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6장 1-4절
얼마 전에 대진침대 사건으로 유명해졌던 라돈이라는 물질을 다루는 다큐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한 물질이더군요. 예전에는 음이온 물질이라고 해서 해외여행 다녀오시면 게르마늄으로 된 팔찌 목걸이 어르신들 건강에 좋다고 선물드리고 그랬죠. 거기에서 나오는 이 음이온이 라돈물질이더라구요. 음이온이 들어있다고 하는 모든 제품들 중국 여행 다녀오시면서 사오시는 건강에 좋다고 하는 라택스 제품-팔찌, 베개, 이불, 목걸이 - 들안에 들어있구요. 자연안에는 화강암에 많이 들어있고 그래서 아파트 건축자재나 화장실 같은데 대리석에서 라돈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라돈의 기준치가 보통 4피코큐리라고 하는데 이 기준치라는게 하루 담배 8개피를 피는 수치래요. 기준치라는게 사실은 위험수치인 거예요.
이 라돈 성분이 뭐냐면 우라늄과 토륨 즉 원자력 발전소의 원료로 쓰이는 1급 방사성 핵물질이랍니다. 호흡기를 통해 들어오면 그대로 내부피폭을 하는 효과가 있어서 해외에서는 20-30년 전부터 규제해왔고 미국의 경우는 집을 사고 팔 때 라돈수치를 공개하게끔 되어 있데요. 대진침대에서 나온 라돈의 수치가 96피코큐리인데 하루에 담배 200개피를 피는 효과래요. 매일 10갑을 피는 거죠. 쉬지 않고 계속 담배만 피고 있는 효과인 거예요. 엑스레이 1년에 5천번 찍는 것과 같데요. 한번 찍을 때도 간호사들 다 나가 있잖아요. 하루에 15번 엑스레이를 찍는 거죠. 그래서 침묵의 살인자라 불린답니다. 실제 조사를 해 봤는데 우리나라 지도에서 화강암이 많이 있는 지역지도와 폐암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지역분포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오더라구요. 강원도, 충청도 전라남도 서쪽으로 색깔이 짙어요.
홈쇼핑 광고에 나오는 음이온 속옷을 측정했는데 측정 기계가 나타낼 수 있는 수치 맥시멈까지 올라가더라구요. 이게 고체가 아니라 기체에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 나오는 거예요. 점점 올라가더니 수치가 더 이상 기계에 나타낼 수가 없는 거예요.
문제는 한때 우리는 이것을 원적외선 음이온-힐링에너지가 나온다고 해서 사람들 건강에 좋다고 지나치게 많이 선호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1급 방사능 물질을 몸에 좋은 힐링에너지라고 하면서 목에도 걸고 팔에도 걸고 잘때도 쬐고 찜질팩으로 2-3시간씩 쬐고 그래왔던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 실제는 우리를 죽이고 있었던 거죠.
이런 것만이 아니예요. 가습기 살균제도 그렇구요. 몸에 좋다고 필터를 열심히 갈아끼었는데 독약을 공기중에 계속 살포하다가 이제 필터가 다 되어 살만해지니까 새 독약을 가지고 와서 또 살포하고 살포하고 하나 거예요. 1950년대까지만 해도 담배가 몸에 좋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었데요. 그래서 “신혼여행에는 반드시 담배를 챙겨가세요” 그런 광고를 했데요. 실제로 선교사들 초기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이 어떤 집을 방문하고 나면 양반 집이나 이런데서는 귀한 손님오셨다고 담배를 드렸데요. 미세먼지도 마찬가지예요. 언론이 마치 당장 죽을 것처럼 미세먼지 사상 최악 하면서 연일 난리를 치는데 평균치로보면 2003년부터 미세먼지는 실제로 감소하고 있었다는 통계가 나왔더라구요.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염되어 있고 진실보다는 자본과 시장의 원리와 많이 결탁되어 있고 여전히 과학이 발달되어 있지만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모르는 미지의 영역들이 많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경우에 좋다고 하면 온 몸에 그걸 장식하고 밤낮으로 쬐고 앉으나 서나 온 천지에 그걸 깔아놓구요. 또 안좋다고하면 온 언론들이 들었다 놨다 하면서 또 미세먼지의 원인이 되는 걸 제도적으로 고칠 생각은 않고 마스크에 공기청정기에 뭔가 어떻게 하면 피해갈 수 있을까 온갖 방식을 다 동원해서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어떤 지식은 과학과 지식이 발달되면서 더 확장되는데 어떤 지식은 반전돼요. 이런 시대에 우리는 뭘 믿고 살아야 하나 싶습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라고 그것도 하루쓰면 버려야한데요. 이틀씩 쓰면 효과가 없데요. 장사꾼들의 냄새가 풀풀 납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마스크를 쓰면 오히려 호흡기에 나쁘데요. 그래서 또 장사꾼 언론에서는 공기청정기를 써야한다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또 공기청정기를 쓰더라도 환기를 정기적으로 시켜줘야한데요. 미세먼지 다 빼낸 다음에는 다시 들여와서 또 빼내고 그리고 다시 들여와서 또 빼내고 그래야 한데요.
기독교역사안에서도 마리아 복음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2000년 동안 4복음서가 정통이고 그것이 충분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리아 복음서가 나타나면서 어쩌면 4복음서는 초기 기독교의 기득권의 산물이고 실제 더 귀한 예수님이 가르침은 초기 권력자들에 의해 사장 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돼요. 마리아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남자 제자들은 말귀를 못알아들어서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오히려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복음을 전수합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우리 안에 있는 일곱귀신들(어둠, 욕망, 무지, 시기심, 집착, 중독된 지혜, 사악한 지혜)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온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로 찾을 것이니 그래서 열심히 하느님 앞에서 내가 원하는 걸 구하는 게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의 특별한 능력을 믿고 그래서 그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짠 나타나서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이런게 아니라 내안에 나를 어둡게 하고 갇히게 하고 억압하고 욕망에 포로가 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마음껏 사랑하고 삶을 향유하고 풍성한 생의 의미를 가꾸어 가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창조적 소수자들에 의해 여전히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살아남아있지만 마리아복음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가 남성중심의 종교로 권력화하면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더 복음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해서 다 없애버린 기독교 탐욕사의 흔적을 알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쯤되면 그래요. 우리가 알고 있는 앎이라는게 진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 지식과 정보와 앎의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사는게 지혜로운 것인가?
지식의 반감기라는 책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에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식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지식을 우리가 다 어떻게 알아요. 평생을 배우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변화하는 지식에 대한 유연성, 열려있는 태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열려있는 태도를 위해 중요한 게 다른 이야기를 자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게 뭔말인가? 자기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사람의 갇힌 판단을 열어줄 수 있거든요. 아이들의 다른 의견, 교우들의 다른 의견, 동료들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도전이라 생각하지 않는 유연함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극단을 피하는 방식도 도움이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앎이 최선이 아닐 수 있기에 올인하지 않는 거죠. 음이온이 몸에 좋다고 하니까 온몸에 그것을 도배하고 다니고 미세먼지가 몸에 해롭다고 하니까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죠. 그 스트레스가 더 몸을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몸에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도 과하면 독이 됩니다. 한약이 몸에 좋다고 하루 종일 몸에 들이부어보세요. 죽어요. 저희 딸 어렸을 때 감기에 걸렸어요. 감기 잘 낫는 병원이 있데요. 그래서 갔어요. 그랬더니 멍한 상태에서 하루 종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무슨 성분이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약을 너무 세게 지은 거예요. 어른들에게도 잘 들으니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독한 거죠. 다시는 그 병원안갑니다. 감기는 낫는데 몸이 다 망가져요. 심지어 정신까지도 망가져요. 너무 나쁜 것도 안 좋지만 너무 좋은 것도 안 좋아요.
타인도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쳐요. 적당히 사랑을 잘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는 것도 지혜예요. 지나친 무관심도 문제지만요. 지나친 관심도 문제예요. 미국에서 목회할 때 목회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털어 놓은 거예요. 지극한 치부까지도 나중에 정신차리고 나시니까 떠나시더라구요. 우리는 그러지 않지만 종교생활도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 너무 열심히 교회다니다가 가정을 못 돌보고 가족간에 관계도 깨지고 신앙생활도 다 잘 살려고 하는 건데 신앙생활 때문에 관계 다 단절되면 아니한만 못해요.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씩만 나오세요. 지나치게 적게 오는 것도 문제예요. 교회도 공동체인데 눈에서 멀어지면 자동 맘에서 멀어집니다. 언론에서 좋다고 나쁘다고 덩달아 춤추지 마세요. 모든 언론은 자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극단을 피하는 방식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신가요?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특별한 뭔가의 표적을 바랍니다. 그것에 의존하여 뭔가 인생의 특별한 해결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인생에 특별한 뭔가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특별한게 있다면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회개하고 길을 돌이킨 사람입니다. 회개 메타노이아 길을 바꾸는 겁니다. 어디로 바꾸나요?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길로 바꾸는 거죠. 몸에 좋다고 여기 저기 찾아다닐 일이 아닌 거죠. 소식하고 운동잘하고 스트레스 덜받고 받아도 어떤식으로든 해소하고! 사실 이것 이상의 보약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기본은 안지키고 엄한데 어디 용한데 없나 찾아다닙니다. 수도 배관이 터졌으면 가장 먼저 뭘해요? 터진 곳을 찾아서 수리해야지요. 매뉴얼 기본입니다. 그런 다음에 물을 닦든지 해야지요. 물에 안젖으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봐야 나중에 물이 차면 다 죽어요. 미세먼저가 그런거죠. 미세먼지가 사람의 건강을 헤칠정도 수위가 되면 어떤 방식으로도 소용없지요.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개인적으로 미세먼지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줄여가야지요.
예수님 삶에 있어서 특별한 거 바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본가들이 만들어내는 상품화된 지식에 춤추지 말고 있는 자리에서 기본에 충실한 몸을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귀하면 남도 귀하고 내새끼가 소중하면 남새끼도 소중하고 내가 사람이면 남도 사람이고 내가 하루 세끼 먹고 싶으면 남도 하루 세끼 먹고 싶고 그런 맘으로 타자를 헤아리고 매일매일의 몸과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매일매일 지불해야할 댓가들이 있고 자연에 대한 존중없이 인간의 삶이 건강해 질 수 없고 신뢰와 애정없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신뢰와 애정없이 변화할 수 없다는 평범한 일상의 진실들 안에 오히려 특별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앎과 지식과 정보가 혼탁한 시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길을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