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을 더하는 글: 대림절과 성탄절 사이에 읽는 시 ◈
야훼님 전 상서
-고정희-
야훼님
한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추위와 각고를 끝낸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주 멀리 떠난 줄 알았던 그,
이제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섬광 같은 눈빛을 간직한 채 그의 기원을 묻어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영원히 닫힌 줄 알았던 우리들 기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영원히 끝날 줄 알았던 자유의 휘파람 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우리들 기다림이 불기둥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훼님
그가 돌아온 마을과 지붕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가 돌아온 교회당과 십자가는 더더욱 고독합니다
그가 돌아온 들판과 전답은 이 무지막지한 어둠과 음모 속에 누워 있습니다
우리가 저 대지의 주인일 수 있을 때까지
재림하지 마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신도보다 잘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
*고정희(1948-1992)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가 추천되어 등단,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시선집 [뱀사골에서 쓴 편지],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1991년 6월 9일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 등반 중 뱀사골에서 실족, 43세의 일기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