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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글파마 40분간의 놀라운 유체이탈 - 이빈섬.
소리마디가 가득한 길터에서
겨우 하나 받았다
5,4,3,2,
1,
0.5
하얗게 덮어쓰고 앉은 침묵
아름다운 꿈길에 앉아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뽀글 파마 정거장에서 헤맸다
저마다 별로 가려고 몸을 싣고
지그시 눈 감고 별맞이 기차를 탄다
스치는 이 하루만을 본다
꽃을 여는 길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 버렸다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
하늘과 땅 사이, 꽃 덤불 핀다
/'꽃의 실험' 김정화
스냅처럼 순간순간을 담아놓은, '뽀글 파마' 사건 전말기. 외부에서 읽을 수 있는 풍경은 단조로울 수 밖에 없다. 한 여자가 북적이는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하기 위해 한참 기다렸다가 어렵사리 자리에 앉아 반수반성(半睡半醒) 상태로 있는 것은 차라리 정물화에 가깝다.
시는 이 정물화를 인상적이고 생기있는 동영상으로 그려놓았다. 자신의 머리를 '뽀글 파마'라 한 것은, 연륜(年輪)의 자의식이다. 생의 패배 감정은 아니다. '그 나이'에 대한 기탄없는 긍정에 가깝다. 풍성하지 않은 머리칼을 돋우려 자글자글하나마 모주(毛柱)들이 뒤엉켜 버텨주는 한 바탕의 숲이, 바로 '뽀글'에 담겨있는 오래된 전략이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머리칼은 식물성이다. 이 생각을 해보셨는가. 동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손톱이나 머리카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생태나 성장방식이 식물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 꼭지 위에 식물이 산다. 이렇게 보면 거의 틀림없다.
여자를 꽃이라고 말하는 상투적인 비유가 있다. 멋진 말 같지만, 식물이라는 뜻이다. 식물은 스스로 움직여 무슨 활약을 펼치기에는 아주 불리한 생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만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하면서 여성을 정물화하고 수동적인 상태로 가두려는 남성적 관점이 거기에 숨어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김정화 시인은, 스스로 여자라서 자신을 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개화의 기적'을 보면서 꽃인간이 된 감회를 느낀다. 은유는 쉬워보이지만, 쉬운 얘기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실제로 꽃이 되는 일은 인류역사상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식물성인 머리카락이 꽃이 되는 일은 몹시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이쯤에서 느끼는 재치와 매력이다.
미장원에서 머리꽃을 피우는 일은 꽤 음악적이다. 단조로운 소리들이 각각의 의자에서 뒤섞여 발생하면서 전주곡의 향연이 시작된다. 잠깐의 정리 과정을 거친 뒤에, 꽃의 꽃과 잎과 늘어진 가지의 곡선들을 디자인하는 조물주 솜씨가 펼쳐진다. 식물들은 약간의 아픔을 참아가며 자신이 어떻게 태어날지도 자세히 알 수 없는 채 기다리며, 그 아래에 있는 동물 또한 눈을 지긋이 감거나 가끔 숨을 쉬어보며 숫자를 센다. 이후 마법같은 하얀 모자수건이 씌워진다. 신의 솜씨는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펼쳐지는 건, 시간의 솜씨다.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무엇이 닥쳐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간이 하는 일들이다. 앞의 조물주는 꽃을 기획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시간이 한다. 시간이 꽃을 굽는다는 것. 대자연의 숲과 들판의 꽃들을 누가 굽는가. 하느님이 내려와 일일이 꽃을 구우러 다니지 않는다. 시간이 저마다에게 공평하게 흘러 그것을 굽는다.
꽃이 구워지는 동안, 그 아래에 있는 동물성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동물성을 위해 비치하고 있는 수족과 얼굴이 거의 쓸모가 없는 때다. 식물을 받쳐주는 받침대 역할 이외에는 말이다. 눈도 쓸모가 없으니 감고, 다만 감각과 마음과 생각을 활용해 상상여행을 떠날 수는 있다. 들꽃들의 아래쪽에도 이런 동물성 기관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평생 정태(靜態)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상상을 펼칠까. 그 상상의 백만분의 1쯤을 뽀글꽃 생물체가 지금 꿈꾸어보고 있는 중이다.
하얀 커버모자를 쓰는 순간부터, 부자유스러움이 확정됐다. 여기가 어쩌면, 정지된 생물체가 상상의 여행을 떠나는 출발역이기도 하리라. 많은 꽃들은 별을 닮았다. 해를 닮기도 하지만 달을 닮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하늘에 떠있는 것들을 닮았다.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들판과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닮은 것이, 조물주가 대충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주도자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심하게 기획되고 정교하게 디자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눈감은 꽃들은 무슨 꿈을 꾸며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저의 거울같은 별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이 생각을 해야, 머리 위에 피어나는 꽃과 상상 속에 떠나는 별의 상응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시인이 별여행을 어떻게 다녀왔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미장원에 가서 앉은 채 졸아보면, 별 볼 일이 있어진다. 꽃을 피우는 일과 별을 보는 일이 동렬(同列)에 있다는 것만 안다면, 면벽한 채 선정에 들어 화두를 붙잡는 어느 선승과도 별로 다를 게 없는 자세이다. 스치는 이 하루가 꽃에는 전생애이기도 하다. 내 머리 위의 꽃에게도 이렇게 만개한 것은, 딱 지금이 처음이다. 전에 했던 것이 있다곤 하지만, 그건 다른 머리칼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김정화 시인은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버렸다'고 말한다. 이곳이 그리우려면 멀리 가버려야 하고, 멀리 와버리려면 그곳이 그리워야 한다. 그런데 이 뒤틀린 문장은, 이곳과 와버린 곳을 착종(錯綜)으로 표현하면서 별하늘과 지구의 어느 미용실을 오간 순간이동의 혼란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너무 급히 하계로 내려오느라, 좀 놀란 듯한 말투랄까.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이 피어있다. 머리 위 정수리가 꽃밭이 되어 봄날을 하늘거린다. 한 시간도 안되는 딱 40분만에 만들어진, 기적의 회춘(回春). 정수리 아래는 입추(立秋)쯤 지난 거 같은데, 이거 위장정원 아니냐고 말하지는 말라. 저 꽃들의 간절한 뽀글거림을 보라. 생명계에선 시간을 어기는 방법은 없지만, 시간을 잘 버티는 방법은 있다는 걸 저 꽃들이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거기에 나는 누구인가. 방금 40억년 동안 별에 가서 백만송이 장미의 엑기스를 담아온 여행자가 아닌가. 하늘엔 별을 심고 땅엔 꽃을 심는 그 40분 조물주의 꿈을, 그대도 방금 따라와서 엿보지 않았던가. 내 머리를 실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 속에 늘 피는 꽃을 '인공개화'하는 비기를 보여준 것이다. /빈섬.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늘 건안하세요.
수고 많습니다.
재미난 시라서 옮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