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후 새로운 왕조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경복궁(景福宮)을 세웠고, 이곳은 오랫동안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했다. 조선이 안정되면서 법궁 이외에 이궁(離宮)으로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세워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중에 이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월산대군의 사저를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는 이름의 임시 궁궐로 사용하다가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정식 궁궐로 바꾸었고, 후에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또한 서대문 근처에 새로운 궁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고, 후에 이름을 경희궁(慶熙宮)으로 바꾸었다.
경희궁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으로 약 7만여 평에 서궐(西闕)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곳에는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머물렀는데 그중 영조가 가장 오래 19년 동안 머물렀고,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자재로 사용하면서 궁궐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은 건물들도 해체 또는 분리 이전되었고, 이곳에 일본 관료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궁궐이 아닌 ‘경희궁 터’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가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 현대그룹에 매각되었다. 다행히도 서울시가 다시 매입하면서 사기업체의 사옥이 되는 것은 면했지만 일부 구역에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경희궁 터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된 결과 숭정전 등 몇 개의 전각이 복원되기는 했다. 하지만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다른 자리에 세워졌고, 정전인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어 새로 만들었으며 황학정은 사직단 부근에 가 있다.
지금의 경희궁 안에는 금천교, 용비천 표지석, 돌계단 몇 점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고, 인근 신문로 일대에서 발견된 석조 연못과 괴석 등은 그곳이 원래 경희궁 궐안이었음을 증명한다. 지난날의 영화는 기억하겠지만 한껏 움츠린 채 겨우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경희궁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하다.
여담이지만 경희궁의 이름은 그곳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의 ‘경희신문’과 교지 ‘경희’, 그리고 서울고등학교 교사였던 조영식 총장이 세운 ‘경희대학교’에도 남아 있다. 사연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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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
경희 교지를 계속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 책장 정리 할때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