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영식딩
손진은
늦점심 후 마루끝, 구두끈 매다 문득 차양을 뛰어다니는 빗소릴 듯네 석류꽃 환한 그늘이 반쯤 가린 그 집 간판 ‘-’가 떨어져나간 ‘숙영식딩’에 어룽어룽 빗방울들, 매달리네 천마총 돌담길 오십년도 넘게 그곳 지킨 밥집 우물가 숙영이라는 이름 다홍치마 할머닌 여즉 그 흰손으로 푸성귀 씻고 있고 안쪽 방 벽에는 안강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의, 광대뼈가 나온 홀쭉한 사내 무겁게 훈장 매단 채 이 쪽을 인자한 웃음으로 건너다보네 숙영식당, 푸른 아크릴 간판이 희멀건 하늘색으로 바래는 동안 비바람 햇살 벌떼처럼 잉잉대며 갉아대도 그리움은 딩, 딩, 덩더웅 딩, 아직 가야금 청줄로 울리고 있다는 거네 석류, 가늘게 떨리는 잎새에 얹어논 가슴처럼 그야말로 숙영式 ‘딩’이네 아까보다 작은 몸집의 저 새는 스렁스렁 신발끄는 소리로 크는 석류꽃 봉오리에게 장가라도 들려는지 가지 새 그늘에 쉴새없이 들락거리고 나는 반백년을 은핫물처럼 흐르며 하늘에 우물에 되쏘아 보냈을 그 ‘영원’을 떠올려보는 건데 유복자일까, 중년의 계산대 아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는 넉살좋은 웃음만 덤으로 끼얹어 준다네
-《서정시학》, 2006년 여름호
모든 생명뿐만 아니라 낱말들도 세월이 흐르면 늙기 마련이다. 즉 세월이 흐르면 설령 어미 하나가 없어지더라도 고유의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그 세월동안 지어왔던 ‘언어의 집들’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이후 산업화를 상징하는 간판과 광고들도 세월이 지나면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소읍이나 농촌의 공동화현상이 나타나, 그곳들을 지나다보면 색이 바래고 글자가 떨어져나간 간판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숙영식딩’ 간판도 천마총 돌담길 옆에서 ‘푸른 아크릴 간판이 희멀건 하늘로 바래기도 하고, “-”이 떨어져 나가 볼품없고 광고의 효과도 거의 없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숙영식딩’은 ‘반백년을 은핫물처럼’ 흐르며, 그 ‘언어의 집’을 이루어 그 안에서는 그리움이 ‘딩, 딩, 덩더웅 딩,’ 소리를 내며 ‘가야금 청줄로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리움은 숙영 할머니와 시인이 남편을, 지나온 세월을 향한 것이다. 또 반백년을 떠도는 새 한 마리 ‘영원의 전도사’가 되어 석류꽃 봉오리에 가지 새 그늘에 쉴 사이 없이 들락거리다. 그리고 시인이 ‘숙영식딩’에서 식사 후 계산을 하면서 숙영 할머니의 아들에게 뭔가를 물어보지만 그 역시 ‘언어의 집’에서 전해내려 오는 ‘넉살좋은 웃음만’ 보이는 것이다. 요즘 발표되는 시들 중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화, 자본화가 극대화 되면서 시인들조차 감성이 희박해져 ‘가슴’으로 만든 것이 아닌 ‘머리’로만 지어진 시가 많다고 많은 평자들은 밝히고 있다. 필자는 구체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아 전적으로 그런 일부 평자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반백년’뿐만 아니라 우주가 생성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그리움’을 ‘영원’이란 이름 가슴 노래하여야 한다라는 믿고 있는 필자도 ‘숙영식딩’처럼 하얗게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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