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섬진강 그리워 유배지를 하동으로 택했다. 데미샘에서 하동포 구까지 물길 오 백 오 십리,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낙엽 지던 그 길 을 헤집고 다니며 쓸쓸한 것들과 버려진 것들 그리고, 환하게 핀 꽃 들과 푸른 잎새들 눈에 안겨 살았다. 그렇게 한 삼 년 아름다운 유배 생활에 행복하던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섬진강에 매어두고 서울 길로 떠나야했다.
팔순 노모, 고등학생 딸, 중학생 딸 세 쌍둥이, 초등학생 막내아들 그 리고 아내. 여덟 식구와 옹기종기 살면서 앞 강물과 뒷 강물이 밀어 주고 당겨주듯 서로 의지가지하며 살던 그 섬진강…. 그 섬진강을 떠 나온 시인의 여덟 식구는 서울의 희망을 위하여 생활전선과 학업에 뛰어들었다. 특별시민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지 않으 면 안된다.
시인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잠자리를 만났다. 옥수수 밭으로 자신을 끌고 다니던 유년의 그 잠자리를 또 어떤 날은 하동 쌍계사 벚꽃과 지리산 산동 산수유 나무를 또 어떤 날에는 도수네 진메마을 징검다 리와 섬진마을 매화를 만났다. 그리운 사람을 왜 서울에서 만나면 그 립지 않은 걸까, 왜 서울은 눈물도 아픔도 무감각하게 만드는 걸까. 천상, 특별시민이 될 수 없는 섬진강 시인은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꽃이 지네
꽃 피면 달려가마
약속한 사람
여태 소식조차 없는데
섬진마을 매화 지고
쌍계사 십리 길 벚꽃 지고
악양강변 배꽃 지고
산에도 강에도 온통
하얗게, 새하얗게
꽃이 지네
하지만 그대가
꽃이 다 져버렸는가
물어오신다면
아니, 아니요
아직 한창이라고
답하렵니다
이 가슴에 피어난
꽃은 아직 지지 않았으니
아니, 아니요
아직 피지도 않았다고
답하렵니다
아직 피워내야 할 生의
수많은 꽃이 남아있으니
(김인호 시인의 시집 '섬진강 편지'에서 '꽃 지는 마을에서' 전문)
▲ '추억의 징검다리' 섬진강 진메마을 징검다리를 시인은 자주 찾았다.
ⓒ2002 김도수
시인 가운데 두 부류가 있다. 그 하나는 '시보다 사람이 좋은 시인' 또 하나는 '사람보다 시가 좋은 시인', 김인호 시인은 전자에 속한 다. 그가 부쳐준 '섬진강 편지('삶이 보이는 창' 펴냄)'를 읽으면서 그 의 선한 눈매와 바람머리를 기억해본다.
그는 섬진강을 떠나야하는 문제로 한 동안 몸살을 앓았다. 갈피 못 잡던 시인은 생맥주를 앞에 놓고 어쩌면 좋겠냐고 물어왔고 나는 가 족의 뜻에 따를 것을 권고했다. 그렇게 그의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했다. 지하철을 세번 갈아타며 출퇴근하는 시인은 가장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피곤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리고 섬진강 노을 빛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간간히 꺼내 본다.
낯선 발걸음 거두어 주던 사람들
마주칠 때면 눈빛 반짝여 두던 강물
흐르는 땀방울 적셔주던 바람
철철이 피어 마을 뉘여 주던 꽃 무리
낯선 도시 떠돌다 낀 때 씻어내 준
순천, 하동, 구례, 광양사람들
데미샘에서 갈사포구까지 오백 리 물길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사철바람
산수국, 꽃무릇, 금낭화, 물봉선 꽃 무리와
더불어 석삼년, 천백 날 있어
나 이제 어느 거리 떠돌더라도
마음에 난 물길 여울목
징검다리 건너 앞산에 올라
횐물봉선 만날 수 있겠네
저물면서도
저물면서도
아,
환히 빛나는
그 강 노을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네.
(김인호 시인의 시집 '섬진강 편지'중 '섬진강을 떠나며' 전문)
▲ '섬진강 오백 오십리'흘러가지 않는 강은 강이 아니다.
ⓒ2002 김도수
'섬진강편지' 칼럼(http://column.daum.net/sumjingang/)주인인 시인 날마다 '그대에게 띄우는 아침편지'를 띄운다. 한 편의 시와 마음의 해설을 덧붙여 섬진강 식구들에게 부친다. 그가 도시에서도 병들지 않고 사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훌쩍 남도 길로 떠 난다. 어제도 보성 녹차밭으로 여름 마실을 다녀갔다고 했다. 그렇 게 꽃과 강 그리고 산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마음을 다듬고 산다.
섬진강은 그냥저냥 흘러온 것이 아니다. 오백 오십리 여정을 다하기 까지 굽이치고 부딪치고 갈라지기도 했다. 우리들 삶 역시 굽이쳐 부 딪치고 깨지기 일수다. 여덟 식구의 가장 노릇을 하다보면 마음 무거 워 지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랴. 물러서야 할 때는 물러서는 것도 용 기이고, 살아남아야 할 때는 살아남아 산 자의 몫을 다하는 게 도리 다. 그것은 댐을 쌓아 강물을 가두려는 음모가 있을지라도 틈새를 비 집고 그 음모의 견고한 벽에 균열가게 하는 강물에게서 배워야한다. 물도 시인도 흘러가는 아름다운 싸움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