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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힘, 기록의 힘
강병철(소설가)
1.
지금은 손영미를 읽는 중이다. 바다가 보이는 남도의 카페에서 아주 모처럼 한가로웠던 독서 과정의 연장이었다. 우편함에 쌓이는 책의 두께가 늘어나는 만큼 집중도가 떨어지면서 초로 이후 나의 독서 습(習)에 대한 회한에 빠지던 시기에 하필 그를 만난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오랜 세월 심장으로 통했던 글지에게조차 눈빛을 맞추기 힘든 체질이 되었으니 필시 몸이 쇠하는 과정이리라.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로 ‘인상 비평’ 위주의 글을 쓰는 체질인데 작가와의 특별한 기억이 마땅치 않은 것도 이유가 된다. 문학 단체의 모임에서 그와 몇 차례 회동을 했으나 이미 내가 숨은 그림 체질로 바뀌면서 자리만 채우는 척 사라질 즈음이다. 그리고 손 작가 역시 내색 없이 지켜만 보다가 고즈넉이 사라졌으니 피차간에 미적미적 헤어진 셈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나 개인의 창작 이력과 푸념 그리고 그의 소설에 대한 소회가 일기장처럼 전개되리라. 마음이 조금은 무거웠다.
나는 80년대 초반부터 작품 활동을 했다. 85년 그해 여름, 『민중교육』필화사건으로 여고 교사를 쫓겨난 캐리어를 등에 지고 『삶의 문학』을 거쳐 『충남작가회의』의 원조 멤버가 되었다. 89년 공주 갑사에서의 창립대회 때 부회장을 맡았으며 회장만 6년 동안 역임했다. 긴 세월 청소년 잡지 『미루』의 발행인으로 분주하게 활동했으니, 에너지 청청하던 중장년의 시절이다. 그리고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다. 나도 야생마처럼 치달리던 활동에서 발을 빼고 시나브로 변방으로 서성이던 길목에서 손영미 작가를 만난 것 같은데, 그나마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설 『빛의 소멸』의 글자 수를 맞춰보다가 어럽쇼, 서두의 연쇄체 문장 몇 줄에 집중되는가 싶더니 금세 활자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이다. 색깔에 무늬가 있듯 문장에도 향기와 호흡이 있음을 떠올리며 가슴을 다독다독 쓰다듬는다. 먼저 읽었던 쪽수를 되새김질하는 과정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가 마침내 지면이 반들반들해지도록 몰입되었으니 이제 조금은 덜 미안한 일이다. 동시에 나의 게으름에 대한 성찰도 첨부되었으니 바람직한 심장박동일 수도 있다.
2.
「빛의 소멸」의 주인공 문경이 태어났던 1988이란 숫자를 만나면서 문득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는다. 88년 올림픽이란 희뿌연 슬로건으로 밀어붙이던 5공화국 안갯속 청사진이 커튼을 헤치면서 불쑥 가로막는 것이다. 그랬다. 그날이 오면 ‘오-우리 대한민국’에 축복이 넘칠 거라며 연신 팡파르를 울려대던 신군부 정권 어두운 시국이 있었다. 그 막바지 88년, 나는 해직 교사 4년 차로 한반도 전체가 장벽으로 막혀있다며 절망하는 중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승리로 마침내 직선제 염원을 쟁취했으나 당시 야당 후보였던 ‘3김(金)씨’의 분열로 집권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나는 희망을 잃었다.
‘민주주의와 통일과 빵과 사랑’만을 품으며 살겠다던 울울 혁명의 심장이 시나브로 잦아든 것이다. 동지들과 이맛살 맞댄 그 결의대로 투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자책감도 이유가 된다. 동시에 남한의 자본주의가 약진하면서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했으니 정치와 경제가 반드시 양립하는 게 아님을 터득하면서 느낀 공복의 쓸쓸함도 서린다. 비약적 템포의 자본화 시대에도 빛과 그늘의 엄청난 스펙트럼이 존재함을 체득한 건 나중 얘기이다. 그 슬픈 ‘서른 살’이란 단어가 소설의 첫 문장으로 나오면서 문득 인물들을 촘촘히 살피기 시작한다. 아리고 시리다.
그러니까 주인공 문경의 ‘서른 즈음’과 필자의 연륜은 대략 또 한 세대의 간극이 벌어지는 셈이다. 문청 시절에는 저 멀리 아득한 줄만 알았던 ‘서른 즈음’이 삽시간에 아득한 과거로 변신했으니 세월이 빛의 속도이고.
그즈음 난 서른하나라는 내 나이에 심술이 잔뜩 나 있었다. 서른 안팎의 또래들이 술만 마셨다 하면 악을 쓰며 불러대는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멀미가 날 정도였다. 게다가 잔치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잔치는 끝났다며 문을 걸어 잠근 시인도 있어도 몹시 억울했다.
-「빛의 소멸」9쪽
논어에서 ‘이립(而立)’이라 칭하던 나이 서른은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입(立)’은커녕 갈대처럼 흔들리는 세대로 눌려버렸다. 그 집단 하향화의 시점이니 ‘자리 잡은 기성인’의 위상이 전혀 될 수 없는 것이다. 조국의 미래와 개인의 자존, 가정과 삶의 주체까지 모든 움직임이 칭칭 결박된 불완전한 시스템으로 변신 되었으니.
글쟁이들 또한 또한 예외가 아니니 모든 작가 지망생들이 불안한 심리상태로 헤매던 시점이기도 하다. 김소월과 윤동주, 나도향과 김유정처럼 서른 전후에 시대를 풍미하던 식민지 시대의 스크린은 자막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자판을 멈출 수는 없다. 문학의 늪에 빠진 이상 끈을 놓는 게 불가능하니 혼신으로 글자판만 두들기는 것이다. 벼랑으로 밀리면서도 다시 ‘시시포스의 돌’을 굴려 올릴 수밖에 없다. 문득 심란함이 빨랫줄에 치렁치렁 널리던 지난 습작 시절이 떠오른다. 소설 작법은, 특히 단편 소설은 긴장의 리듬에서 한 문장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아서 더 그렇다.
고래가 나타났구나!
난 정말 고래인가 싶어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잡고 보면 새끼손가락보다도 더 작은, 등 굽은 새우였다.
어둑새벽과 해 질 녘 어둠은 결이 달랐다. 새벽, 빛으로 가는 어둠엔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해 질 녘에서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드는, 검은 바다를 닮은 암흑 속에선 희망도 검게 물들었다. 회색 노을이 번지는 반지하 방에서, 나는 점점 더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잠겼다가 어둑새벽이 오면 허우적거리며 나오기를 반복했다.
-『빛의 소멸』67쪽
발단의 첫 스터트에서 흡입력을 보여줘야 독자의 눈을 단박에 모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간 부분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그물망처럼 촘촘하고 변화무쌍하면서 인과관계가 튼튼해야 구성의 가동성이 인정된다. 반전을 포함한 참신한 결말로 독자의 감동과 여운을 끌어와야 하니 무릇 소설 작법의 처음과 끝까지 뭐 하나 놓칠 수 있는 게 없다.
주인공 문경 역시 그 흐름을 타고 살던 문청 출신이다. 하여, <소뜰>이란 소설 모임에 입(入)하면서 습작 도정의 이정표를 점검하며 틈새를 엿본다. 여기서 손영미는 멘토 작가를 등장시켜 습작 시절에 고뇌했던 문장의 숙련과정을 한꺼번에 드러내었으니, 놀라운 순발력이다.
멘토 작가가 호명하는 이름은 소설 모임의 닉네임이고 나머지 문장은 문맥에 대한 단평임을 밝힌다. 구성의 필연성은 차치하고라도 소설 작법의 입체적 시각이 동시에 드러나니, 아무래도 아래의 글은 작가 지망생들의 교본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소설 작법 교본을 훅 던진다. 문체와 독자와의 접근성, 문장 용어와 성장 속도 그리고 대사와 방법론까지 재빨리 총망라하는 것이다. 그의 글을 보자.
바하, 혼자만 속으로 웅엉웅얼하지 말고 우리가 알아듣게 써줘요. 발상을 빛나는데, 왜 확 지르질 못해요? 어차피 읽을 사람도 우리뿐인데 뭐가 두려워서 머뭇거려요?
쌀고는 주인공을 밖으로 끌어내요. 바깥 구경 좀 시켜주라구요. 주인공은 햇살과 바람을 만나고 싶어서 말라죽을 것 같은데, 매력적인 주인공을 왜 방구석에만 가둬놓는 거야? 근데 문장은 언제봐도 최고네요.
육펜스는 참 좋다! 등장인물이 그냥 자기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돌아다니잖아. 그런데 배경이 음침해요. 어둠을 거둬내 봐요. 그렇다고 확 걷어내지는 말고, 그럼 또 너무 밋밋하지. 아주 살짝 조금만.
사짜, 아기 엄마들을 위한 육아 책 쓰고 싶다면서요? 그러려면 어깨에 힘 좀 빼고 말랑말랑하게 다가가야지. 전문용어 좀 그만 쓰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의학 영어 읽다가 혀 꼬부라지겠어. 사짜의 에피소드는 에세이로도 충분하게 좋지만, 웹튼으로는 괜찮을 듯해요. 필요하면 그림작가 연결해 줄게요.
내 이름은 빨강은 곧 하산해야 할 것 같아. 나보다 더 잘 쓰면 난 어쩌라고? 내가 표절하게 될까 봐 겁나. 근디 묘사가 과해서 질려요. 음식에 온갖 양념을 지나치게 넣어서 원재료의 맛이 실종된 느낌? 나 이렇게 잘 써, 하는 자아도취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잖아.
-「빛의 소멸」52쪽
먼저 묘사에 대한 경고이다. 망설임도 금기 사항이지만 지나치게 오버를 해도 안 되니 그 조율도 조심스럽다.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면 정작 주제의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다. 가령 ‘나는 너를 피 터지게 사랑한다.’ 라고 표현하는 순간 ‘피 터지는’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사랑한다.’는 종결어가 희석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칭찬과 질타가 반복되면서 습작 청년들을 견인하는 것이다.
칙칙한 언어의 반복을 경계하란다. 독자들이 지루함에서 벗어난다는 충고는 단어의 명암과 리듬을 조율하라는 의미이다. 문장이 가볍기만 해도 안 되지만 너무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도 금기이다. 그러니까 산문의 운율은 어휘의 명암에서도 존재한다’며 슬쩍 한 수 덧붙여 주는 방식이다.
복선을 던진 다음 후반부 어디쯤에서 사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주는 것도 반전의 구성 방식이다. 얽힌 실타래가 풀릴 때마다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니 그건 손 작가 특유의 문장론일 수도 있다. 끝까지 독파해야 주제가 파악되니 책을 덮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시키면서 독자들을 수시로 우롱하는 것도 긴장감을 이어가는 구성 방법이 된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면서 팽팽한 끈을 밀고 당긴다. 일반적인 상식을 얼마든지 벗어나는 게 좋다는 훈수는 덤이다. 주제를 설정하면 무조건 끌고 나간 다음 해결책을 찾으라는 주문이니 그게 바로 대담한 필력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일상의 한계를 탈피한 과감한 구성이 바로 픽션 형식의 특장(特長)이다. 소설이 그렇고 대박을 치는 영화나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한 컷, 한 줄도 놓칠 수 없다.
창작 행위가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작업을 뒤늦게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작의 세계에 발을 딛는 순간 그 마약의 덫을 벗어난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경은 작가 지망생으로 30대 초반 여성 인물이다. 신문사 문선공 출신인 조부 유석이 있고 거품 같은 로망으로 두바이행을 시도했던 부친 진호가 등장한다. 소설적 배경을 청주와 무심천 공간으로 정한 것은 『직지문학상』을 겨냥한 구도이리라. 조부는 동갑나기 작가 박완서의 나목(裸木)을 필사하던 아내 명희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아들과 손주가 창작 소망을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부자간의 갈등이 이어진다. 조부는 문선공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컴퓨터 시대의 도래로 직업 자체가 사라지니 그게 자본주의의 비약에 밀린 장인정신의 소멸이다. 문경은 우연히 글쓰기 모임에 참석하여 ‘유석-진호’에 2대에 걸친 소재를 쓰기 위해 고뇌한다. 육필 원고를 컴퓨터로 입력하여 <소뜰>의 멘토 지도 작가에게 보여주면서 필력을 평가받고 공모전에 출품시키니 결선까지 오르게 된다. 문경은 조부를 휠체어에 모시고 문화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진호를 만나면서 작품이 마무리된다. 부자지간의 오랜 갈등이 마지막에서 화해가 되면서 독자에게 안도감을 주는 결말이다.
액자 소설의 긴장감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작업에서 나온다. 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느리게 읽힐 수 있지만 맛깔에 취하면서 이미 넘어간 부분을 다시 되풀이시키는 마력을 보여주니 다시 읽을 때마다 색채가 진해진다. 소설적 문체와 시적 서정성이 합체된 문장이니 그게 여성 작가 특유의 체질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메타포와 운율, 화자의 시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고리를 바싹 당겨야 한다.
3.
저에게 소설이란 때론 아름답고, 때론 고단하고 남루했던 지난 시간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년의 마루가 어룽거립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결 고운 마룻바닥이 되도록 얼마나 많은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었을지, 나이테에 담긴 세월과 자연의 순환을 되짚어 봅니다. 기억으로 남은 상처와 결핍의 시간, 그 「순수의 기억」을 찾으려 희망도 절망도 없이 표류하며 떠돌던 저를 구원해 준 것이 소설입니다.
- ‘작가의 말’에서
그는 충남 공주 지역에 무연고로 정착한 여성 소설가이다. 쿵, 하고 나타나지 않고 이웃집 밤마실 가듯 슬며시 나타났는데도 땀땀이 배인 그물망 문체와 치밀한 구성에서 설핏 긴장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독자들이 얼떨결에 넘어갔던 전반부 문장을 아, 하는 감탄과 함께 다시 점검하며 놓친 내용을 담아 흡입을 재시도한 것이다. 특유의 섬세한 문체를 떠올리며 여성작가라는 점도 따로 첨부하고 싶다. 그것은 물리적 한계이자 극복을 통한 장점으로 변신되기도 한다.
학교를 나와서도 학원가를 서성이며 나는 5년째 검은 양복에게 시달리고 있다. 결국 지유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다짐과 함께 별거하기로 타협하고, 지금은 합의 이혼 과정인 3개월의 숙려기간 중에 있다. 경솔한 이혼을 막기 위하여, 라니! 진작에 경솔한 결혼을 막아줬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숙려의 시간이라기보다는 또 어떤 풍선이 터질까,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가 무사히 손꼽아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코로나 시대의 기적」156쪽
여성 소설가들이 중심에 서는 시대는 기실 어제오늘의 사태가 아니다. 박경리, 박완서, 최명희 등 걸죽한 선배 시대가 훌러덩 지나가더니 공지영, 신경숙, 김애란, 정지아, 한강 등이 만만찮은 문체로 뒤를 잇고 있다. 여성 작가들에게 여전히 물리적 장애물이 겹쳐 있긴 하지만 이미 선배 세대들이 다져놓은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으니 예전보다 조금은 수월하리라. 전자는 출산과 육아 등 가정사가 정리되면서 비로소 문학적 열망을 분출한 선배 세대이고 후자는 성차별의 가시밭을 극복하며 열정을 쏟은 소위 자립형 페미니스트들이다.
문득 식민지 시대 여성 문인 전사들을 도마에 올리고 싶어진다. 봉건적 남근(男根)의 권위 의식은 여성의 개방 의식과 필봉을 질타하며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었다. 나혜석이 가장 많은 수모를 당했다. 용산역 매표소에서 ‘파리행’을 부르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 티켓을 끊던 여성해방 주의자들을 기득권 사내들이 놔둘 리가 없다. 김동인 등 친일 작가에게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면서 행려병자로 쓰러진 김명순의 마지막 행적도 시대의 비애이다. 천승세의 모친 박화성 작가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지난(至難)한 시련 속에 잦아졌으니 선각자의 고난이란 파헤칠수록 죄책감의 점철이다. 그런데 이 늦깎이 작가는 연약한 듯 과감하니 또 다른 디테일이다.
나는 도장을 넣은 콘돔을 받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이미 태양은 성큼 떠오르고 갯벌은 꿈틀꿈틀 제 몸을 비틀며 깨어나고 있다. 모래톱 틈새마다 구멍이 퐁퐁 열리며 바닷물이 차오른다. 일찍 눈을 뜬 꽃게 한 마리가 갯벌 위에 긴 흔적을 남기며 지나간다. 꽃게 등 위로 도장을 넣은 콘돔이 살포시 얹히며 볼품없이 쪼그라든다.
-「코로나 시대의 기적」165쪽
둥실둥실 내려오는 콘돔 중 하나에 이혼 도장이 들어있단다. 그 풍선 모양이 갯벌 위에 눈송이처럼 덩실덩실 내려오는 건 코로나 시대의 격리가 만들어낸 특이한 개연성이다. 여자가 달리기 시작하자 게 구멍에서 쏘아 올리는 물살이 분수처럼 치솟는다. 양쪽 팔을 쫘악 벌려 잡아당겨도 콘돔은 질기게 늘어나기만 할 뿐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꽃게는 다리를 휘저으며 바다로 기어가는데 나머지 텅 빈 콘돔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가라앉는다. 바다가 되고 싶은 하늘과 하늘이 되고 싶은 바다가 달릴 때마다 서로 밀고 당기며 출렁인다. 아찔하고 황홀하다.
그래서 그의 과감한 도발도 문장의 혁명이 될 수 있다. 그렇다. 문법을 터득했으면 그다음은 문장의 혁명이다. 그동안 정의로운 규범으로 알고 몸에 껴안고 살던 타성의 껍데기를 내동댕이치는 찰나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을 만난다. 손영미는 문장에서 한 발자국씩 거리를 둔 채 기존의 의식을 뒤집으면서 자신만의 특장을 내지르는 작가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보고 바로 걷기’의 시점도 작가의 근성이다. 때로는 거꾸로 본 것들이 정자세로 바뀌기도 하는데.
붉은 색깔은 한때 공안정국을 유지하는 금기 단어로 사용되었다. 제도권 건물을 점거한 운동권 대학생들의 붉은 머리띠 구호가 빨갱이 수법이라며 어용 언론을 쑤시며 난리를 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언제부터였나,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2002년 서울 월드컵 대회에서 광장을 꽉 채운 ‘붉은 악마’ 유니폼의 등장으로 함성을 쏟아내는 것이다. 레드컴플렉스에 짓눌렸던 운동권 세대로선 그 팔팔한 이미지 변신에 어리둥절한 노릇이다. 지금은 보수 정권들이 빨간 잠바를 착용한 채 거리 홍보전을 벌이니 그게 제도권을 등에 업은 색깔론의 선점이다.
최근 원조 색깔론 부류들이 ‘죽창가나 부른다’며 폄하하는 브리핑이 인터넷을 달구는 중이다. 그 죽창은 김남주 시인의 시 「노래」에서 비롯되면서 진보 청년들의 스크럼을 이어주던 비장한 무기였다. 갑오 동학년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총을 쏘는 왜군을 향해 죽창을 번뜩이다가 쓰러진 처절한 저항의 의미인데, 그들의 혀에 넘어가면서 자칫 조롱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 하여, 동일한 단어도 집단의 혓바닥에 따라 엄청난 차이로 갈고리 거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최근 ‘4.3항쟁’이나 ‘5.18 민주화 항쟁’에 대한 의미 폄하가 불쑥불쑥 드러남을 예사롭게 지나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진보 집단도 고정된 눌림을 벗어나야 ‘마음의 눈’이 적확해진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문장이 혁명적 어휘로 주목받던 순간부터 이 땅의 모든 민초들이 불순하거나 찌질한 위상으로 취급되는 것도 성찰의 필요가 있다. 단지 ‘나는 껍데기가 아니야’ 라는 자존으로 적당히 물러선다면 그건 또 다른 파쇼와 다름이 아니다. 그러면 껍데기와 알맹이는 상호보완적 관계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알맹이야말로 오히려 껍데기의 보호가 없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연약한 귀족형 실체라는 본질은 의도적으로 폐기해버린다. 여기까지만 하고.
일부러 느긋하게 선물을 건네는 듯한 그에게서 상자를 빼앗듯이 낚아채어 스카프 사이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는다. 그와 마주하는 시간의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 두꺼운 유리문이 그의 마지막 말을 잘라먹는다.
“가정법원이 양재동 맞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거 맞지?’ 하는 스완의 화법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며 폭발할 것 같다.
-「코로나 시대의 기적」143쪽
남편 스완은 호수 위의 백조였고 ‘나’는 그 우아한 풍경을 받쳐주기 위해 감춰진 수면 아래서 물갈퀴 굴리며 고난의 유영을 해야 했다. 신혼여행지인 그리스에서 예물 시계를 잃어버린 것도 모두 계략이었으니 결혼 예물로 피아제 폴로 시계 하나만 요구할 때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 복선은 스완이 결혼 전의 도박 빚으로 바꾼 것으로 판결된다. 이제 합법적으로 헤어져야 한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코로나 터널이 마감에 임박해진다. 지금까지 목을 조이던 코로나 계엄령이 풀리면서 공항에서 만난 스완의 여유로움은 짧은 부부 생활의 연장선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완전한 결별까지는 아직 3개월의 숙려기간이 있다. 경솔한 결혼은 막아주지 못한 대신 경솔한 이혼을 막아주는 장치이니 그게 해결의 덫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덕분에 합의 이혼도 비대면으로 진행되어 편안하게 헤어지는 잇점도 있긴 하다.
사라짐과 소멸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폐사지를 닮은 우리 집,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회로에 스위치의 전환을 해야 하는데 그 장소가 여기 징검다리다. 몸이 지하로 들어가려면 마음이 먼저 지하로 내려가려는 준비를 해야 한다. 몸은 지하인데 마음이 루프탑이면 몸과 마음이 다 혼란스럽다. 이건 매일매일 겪어도 시차만큼이나 적응하기 힘들다.
-「빛의 소멸」37쪽
문경은 왜 귀갓길에 폐사지를 떠올렸을까? 나 혼자 ‘폐사지’라는 어휘와 실체를 주목한다. 얼핏 허허벌판처럼 보이지만 땅속 깊은 곳에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는 그 자리이다. 반지하에서 이사를 가서 만난 또 다른 반지하 자리도 아득한 옛날 폐사지의 변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법당과 공양을 준비하던 부엌 그리고 수도승과 신도의 발자국으로 붐볐던 그 흔적이 땅속 깊은 자리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설의 가능성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굴절을 통한 빛의 파장을 쏟아내다가 그늘진 자리로 맥을 이으면서 하시라도 복원이 가능한 게 그 폐사지이다. 그러니까 빛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신한 실체로 재생되는 것이다. 폐사지가 옛 사찰의 흔적이듯 무덤을 만들거나 재를 만들어 산야에 뿌리는 것도 빛과 소멸의 연장된 도정이다. 만상의 법칙이 모두 그렇다.
내가 처음 전남 진도에 들어왔을 때는 가로수마다 벚꽃 봉오리가 부푸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하얀 꽃잎이 눈보라처럼 쏟아지더니 어느 순간 푸른 새순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노랗게 만발하던 유채꽃 벌판이 초록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손영미의 소설에 녹아든 탓일까, 이 땅의 모든 엽록소들도 소멸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산란으로 이어지는 게 대자연의 섭리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때렸다. 빛은 에너지 전달과 동시에 소멸하지만 그 파장과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작가의 주제를 떠올려 연결시킨 것이다. 그게 새로운 변신의 진행형이며 삶의 동력이 된다.
의문점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택배 기사에게 그리 호들갑 핸드폰으로 재촉을 해대는 게 리얼리티의 관점으로 어느 정도 타당한 걸까? 모친의 필사본을 불태우려던 진호가 순간적으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도 인과관계가 허전하다. 「순수의 기억」에서 나를 때리던 염딸이 먼저 쓰러졌는데 왜 아무도 그를 부축하지 않았을까. 「빛의 소멸」의 ‘바흐’나 「코로나 시대의 기적」의 ‘D’의 표정도 묵묵한 후광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 움직임이 별로 없다. 그들의 인과관계를 어떻게 연결시켜 독자들과 소통하려는가?
그러나 소설은 개연성보다 감동에 더 큰 무게 중심추를 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포인트는 팩트냐 아니냐의 점검 여부보다 감동으로 모여질 수밖에 없다. 독자를 편안하게 하든 절망에 빠지게 하든 모든 결론은 감동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일단 성공이다.
4.
1969년도 일기장의 사연이니 나의 중딩 1년 차 기억이던가? 5월 어느 날 음악 선생님께서 ‘스승의 노래’를 가르치다가 슬리퍼 밑창으로 내 무르팍을 으깨놓던 기억이 겹치면서 소름이 보스스 올라온다.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부분의 악보를 따라부르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부모부터 받은 은혜를 스승님께 연결시키기 위해 혼신으로 소리를 높였는데 싸대기가 날아왔다. 변성기 소년들의 목청이 문제였다. 사춘기 소년들은 특히 음의 오르내림 순간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우스워서 낄낄대는 게 럭비공 시기의 전매품인 줄 알고 방심한 대가로 나는 무르팍이 으깨지도록 맞았다. 쉬는 시간 내내 울었고 자취방에 와서도 거울 보며 시끈시끈 더 울었다. 이건 순전히 손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54년 전 기억인데.
정수리가 화끈한가 싶더니 선홍빛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간 내가 아니라 날 노려보던 염딸이 쓰러졌다. 염딸은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엄지와 검지로 우아하게,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라도 흐트러질까 염려스러운지, 먼저 엉덩이로 착지한 다음 머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나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 염딸을 바라보았다.
-「순수의 기억」108쪽
음악 교사 ‘염딸’로부터 받은 사춘기 시절 ‘상처의 기억’에 대한 시간과 암금의 묵시록이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폭력은 당연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간극이 크다. 굳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해자는 모두 잊은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피해자 혼자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평생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경우는 이미 대중 매체에서도 비일비재한 사태이다.
그래서 막대기에 맞아 흘리던 선홍빛 액체는 오래도록 시달리는 트라우마의 색감으로 남는다. 게다가 남편 경섭이 저어했던 불 냄새까지 빨갛게 겹쳐진 것은 몸이 쇠해진 탓도 있다. 그 선홍빛에서 연산홍 향기나 앵두꽃 냄새가 나야 하는데 아픈 기억의 통각점이 겹치면서 진한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남편 경섭은 본래 연두를 품고 싶었다. 거꾸로 보는 세상에서 푸른 빛깔이 허공으로 번지니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색감의 발견이다. 등산길 거꾸리에 누웠다가 만난 장면인데.
나는 산중턱에서 운동 기구인 거꾸리에 누워 있었다. 거꾸로 보니 세상은 더 넓고, 비현실적으로 파랗게 보였다. 여기저기로 눈길을 옮기는데 낯익은 얼굴이 설핏 스쳐 지나갔다. 깜짝 놀라 거꾸리에서 내려와 연둣빛 점퍼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챙이 넓은 모자까지 쓴 모습이 평소의 경섭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낯선 옷차림에도 연두는 경섭이 확실했다.
-「순수의 기억」118쪽
작가는 침대에서의 마지막 순간에도 기억의 색깔을 더듬는다. 주인공은 기억의 꼬리를 이어가면서 색깔을 통해 삶의 질곡을 복원하려 한다. 120개의 색연필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수만 개의 색채로 분화하면서 마지막까지 이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눈을 감는데.
‘이 사람들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뭔기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 그런 전혀 기억에 없는 두 남녀가 자꾸 나에게 엄마, 엄마, 부르며 보채는 것이 귀찮아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이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찾고 있는 아들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려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도 부른 것 같은데, 뭐였지? 혀끝에서 뱅뱅 맴도는 이름, 수십 수백만 번도 더 불렀을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 내 엄마는 어디 갔지?’
-「순수의 기억」 128
어린 피붙이들과 헤어진 이후 남편 경섭의 곁으로 찾아가는 결말이다. 그는 스스로 이승의 닻줄을 끊으려다가 67세를 운명으로 ‘스트로베리 문’을 찾아가며 스토리를 마감한다. 체육공원 거꾸리 기구에서 바라본 세상처럼 넓고 참신한 세상을 꿈꾸다가 손을 놓쳤으니 모두 원인 무효가 되었다.
요단강 건너 저 세상은 빛의 합체 공간이다. 모든 빛을 한꺼번에 섞으면 흰빛이 되고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된다. 저승에서는 흰빛과 검정이 서로 하나로 통하는 또 다른 공간이다.
5.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가 되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실체이다. 그래서 기억은 작가 혼자의 것이지만 기록물은 독자 모두의 소유로 확장된다.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세월의 기억을 가로채어 기록 정리하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요 권리가 된다. 그 소설의 세계는 마음대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나갈 수는 없으니 그게 운명이다.
AI 시대의 도래 이후 아날로그의 개성이 마모되면서 싱크홀처럼 허방다리에 빠지곤 한다. 소통은 빛의 속도로 빨라졌지만 손등을 감싸는 피부의 접속이 아니라 전자파의 반짝임이다. 그 ‘접속적 비접속’에 익숙해진 연장선일까, 코로나 시대가 지나가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마스크를 쉽게 벗지 않을 것 같다. 익명성으로 감추고 싶은 부분도 결국은 자기 보호 본능이 된다. 직접적 터치가 줄어들면서 타인과의 거리감이 존중되고 편안해진 면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 격랑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제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늦깎이로 입문한 그가 이제 막 땅 냄새를 새롭게 맡은 풀꽃처럼 뿌리 성성이 내릴 참이어서 더 그렇다. 『빛의 소멸』같은 문장들을 더욱 살뜰히 보듬어 그간의 휴지기를 보상받는 멘탈로 정성이나 쏟을 것인가. 아니면 더 큰 결단으로 최정상에 오르겠다며 운동화 끈 졸라맬 것인가. 장차 어떻게 그의 노하우를 만들어 나갈지는 기다려볼 일이다.
강병철
시집『유년일기』『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꽃이 눈물이다』『호모중딩사피엔스』『사랑해요 바보몽땅』발간, 소설집『비늘눈』『엄마의 장롱』『초뻬이는 죽었다』『나팔꽃』성장소설『닭니』『꽃피는 부지깽이』『토메이토와 포테이토』발간, 산문집『선생님 울지 마세요』『쓰뭉 선생의 좌충우돌기』『선생님이 먼저 때렸는데요』『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저표』『작가의 객석』『어머니의 밥상』발간, 교육산문집 『넌, 아름다운 나비야』『난, 너의 바람이고 싶어』『괜찮다, 괜찮다, 괜찮다』편집