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라면
추대식
choopr412@naver.com
학교 급식이 대세인 지금, 도시락은 교실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하지만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엔 소중한 한끼였다. 낙동강 하류 한적한 농촌 학교. 당시 60여명의 급우들 중 몇몇 학생을 제외한 대부분 친구들과 나는, 도시락을 지참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우리들은 점심시간에 구휼 급식으로 강냉이 죽이 나오면 모두가 좋아했다.
그렇게 먹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혜성처럼 등장한 ‘라면’은 마치 별똥별이었다. 시골 점방店房에 진열된 라면을 난생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 때, 도대체 먹는 음식이라면서 면이 왜 꾸불꾸불하게 생겼을까? 과연 어떤 맛일까? 저절로 입안에 고이는 침처럼 호기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와 함께 죽마고우 영규와 수명은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장난기 또한 심했다. 방과 후 숙제를 마치면, 거의 함께 어울려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고 참새도 쫒았다. 그러다가 삼총사 중 누구 하나 반짝 생각이 나면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우리는 개구쟁이답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라면을 먹어보자는데 의기투합했다.
가위 바위 보로 역할을 나누기로 했다. 한 명은 라면 구하기, 한 명은 끓이기, 나머지 한 명은 끓일 양동이 준비였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 속에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각자 두 손을 비틀었다 등 뒤로 숨긴 후, 하나 둘 셋 동시에 가위 바위 보. 나는 주먹이었고 둘은 보였다. 아! 내가 꼴찌였고 당연히 라이언 일병을 구하듯 라면을 구해야 했다. 라면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당시에 라면 한 개 가격은 10원. 초등학생에겐 거금이었다. 있지도 않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당황한 내 모습에 영규는 얄미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 내밀었고, 수명은 만세를 불렀다. 순식간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집에서 동전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그 때는 용돈의 개념은 없었고, 꼭 필요할 때 아버지는 바지에서 동전을 꺼내 주셨다. 아버지의 바지는 항상 안방 벽에 걸려 있었다. 순간 두려움에 떨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았다. 더듬거리는 손가락에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속에는 몇 개의 동전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냈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몸이 떨렸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애써 괜찮겠지 스스로 위로해도 마음이 불안했다. 에라! 한 걸음으로 점방을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동전 한 닢을 내밀었다.
라면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난 나를 놀랍고 이상스럽게 쳐다보는 친구들. 내 손을 바라보며 불쑥 내미는 진짜 라면에 눈이 커졌다. 나는 언제 그랬냐 싶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양동이에 준비된 물은 대략 세 바가지. 라면 한 개로 세 명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물의 양을 넉넉하게 준비한 탓이다.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이, 물이 끓었고 영규가 면과 스프를 투하했다. 와락 김이 솟구치며 코앞으로 퍼지는 오묘한 내음. 향에 취해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수명은 혀를 빼고 입맛을 다시며 코를 찡긋했다. 우리는 젓가락을 저어 면발을 찾았고 국물 배를 채웠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저녁이었다. 아버지께서 라면 묶음을 사오셨다. 그건 큰 사건이었다. 한적한 농촌, 동네서도 먹어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낮선 음식, 그것으로 식구들과 함께 라면 파티를 하신단다. 음식 솜씨가 이웃까지 알려진 어머니가 부지런히 움직이셨고 모처럼의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그릇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꼬불꼬불한 면이 수북했다. 일곱 식구가 둥근 상에 둘러앉아, 앞에 놓인 각각의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오르내리는 젓가락에 후루룩 하는 소리. 큰 형은 처음 접하는 별미라고 좋아하며 동경의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세살 아래 동생은 아예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모두가 상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아 번갈아 보며 웃었다. 나는 특히 적당한 양의 국물 맛에 반했다. 지난 번 친구들과 몰래 끓였던 그 맛이 아니었다. 멀건 국물로 배를 채웠던 엉성한 느낌과는 달랐다. 뜻하지 않게 두 번째로 맛본 라면. 사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다. 유달리 맛나게 먹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 젓가락으로 면을 덜어서 얹어 주시던 모습. 그윽하게 바라보며 점방 얘기를 하셨다. 동네에서 라면을 살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점방 주인아저씨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당시 일부러 모르는 척하셨던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나중에 명확하게 알았을 때도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꾸중보다는 너른 품으로 나의 잘못을 품어 주시고 정직을 일깨워 주셨던 아버지. 그렇게 고백도 못한 채 세월이 흘렀고 십오 년 전 초입 가을. 구순 잔치를 의논 할 즈음 홀연히 떠나셨다.
생전 남해안 진동 앞 바다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그곳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 묘소. 회한의 마음으로 찾을 때마다, 그윽하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한참 늦었지만 바지 속 슬쩍한 동전 10원을 고백하며 머리를 숙인다. 지금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가 없는 아버지의 라면. 진동 앞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인 노을처럼, 내 마음을 벌겋게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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