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7처를 법계에 펴신 부처님
화엄법계에서의 시간이란
순간이 그대로 한량없는 겁
이 도리 알면 순간을 살아도
무량겁 산 것과 시간은 동등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일념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해
의상 스님, 법성게 30구를
꿈 속 30역에 비유해 설명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순간에
한량없는 공덕 지을 수 있어
‘법성게’ 제12구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일념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라는 이 구절도 시간에 근거해서 연기존재가 상즉함을 밝힌 것이다. 순간이 곧 긴 세월인 염겁동시(念劫同時)이고 염겁평등의 무애경계이다.
‘화엄경’은 전체적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때[始成正覺]에 깨달으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신 법문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의 설법처는 통틀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7처를 법계에 펴셨다(不離樹下 羅七處於法界)’라고 일컬어지며 설법시는 성도하신지 얼마 안 된 제이칠일(成道未久 第二七日) 또는 성도 후 최초 21일간(最初 三七日) 등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그때에 한량없는 시·공간의 모든 경계가 다 펼쳐지고 있으니, 선재동자가 무량겁동안 한량없는 선지식을 섬겨 헤아릴 수 없는 해탈법문을 얻기도 한다. 일체처의 일처(一處)와 일체시의 일시(一時)에 현상의 사법이 다 전개되는 화엄법계의 시간은, 순간이 곧 한량없는 겁인 것이다.
심입무수겁 개실도피안 무량겁일념 일념무량겁.(深入無數劫 皆悉到彼岸 無量劫一念 一念無量劫) (‘이세간품’)
수없는 겁에 깊이 들어가서 모두 다 피안에 이르니 / 무량겁이 일념이고 일념이 무량겁이로다.
어념념중실명료 불가사의무량겁 여시요지삼세겁 구족안주구경행(於念念中悉明了 不可思議無量劫 如是了知三世劫 具足安住究竟行) (‘금강당보살십회향품’)
념념 중에 불가사의한 무량겁을 다 밝게 요달하시니 / 이와 같이 삼세겁을 요달해 알아서 구경행을 구족하여 안주하신다.
일체삼세 소유겁수 어념념중 실견무여(一切三世 所有劫數 於念念中 悉見無餘) (‘세간정안품’)
일체 삼세의 있는바 겁수를 념념 중에서 다 보아 남음이 없다.
삼세소유광대겁 불념념중개시현 피제성괴일체사 부사의지무불료(三世所有廣大劫 佛念念中皆示現 彼諸成壞一切事 不思議智無不了) (‘세주묘엄품’)
삼세의 있는바 광대한 겁을 부처님께서 념념 중에 다 시현하시니 / 저 모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일체사를 / 불가사의한 지혜로 요달하시지 않음이 없다.
삼세소유일체겁 어일념중능실현 유여환화무소유 시명제불무애법(三世所有一切劫 於一念中能悉現 猶如幻化無所有 是名諸佛無礙法) (‘노사나불품’)
삼세의 있는 바 일체겁을 일념 중에 다 나타내시되 / 마치 환화와 같아서 있는 바가 없으니 / 이 이름이 제불의 무애법이다.
‘초발심공덕품’에는 초발심보살의 공덕이 모든 공덕보다 수승하여 한량없으니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처되기 때문임을 설하고 있다. 그러한 초발심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은 보살이 발심하는 그 까닭에 이미 담겨있음을 볼 수 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이 일념과 무량겁이 평등함을 알고자 발심하기도 한다.
“긴 겁[長劫]이 짧은 겁[短劫]과 평등(平等)하고, 짧은 겁[短劫]이 긴 겁[長劫]과 평등하며, 한 겁[一劫]이 무수겁(無數劫)과 평등하고 무수겁이 한 겁과 평등하며, 부처님 계시는 겁과 부처님 안 계시는 겁이 평등하고 부처님 안 계시는 겁과 부처님 계시는 겁이 평등하며, 한 부처님 겁 가운데 불가설 겁이 있고 불가설 부처님 겁 가운데 한 부처님이 계시며, 한량있는 겁(有量劫)과 한량없는 겁(無量劫)이 평등하고 한량없는 겁이 한량있는 겁과 평등하며, 다함있는 겁과 다함없는 겁이 평등하고 다함없는 겁과 다함있는 겁이 평등하며, 말할 수 없는 겁[不可說劫]이 일념[一念]과 평등하고 일념[一念]이 말할 수 없는 겁[不可說劫]과 평등하며, 일체겁(一切劫)이 겁 아님[非劫]에 들어가고 겁 아님이 일체 겁에 들어가며, 일념[一念]가운데 전제(前際)·후제(後際)·현재(現在) 일체 세계의 성·괴겁을 알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겁임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짧은 겁·한 겁·순간(一念) 등이 긴겁·무수겁·불가설겁 등과 평등하다는 이러한 염겁무애가 상즉은 물론 상입으로도 말씀되고 있다.
또한 ‘일체 모든 부처님이 일념 중에 삼세(三世)의 일체 법계를 잘 분별해 아시고, 삼세 일체 중생의 갖가지 업보를 잘 분별하시며’(‘不思議品’), ‘일념 중에 삼세일체 아승기겁을 잘 아시며’(‘離世間品’), ‘삼세로 일념을 삼고 일념으로 삼세를 삼는다’(‘入法界品’)는 등의 법문에서도 일념이 삼세 일체시(一切時)의 무량겁임을 알 수 있다.
‘입법계품’에서 선지식들이 구법자 선재동자에게 해탈문을 얻게 해주는 방편도 순간이 곧 무량겁인 도리를 보여준다. 비목구사(毘目瞿沙) 선지식이 잠시 선재동자의 손을 잡을 때[執手] 곧 다겁(多劫)을 지나는 것도 그 한 예이다.
미륵보살 선지식은 ‘삼세의 일체경계에 들어가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 지혜로 장엄하는 무진장 해탈문(入三世一切境界不忘念智莊嚴藏 解脫門)을 펼친다. 미륵보살의 탄지로 열린 장엄장 대누각에 들어간 선재는 순간, 대누각의 모든 경계를 보게 된다. 그 순간은 바로 선재동자가 일생동안 닦은 모든 공덕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때이다. 일념에 삼세가 평등하여 일여(一如)한 염겁원융의 일체 경계에 다 들어가는 불망념지 해탈문을 증득한 것이다.
이러한 ‘일념즉시무량겁’에 대하여 설잠 스님은 “바로 지금의 일념이 십세(十世)에 걸쳐 사무치고 횡(橫)으로 시방에 두루하니, 일체 모든 부처님을 건립하여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 중생을 펼쳐서 동시에 멸도(滅度) 한다. 옛날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며 새로움도 아니고 오래됨도 아니다”라고 주석한다. 바로 지금의 순간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하다는 것이다.
일체 모든 시간을 일컬을 때 삼세라고도 하고 십세라고도 한다. 모든 시간을 일단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삼세라 하고, 이를 더 구체적으로 원만수인 열로 나누어 십세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순간인 일념이 바로 모든 시간인 삼세·십세와 평등하고, 삼세·십세가 일념을 여의지 않는다.
유문 스님은 ‘법성게과주’에서 화엄법계를 시무애(時無礙)의 시간으로 가름하면서 ‘십세의 예와 지금, 시작과 마지막이 현재의 한 순간을 여의지 않는다(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라는 ‘통현론(通玄論)’을 인용하고 있다.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개설하게 된 자장(慈藏) 율사가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삼국유사’) 라고 한 출가의 원에서도, 하루와 백년이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일념즉시무량겁’의 도리를 알면 순간을 살아도, 무량겁을 살아도 그 시간은 동등한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원력이 깊고 깊어서 대원본존인 지장보살에게 공양올리고 기도할 때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라고 찬탄한다. 지장대성의 위신력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 동안 말해도 다할 수 없으니, 그러한 지장보살을 견문하고 우러러 예경하는 한 순간에 인천을 이익케 함이 한량없다는 것이다. 일념이 한량없는 원력의 공덕을 다 담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이 ‘일념즉시무량겁’도 ‘무량원겁즉일념’의 경우처럼 꿈 비유로 말할 수 있다. 잠깐 동안 꾸는 꿈 가운데 한량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삼세가 다 공적해서 환화(幻化)와 같기 때문이다.
의상 스님은 ‘일념즉시무량겁’의 매순간, 인연 따라 공덕을 쌓아서 원융한 법성의 집[法性家]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러면서 ‘법성게’ 30구를 30역에 비유하여 꿈에 30역을 돌아다녔는데 깨어보니 누워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더라고 한다.
이 꿈 비유는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의 도리를 천명한 것이니, 가도 가도 본래자리이고 도달하고 도달해도 출발한 자리이다. 이를 연기법의 시간으로 말하면 꿈꾸는 그 순간이 바로 돌고 도는 긴 세월이다. 한 생각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의 본래자리인 법성가로 되돌아가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해주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