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입니다. 제목(‘2050 거주불능 지구’)을 보고 생겼던 편견이 사라졌습니다. 책의 원제는 그냥 ‘거주불능 지구’(the uninhabitable earth)입니다. 번역서에는 ‘2050’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이 수식어가 호들갑 내지 협박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다소 불편하고 뒤틀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종착점으로 인식되었던 ‘2050’이라는 숫자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러 가정(假定)의 결과 중 하나로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구체적인 지구의 멸망 시점을 제시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진 종말론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목이 마치 2050년에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종말론 전도서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밋밋한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 출판사의 마케팅적 습성 탓으로 보여집니다.
아무튼 이 책의 핵심 요지는 “위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방어기제”로 생각됩니다. 오늘날 기후위기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적이거나 사회적인 방어기제들을 몇 가지만 추려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인지 편향입니다. 인지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세상의 정보를 해석하고 처리할 때 체계적이고 일관된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체계적이고 인간적인 편견을 인지 편향이라고 합니다. 인지 편향의 한 예로는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가 있습니다. 대표성이 떨어지는 사례 한 두 개만 보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심리적 경향을 의미합니다. 이를 지구 온난화에 적용하면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 가지고 기후가 온화하다고 안심하면서 탄소 배출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앵커링 효과는 인지 편향의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책에 설명된) 모호성 효과, 인간중심적 사고, 자동화 편향, 방관자 효과, 확증 편향, 디폴트 효과, 현상 유지 편향, 소유 효과, 통제의 환상, 과잉 확신, 긍정 편향, 부정 편향 등 인간의 수많은 인지 편향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고 대응 능력을 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자기기만’이라는 렌즈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인지 편향 이론의 결론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책에 구체적인 사례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행동경제학 분야 역시 인간 이성의 부정적인 면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맹목적일 만큼 자기중심적이고 자멸적이며 또 어떤 일을 처리하는 면에선 짜증날 정도로 무기력한, 어설프게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것이 행동 경제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인간의 이성은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데에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지 못하니까 인간의 이성을 믿고 낙관론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경각주의(alarmism)의 딜레마입니다. 기후변화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내용이 암울해질수록 전문가들의 조심성은 더 커집니다. 우울한 미래를 예측하는 논문이나 서적이 나올 때마다 전문가들은 ‘체념적인’ 글이라 비판을 받거나 ‘기후 포르노’라는 조롱을 받습니다. “전문가들이 심각한 종류의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유난을 떨까 봐 걱정하느라 조심하는 태도가 습관적으로 반복되었고, 어느 순간 그런 소심한 태도는 직업적인 원칙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대중에게서 숨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후변화에 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가 너무나 많은 사람을 낙담에 빠뜨려 위기에 맞설 원동력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 점도 과학이 침묵을 지키게 된 이유입니다.
셋째, 문화계의 속성입니다. 대중문화는 기후재난에 관한 가상의 이야기(혹은 시적 정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낌으로써 스스로에게 인류가 재난에서 살아남으리라는 집단적인 확신을 불어넣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드라마는 카타르시스를 부각시키기 위해 영웅과 악당의 존재를 요구합니다. 어떤 독자나 관객도 기후변화의 우울한 최후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결과는 우울합니다. 게다가 기후변화의 가해자는 악당이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기업과 부자들의 책임이 크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전세계 탄소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비중도 15%입니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관한 스토리는 관객에게 아부하면 아부할수록 현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게 될 뿐이고, 적나라하면 적나라할수록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실패작이 되기 쉽습니다.
이 밖에도 방어기제는 많습니다. 탄소세를 부과하려 하자 강하게 저항한 진보 성향이 강한 워싱턴 주의 시민들이나 휘발유에 세금을 붙이려 하자 68혁명 이후 최악의 시위가 발발한 프랑스의 경우처럼 평소에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막상 손해가 발생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의 집단 이기주의도 인간의 방어기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후변화의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역시 인간의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간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초래해 왔지만 ‘경제성장의 약속’을 공통 이념으로 하여 불평등을 정당화 해 왔습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는 불평등이 심화될 뿐 아니라 경제도 침체할 가능성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가뭄, 기근, 전쟁, 국제 난민, 정치적 혼란 등 자본주의가 정당화해야 할 문제는 훨씬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필요한데,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화석연료 없이 돌아가는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완벽히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해야 하며 농업 체계를 새롭게 구상하고 심지어 육식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탄소 포집과 같은 기술 혁신은 기후 온난화에 비해 속도가 훨씬 더디기 때문에 심리적인 도피처가 될 수는 있을 지 몰라도 궁극적인 구원의 방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기농이나 무탄소 제품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것 역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신자유주의 판타지에 불과하며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기후 재난의 심각한 현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기후 변화의 미래, 또는 온난화로 인한 지구 파괴의 12가지 메커니즘(폭염, 굶주림, 해수면 상승, 산불, 빈번한 재난, 갈증과 가뭄, 사체가 쌓이는 바다, 마실 수 없는 공기, 질병의 전파, 경제의 붕괴, 기후 분쟁, 시스템의 붕괴)을 다루었습니다. 1부와 2부가 기후변화의 실체를 다룬다면, 3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후 위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방어기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3부에서는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 될 수 있었던 자본주의가 기후변화의 시대에는 더 이상 명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리고 기후변화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과 기술 맹신주의의 한계, 선택적 소비의 기만성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언급했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것처럼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이 신화이고 허구일 수 있다는 점도 3부에서 소개된 재미있는 얘기의 일부입니다. 1부와 2부가 자연과학적인 부분이라면, 3부는 상당히 인문학적인 부분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분이라면 1, 2부를 건너뛰고 3부만이라도 꼭 읽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제 4부의 결론 부분. 저자는 지구 온난화는 재미로 만들어진 얘기가 아니라 여러 가설을 하나하나 배제해 가면서 얻은 결론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앞으로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까’는 과학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인간 활동에 달린 문제이며, 기후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통제 밖의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행성은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검증은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우주에서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즉 인류 원리, 또는 자아도취적인 세계관)을 스스로 믿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 방지에 효과적인 정치 시스템(ex. 기후 리바이어던)을 만들고 마치 한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똘똘 뭉쳐 실천해 나가자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은 인간이 자유를 포함한 많은 권리를 앞으로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후 온난화가 심각하다는 것과 지구온난화 해결의 유일한 열쇠는 기술이 아닌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추신) 임책방 6월 모임은 27일 토요일 오후 4시에 그랜드 백화점 광장 지하에 있는 주엽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 주십시오.
첫댓글 책 사봐야겠어요~^^
인지편향, 편견과 선입견으로 잘못 판단하는 인간
제가 읽은 팩트풀니스에도 10가지로 잘 나오고 있어서 공감하게 되요
간극본능,부정본능, 직선본능, 일반화본능, 공포본능 등등~~~
환경문제, 알면알수록 심각함을 느낄테고
저자의 호소가 공감이 됩니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