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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아들이 처음 글을 깨우치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린 아들이 한글을 막 깨우치기 시작하면서, 함께 길을 걷다가 주변의 간판을 읽고 맞게 발음했는지를 물어보곤 했었다. 이전까지는 의미도 모르고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던 글자를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뿌듯했으리라. 젊은 시절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문맹(文盲) 상태로 살다가, 뒤늦게 글자를 깨우치고 글을 쓰게 되었다는 97세의 할머니인 저자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수록된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1988년인 것으로 보아, 저자가 67세 무렵의 글부터 갈무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일기 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쯤일 것이라 짐작된다.
적어도 30여 년에 걸친 저자의 삶이 이 한 권의 책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그동안 남겼던 수많은 글들 중에 가려 뽑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에 맞추어 엮은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내용은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반가운 가족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맞이하는 저자의 모습은 너무도 따뜻하다. 또 아마도 마을일을 하면서 온갖 참견을 하며 다니는 ‘세빠또’라는 별명을 지닌 이에게는 싫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 남은 동생이 치매에 걸려 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서글픔이 표출되어 있는가 하면, 집 가까이 살면서 자주 찾아오는 손자 내외들에 대한 고마움도 글 속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 해당하는 ‘책을 내면서’에서 ‘어려서는 그렇게 글씨가 쓰고 싶은 것을 아버지가 못 배우게 해서 그것이 원이’ 되었고, 그래서 부엌에서 불을 땔 때에 부지깽이로 한글 자모를 쓰면서 글자를 배웠다고 한다. 비록 익숙하지는 않지만 군대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남편이 저 세상 가고 나 혼자 살다 보니 적적해서 …… 공책을 사서 쓰기 시작한 것이 손주가 그것을 일기라고 소문을 내서’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수록된 글들의 시간적 상거가 적지 않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이 겪었던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런 시절을 보고 겪었던 세대이기에, 책을 읽으면서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책으로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손자들의 따뜻한 마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엮은 손자의 바램처럼 저자인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해서 할머니가 연습하는 글자들을 오래오래 읽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할머니의 글들을 더 모아 또 한 권의 저서로 출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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