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오면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낯선 풍경을 보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며, 일상에서 벗어난 감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을 기록한 글이 모두 여행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기행문과 여행수필의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에는 기행문을 수필이라는 장르에 종속된 양식으로 생각했다. 기행문은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풍경과 그때그때의 감흥이나 깨달음을 드러냄으로써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감상을 공유하는 문학적 글쓰기이다. 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는 상세한 일정에 따라 여행지의 이색적인 풍물에 대한 친절한 소개도 필수요건으로 삼았다. 기행문은 이러한 견문과 함께 감흥과 깨달음을 함께 표현하므로 여행보고서와 달리 문학성을 갖춘 글이었다. 물론 기행문에도 두 가지 양식이 있었다.
이색적인 풍물을 나열하면서 그때그때의 감흥을 늘어놓는 양식과 인상 깊었던 것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지각하고 얻은 깨달음을 드러내는 양식이 그것이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정비석의 「산정무한」이 전자의 방식이라면,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는 후자의 방식으로 쓴 글이다. 그래서, 여정에 따른 견문이나 감흥을 나열하는 분산 방식의 글쓰기와 여정에서 느낀 감동이나 깨달음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집약 방식의 글쓰기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구성과 주제 구현 방식이 다른 이 두 가지 형태의 여행문학을 굳이 구분하여 부른다면, 전자를 기행문 또는 여행기라 하고 후자를 기행수필 또는 여행수필이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행문은 연쇄적인 구성과 분산된 부분의 주제를, 여행수필은 유기적인 구성과 집약된 전체의 주제를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행문과 수필은 다른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여 여행수필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고 이 둘의 차이점을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행이 보편화되고 디지털 영상 촬영이 손쉬워지면서 여행지의 풍물을 재현해 내는 다큐멘터리식의 기행문은 의미가 없어진 탓이다. 여행안내서나 웹사이트 블로그에 올려놓은 영상물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여행지의 정보를 더 생생하게 보고 듣고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행문을 여행보고서 정도의 글로 격하시켜 기행문은 실용적인 글쓰기이고 여행수필은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여행 일정에 따라 보고 들은 사실이나 지식을 단순히 기록한 글이 여행보고서다.
이러한 개념 변화에 따르면, 기행문은 여행의 경로와 견문을 중심으로 쓴 글이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보았고, 어떤 풍경과 문화와 사람들을 만났는지를 기록한다. 기행문은 독자에게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인상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잘 쓴 기행문은 생생한 현장감과 지적 흥미를 준다. 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 자연, 생활 방식을 소개하는 것도 기행문의 중요한 영역이다.
반면 여행수필은 여행지 자체보다 여행에서 마주한 내면의 변화에 더 관심을 둔다. 여행수필도 장소와 풍경을 쓰지만, 그 목적은 안내나 보고에 있지 않다. 낯선 장소에서 글쓴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떠올리고, 어떤 삶의 질문을 마주했는지를 쓰는 데 중심이 있다. 기행문이 “그곳은 어떤 곳인가”에 가깝다면, 여행수필은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가깝다.
오래된 사찰을 다녀온 글을 쓴다고 하자. 사찰의 창건 연대, 건축 양식, 문화재의 가치, 주변 풍경과 교통편을 중심으로 쓰면 기행문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그 사찰의 툇마루에 앉아 오래 듣지 못했던 침묵을 들었거나, 낡은 기둥 앞에서 자신의 조급한 삶을 돌아보았거나, 불상 앞에 절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인간이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를 생각했다면 여행수필에 가까워진다. 같은 장소라도 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글의 성격은 달라진다.
기행문과 여행수필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기행문은 기행문대로 필요하고, 여행수필은 여행수필대로 가치가 있다. 다만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견문을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장소를 지나며 생긴 내면의 변화와 삶의 질문을 중심에 둘 것인가. 이 선택이 글의 방향을 정한다.
여행수필을 쓸 때는 여행의 모든 과정을 다 쓰려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언제 출발했고, 어디를 들렀고, 무엇을 먹었고, 어떤 숙소에 묵었는지를 빠짐없이 적으면 글은 일정표처럼 보일 수 있다. 수필에서는 여행 전체보다 한 장면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기차 창밖으로 스쳐 간 낯선 마을, 새벽 시장에서 마주친 한 사람, 길을 잃고 들어선 골목, 여행 마지막 날 혼자 앉아 있던 벤치 같은 장면 하나가 여행 전체의 의미를 품을 수 있다.
또한 여행수필은 낯선 곳을 지나 익숙한 삶으로 돌아오는 글이기도 하다. 여행은 떠남으로 시작하지만, 수필은 돌아봄으로 완성된다. 먼 곳에서 본 풍경이 결국 내 삶을 다시 보게 했다면, 그 여행은 글이 될 수 있다. 여행수필의 핵심은 많이 다닌 데 있지 않고, 여행을 통해 삶을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다.
장소와 여행은 수필에 넓은 공간을 열어 준다. 그러나 그 공간은 지도 위의 넓이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로 확장되어야 한다. 장소를 소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장소를 경험하며, 바깥 풍경과 내면 풍경을 만나게 하고, 공간에 쌓인 시간의 흔적을 읽으며, 여행을 통해 자기 삶의 시선을 바꿀 때 장소와 여행은 수필이 된다.
첫댓글 교수님께서 기행수필 읽으면서 해주신 말씀이네요~~
글을 읽으니 교수님 뵌 듯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