 이미 평판은 땅에 떨어진 후였으며, 매상은 두번 다시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1981년에는 밀워키의 양조장을 폐지하고 다음해에 라이벌 회사에 매수되었다.
자동차 모델 체인지를 거절
1923년식 포드 "모델 T"
책임자 : 헨리 모터(Ford Motor Company)의 창설자 (Henry Ford, 1863-1947) 씨
배경 : 헨리 포드씨가 1908년에 최초로 "포드 모델 T"(Ford Model T)를 시장에 투입한 당시에는 참신한 모델이었다. "싸구려 자동차는 이미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었으나, 참신하고 안전의 양면을 제공하는 자동차는 없었다."라고 평가 되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가격은 점차로 빠르게 내려 갔으나, "모델 T"는 처음으로 싸고 질이 좋은 자동차로 미국 문화에 혁신을 가져왔다.
결단 : 당시 "모델 T"는 포드 모터가 만든 유일한 자동차였다. 자동차 산업이 번성해져 경쟁이 심해지게 되자, 포드의 종업원도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최초의 모델 체인지의 제안은 자동차가 나온지 4년 밖에 경과하지 않은 때였으나, 1912년에 그의 가족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 왔을 때에 스태프 일동은 놀라게 하려고 "뉴 모델"을 준비하여 두었다.
포드 "모델 T"의 전륜 포드 "모델 T"의 후륜
스태프들은 차체가 낮은 새로운 "모델 T"를 준비해, 빨간색으로 칠해 번쩍번쩍 화려한 신차가 포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드씨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자동차의 주위를 3, 4바퀴 돌면서, 자동차를 몇 번이고 주위 깊게 관찰하고 나서, 양손을 주머니에서 빼는 것과 동시에 왼쪽 문짝을 잡아 뜯어 버렸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동차 전부를 맨손으로 미친듯이 박살냈다.
이 에피소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창조한 자랑스러운 디자인에 손을 대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메시지가 되었다. 이후로 로버트 레이시(Robert Lacey)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델 T는 실제로 헨리 포드씨의 창조의 하사품으로, 그는 그것으로 더 없는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는 이해가 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자기의 걸작에 대해서 지나 치다고 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다."
1915년식 포드 "모델 T"
포드씨의 결단은 너무나 분명해, 1925년, 즉 15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으나, 이 모델은 아직도 최초 시장에 나온 모습 그대로의 모델이었다. 언제나 같은 시끄러운 엔진의 소리, 부족한 마력의 4실린더 엔진(four-cylinder engine), 구식의 트랜스 밋션 등 초기 당시의 부품이 대부분 그대로 쓰였다.
타이어, 전기 스타트 그리고 엑셀레이터 정도는 양보하여 어느 정도의 변화는 가져왔다. 1920년대는 검은색 이외에 여러가지 색의 자동차를 내어 놓기에 이르렀으나, 중요한 모델은 구형의 "모델 T"인채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뉴욕의 어느 포드 자동차 딜러는, "마구간의 색을 다시 칠한다고 하여 마구간인 것에는 변함없다. 리빙룸이 되지는 않는다." 라고 혹평했다.
충격 : 포드가, 이 영예라고 할 정도의 "자동차의 진화"를 쉬게하고 있을 때, 라이벌 회사들은 혁신 중이었다. 4실린더에서 힘있는 메뉴얼 클러치로 기어가 첨가된 6실린더(six-cylinder engines)로 바뀌는 등, 이러한 새로운 자동차는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질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비포장 도로 주행으로 설계된 "모델 T"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27년식 포드 "모델 T"
자동차 딜러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거래를 시작했다. 닷지(Dodge)나 제너럴 모터즈(General Motors)는 매출을 착실히 쌓아 갔으며, 포드의 시장은 1923년의 국내 매출 57%, 1925년에는 45%, 1926년에는 34%로 확실히 눈에 보이게 되었다. 드디어 1927년 모델 체인지를 발표했을 때는, 이미 시장의 경쟁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시보레(Chevrolet)가 드디어 포드의 매출을 넘었다.
1929년에 발표한 "Model A"의 판매 매상으로 겨우 1위로 복귀하긴 했으나, 다음 해 다시 시보레에 쳐져, 이 뒤로는계속 2번째로 만족해야 했다. 자신만만했던 포드가 두번째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은 1930년부터이다.
2009년04월23일, 미국에서 발간되는 비즈니스 월간지 포트폴리오 닷컴에 의하면 "자동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포드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최고경영자"(CEO)로 선정됐다. 포트폴리오 닷컴은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교수 등 전문가 들과 함께 선정한 것으로, JP모건이 2위에,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이 3위, 1920년대 GM 회장이었던 알프레드 슬론이 4위, IBM의 루 거스트너 전 회장이 5위에 각각 뽑혔다. 포트폴리오는 선전기준으로 가치 창출, 가치 파괴, 혁신, 경영 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10위에 올랐다.
M★A★S★H 를 헐값에 처분
책임자 : 20세기 폭스의 TV 부분의 간부
배경 : 20세기 폭스(Twentieth Century Fox Film)는 1972년에 시작한 드라마 "M★A★S★H"(매슈)를 그다지 기대하 않았다. 간부는 M★A★S★H의 영화 셋트장을 이용해 드라마 시리즈를 그냥 적은 비용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20세기 폭스사가 히트친 유일한 프로가 되었다. 3년 뒤에 이 시리즈 가운데 2명의 출연 배우가 떠났으며, 시청률은 점점 떨어져 재정이 힘들게 되자 20세기 폭스사는 당황하게 되었다.
결단 : 어떻게 해서라도 이익을 올리기 위해 20세기 폭스사가 생각해 낸 것은, "제작한 영화의 장래분에 해당하는 방영권을 미리 처분"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방 TV국이 1975년에 매수하였으나, 4년뒤인 1979년까지는 방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폭스는 시리즈의 인기는 보증할 수 없고, 1 편당 13,000달러, 배상금지와 반품금지의 거래조건이었다. 이 계약의 조건으로 성립되어, 20세기 폭스사는 2천 500만 달러를 손에 쥐게 되어 일단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충격 : 그런데 4년 뒤인 1979년 방영이 되자 인기가 오르기 시작해 그해에는 3위에 랭크 되었다. 필요없게 된 드라마를 물려 받은 판권으로 성공한 프로가 되어, "총 168편으로 1편당 100만 달러 이상의 이익"을 올렸으며, 불행하게도 20세기 폭스는 그 막대한 은혜를 입지 못했다.
M★A★S★H의 줄거리
타이틀의 매쉬는 이동 미군외과병원(Mobil Army Surgical Hospital)을 뜻한다. 1970년 미국 영화로 한국전쟁을 무대로, 임무는 제쳐두고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3명의 군의관을 그린 "반전영화","코메디". 한국전쟁 중에 이동 미군외과병원에 3명의 군의가 배속되었다. 군의로써의 실력은 인정 받을 수 있으나, 하는 짖 모두가 파격적이며, 일이 끝나면, 한시도 쉴사이 없이 외설적인 장난으로 시간을 소일하고, 예사로 군기를 무시하고 또한 정숙한 여군을 곤란하게 하고, 그녀의 배드신을 군방송에 흘러 보내기도 한다. 또 그녀의 샤워하고 있는 샤워실을 부수기도 하여 원내의 소동을 수 없이 일으키는 천방지축의 군의관들이다.
첫댓글 그걸알수만있다면얼마나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