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그리고 현미경 표본
방승아
가마에서 나온 독이 성에 차지 않으면 미련 없이 깨뜨리는 뚝심 있는 사람.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의 주인공 송 영감은 잠들기 직전까지 불가마를 지키는 옹기장이다. 나는 이 작품을 모의고사 지문으로 만났는데, 스쳐 지나가듯 읽은 글이지만 쨍그랑도, 깨장창도 아니고 ‘뚜왕!’이라고 표현된 독 깨지는 소리는 문제 풀이에 여념이 없던 와중에도 내 기억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루건너 하루 해부학과 조직학 수업이 반복되던 어느 봄날 나에게도 송 영감의 소설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와 차이점이 있다면, 독 대신 현미경 표본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조직학 수업을 5분 앞두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들고 있던 표본 박스를 통째로 떨어뜨렸다.
공중으로 날아간 박스는 계단 바닥에 부딪힌 후에도 몇 번을 더 굴러간 뒤에야 그 꿈틀거림을 멈췄다. 박스 안의 쩔그럭거림을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송 영감의 독처럼 ‘뚜왕!’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은 죽기 전에 자기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그때의 나도 그랬다. 계단 조금 아래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동기라든지, 실습실을 1m도 안 남겨 놓고 그대로 굳어버린 다리라든지, 조심스럽게 박스를 들었을 때 표본들이 마주치며 만들어낸 진동에 말 그대로 ‘망했음’을 느끼던 그때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한데, 그날 조직학 수업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깨진 표본들을 겨우 수습한 나는 교수님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앉아 있었다. 교수님은 수업이 끝난 후에 나를 조용히 불러 말씀하셨다. ‘깨진 표본은 총 25개. 성적에 영향은 주지 않겠으니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수업 첫날 공지한 대로 여름방학 때 망가뜨린 표본을 만들어 실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수님은 내가 마치 인생이 끝난 사람처럼 풀 죽어 있어 혼내지 못하셨다고 한다. 사실 그날만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그런 상태였다. 깨뜨린 표본 ‘25개’라는 숫자는 문득문득 머릿속을 맴돌았다. ‘100개 중 25개. 분수로 약분하면 4분의 1. 백분위로는 25%.’ 하는 숫자놀음으로 애써 사건을 객관화해 보려던 내가 현실로 돌아온 것은, 여름방학을 며칠 남기고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죄수처럼 조직학 교실 인턴십 신청서에 직접 서명해야 했을 때였다.
죄수의 첫 출근 날, 학기 내내 카데바와 고군분투하던 해부학 실습실을 지나 ‘조직학 연구실’이라는 다소 낯선 공간으로 갔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예고되었던 대로 흘러갔다. 연구실에서의 하루가 모여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나는 여름방학 내내 눈코 뜰 새도 없이 조직 표본을 만들었다.
인턴십 주 업무는 깨진 조직학 표본을 다시 만들고, 매주 제작 상황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표본을 깨뜨리는 데에는 1초도 안 걸렸지만, 하나를 다시 만드는 데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창고에 남아있던 조직 종류를 엑셀로 정리하고, 파라핀 블록을 섹션 기계로 얇게 잘라 염색액으로 물들인 후, 현미경으로 표본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내가 저지른 25개의 죄 중 하나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연구 사업에도 참여했는데, 조수로서 교수님이 실제로 작업 중이신 논문 연구의 전반적인 과정을 함께했다. 교수님은 죄지은 나를 탓하는 일 하나 없이 언제나 친절하고 학구적으로 대해주셨다. 그런 교수님의 마음에 답하기 위해 나 역시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열심히 실험에 임했다.
고백하자면 초반에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도 빼앗긴 여름에 대한 슬픔이 더 컸던 것 같다. 해부학기에 고생한 만큼 이번 방학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푸른 바다 대신 어두운 연구실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건 우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연구실 생활은 내게 여름 바다보다 값진 학교 뒤편의 숨겨진 세상을 알려주었다. 저빌이 얼마나 귀여운지, 현미경 표본 한 장을 글라스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 교수님이 왜 표본을 피보다 소중히 여기셨고, 내가 얼마나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도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됐다.
‘송 영감은 깨지는 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시험 질문에 답해야 했던 그 시절에는 별생각 없이 슬픔, 자괴감, 괴로움을 떠올렸다. 계속된 실패에도 독 짓기에만 매달리는 노인이 딱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름방학을 지나온 지금, 내 대답은 달라졌다. 송 영감이 독을 깨는 것은 티끌만 한 흠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기이고, 완벽한 독을 만들고 말겠다는 다짐이며 그런 독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현미경 표본을 떨어뜨렸을 때 나도 나의 낡은 독 하나를 깨뜨렸다. 영감의 가마에서 울려 퍼졌을 ‘뚜왕’ 소리는 내겐 실습실 앞 ‘쨍그랑’ 소리였다. 표본을 깨뜨렸을 당시엔 민망함에 저지른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겉으론 반성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어떻게 하면 상황을 회피할 수 있을지 궁리할 뿐이었다. 그런 나를 비춘 25개의 유리 조각은 변명하던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해줬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책임을 지려면 주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게 됐다. 노력은 서서히 괴로움을 자신감으로 바꿔 줬다. 송 영감이 부서진 조각을 뒤로 한 채 다시 점토를 빚었듯이, 나는 연구실 모퉁이에서 정성스레 조직 표본을 잘라내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2년이 지나 나는 예과 시절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본과생이 됐다. 최근에는 표본 박스를 떨어뜨릴 만큼 큰 실수를 하진 않지만 워낙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나는 여전히 실수가 잦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사람의 생명은 조직 표본과 달리 다시 만들어낼 수 없단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깨진 독은 다시 빚을 수 있고, 고장 난 제품은 리콜이 가능하지만 한 번 잃은 생명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어쩌면 의사가 된 후에도 나는 현미경 표본 그 이상의 것을 깨뜨리게 될지 모른다. 가끔 그게 무섭고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겠다. 응당 책임질 일이 맡겨졌다면 망설임 없이 나아가야 함을 알게 됐으니까. 그 길에서 넘어지고 깨지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믿고 꿋꿋이 걸어가 그 끝에 서 있을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려 한다.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고치를 벗은 애벌레가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송 영감이 조각난 독을 보는 동시에 새 독을 떠올렸듯, 나를 감싸고 있던 껍데기를 깨뜨리며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첫댓글 독(한자표기)가 있었으면 싶네요.
등단을 축하합니다. ^^
'어쩌면 의사가 된 후에도 나는 현미경 표본 그 이상의 것을 깨뜨리게 될지 모른다.'
배움의 현장에서의 실수가 처음엔 징역형이 되었지만 그 일이 깨달음과 새로운 지향점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잘 그려져 저는 이 작품이 좋았어요.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에서
깨진 독은 완성을 향한 파열음이었던 것을 깨닫고 자신이 깨뜨린 현미경 표본을 다시 만드는
지난한 시간도 결국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독'은 한문이 없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제목을 다르게 했더라면 싶어요.
@이복희 그렇네요.
이복희 선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젊은 작가예요.
언어 유희도, 감각적인 묘사도 없는 진실한 문장이 마음에 꼭꼭 들어와 박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